마네와 올랭피아 https://news.v.daum.net/v/20210206150004729?x_trkm=t 링크한 상단의 기사는 흔한 개소리다. 보나마나 보수꼴통이 쓴 글이다. 예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자의 수박 겉핥기다. 구조론에서 인상주의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 인상주의는 혁명이다. 거대한 권력이동이다. 인상주의를 이해했다면 민주주의를 이해한 것이다. 인상주의를 이해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따라 봉건인과 근대인이 갈린다.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민주주의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노예로 바른길을 가느니 자유인으로 그른 길을 가겠다. 생각하라. 민주주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는가? 프랑스 혁명은 방데 농민학살로부터 시작되었다. 왜 혁명은 학살로 시작하는가? 우리가 초딩은 아니지 않은가? 낭만과 판타지를 버리고 차가운 진실을 이야기하자. 아름다운 거짓을 버리고 씁쓸한 진실을 이야기하자. 옳지 않아도 가고 욕을 먹더라도 가야 하는 길이 있다. 유명한 '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식사'로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마네는 주류 기득권세력에게 억압받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 추종자들을 멀리했다. 물론 이 기사를 쓴 쓰레기는 추종자들을 멀리했다는 데 방점을 찍는다. 왜냐하면 똥이니까. 인증하고 가는 것이다. 기득권을 도발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검은색과 흰색의 대칭에 따른 효과를 탐구했을 뿐이다? 순수한 색채에 대한 실험일 뿐이다. 말은 그럴듯하다. 그런 말을 믿냐? 초딩이냐? 개소리하고 있네. 우주 안에서 권력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마네는 왜 욕먹을 그림을 그렸을까? 권력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가 등장하기 전에는 신을 그리거나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권력을 그린 것이다. 신의 권력을 선전하고 귀족의 권력을 홍보한다. 화가는 권력자의 하수인이다. 원래 예술은 태생이 어용이다. 당나라의 이백만 어용시인이 아니다. 원래 시라는 것의 출발이 어용이다. 궁정시인, 궁정화가, 궁정음악가로 시작하는 것이다. 살리에르와 모짜르트만 궁정음악가였던 것은 아니다. 다들 그랬다. 베토벤이 악보를 인쇄하여 팔아먹기 전에는 궁정에 출입하여 출세하는 길 외에는 길이 없었다. 권력이동이다. '올랭피아'를 그린 이유는 속물적인 부르주아를 고발하려 하기보다는, 향락으로 가득한 19세기 말 파리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놀고 있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쪽에선 반역자, 한쪽에선 혁명가로 불렸다? 웃기셔. 이거 쓴 기레기가 비겁하다. 그는 혁명가가 맞다. 자신이 혁명가라는 사실을 몰랐을 뿐. 예술가들은 원래 인문학적 소양이 낮다. 공부는 하지 않고 죽어라고 그림만 그려서 물정을 모른다. 음악가들도 대개 무식하다. 독서를 하지 않는다. 마네는 권력을 추구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혁명적이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은 혁명적이다. 한때는 좌파였는데 우파로 돌변했다. 왜 그랬을까? 달리의 그림을 본 좌파들이 주변에 모여들어 그를 칭송했기 때문에 그는 좌파가 되었다. 어느 날 황태자의 모습을 우연히 보고 감동받아 우파가 되었다. 정치노선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권력을 탐했고, 그의 그림은 권력적이었고, 그 점에서 그는 진보적이었으며 그는 황태자를 만나보고 더 쉽게 권력을 얻는 방법을 알았다. 발자크의 소설은 진보적이다. 그러나 그는 사교계에 관심이 많은 보수꼴통이었다. 그런 예는 흔하다. 작품은 분명 진보가 맞다. 그런데 우파가 된다. 왜? 좀 뜨면 사람이 꼬인다. 귀족들의 사교계에 출입한다. 인맥에 의해 우파가 되어 있다. 이문열 현상이다. 우파를 만나다 보면 우파가 된다. 화가는 그림으로 논해야 한다. 달리와 발자크와 마네는 정치적으로 우파라도 그림은 좌파적이다. 인정하자. 이제 진실을 이야기하자. 마네가 그런 그림을 그린 것은 관객이 거기에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반응했으니까. 내가 반응했는데 왜 남들이 반응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상호작용을 거부할 것인가, 추구할 것인가는 전략적 판단에 달려 있다. 그 경우에는 상호작용이 증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라는 것은 구조론의 가르침이다. 자 여기서 판단하자. 그림을 주문하는 사람에게 권력이 있는가 아니면 그림을 그리는 창작가에게 권력이 있는가? 전통적인 그림을 그리면 그림을 평가하는 기준이 전부 공개되어 있다.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이고 나쁜 그림인지 그림을 주문하는 사람이 알고 있다. 딱 요렇게 그려라 하고 요구한다. 요구대로 그려주면 훌륭한 화가다. 주문한 사람이 화가를 지배한다. 그림을 주문한 사람은 보나마나 왕이다. 귀족이다. 당연히 어용화가로 되어가는 것이다. 창작가에게 권력이 가면 어느게 좋은 그림인지 아무도 모르는 깜깜이 게임이 벌어진다. 화가가 그림을 계속 그리면 유파가 만들어져서 권력이 생긴다. 그림을 잘 그리는건 의미가 없고 유파를 만들고 흐름을 만드는게 중요하다. 거기에 성취해야 할 맥락이 있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미술계가 권력을 잡으려면 중개상이 안목을 증명해야 한다. 안목 있는 사람이 권력을 잡으려면 자기에게 유리한 게임을 설계해야 한다. 현대 회화가 난해해지는 이유다. 난해해야 중개상이 권력을 잡는다. 정치판이 복잡하고 헷갈려야 논객이 권력을 잡는다. 노무현 시절에 논객들이 목청을 높인 이치다. 이명박근혜 하수가 등장하자 정치판이 단순해져서 논객시장이 죽었다. 그림이 어려워야 중개상이 돈을 번다. 당연하잖아. 대중이 개념미술을 싫어하는 이유다. 대중은 권력게임에서 자기네가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주최측이 권력을 잡는 것이다. 주최측이 누구냐? 그림을 거래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소비자와 생산자 양쪽을 동시에 틀어쥐고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판을 설계하고 있다. 아카데미가 망하고 인상주의가 흥한 이유는 그래야 중개상이 권력을 틀어쥐고 맘대로 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그림은 초딩이 봐도 잘 그린 그림과 못 그린 그림이 구분된다. 초딩이 권력을 잡는다. 그 초딩은 왕이다. 다빈치든 미켈란젤로든 라파엘로든 왕의 하인에 불과했다. 궁전을 짓고 교회를 건축하는 사람이 권력자다. 돈을 주지 않으면 다빈치도 그리지 않는 것이다. 인상주의는 권력이 그림을 주문하는 왕과 귀족에게서 그림을 생산하는 창작가와 안목 있는 중개상에게로 넘어간 것이며 그 과정에서 대중이 소외되고 그림이 난해해지자 팝아트가 등장하여 대중적인 그림을 주장했지만, 말이 그러할 뿐 실제로는 더 난해해진게 사실이다. 뱅크시가 등장하여 진정 대중을 위한 그림을 그린다고 선전했지만 이 새뀌도 난해한 넘이다. 뒤샹이 어려운 그림을 타도하고 기성질서를 전복하겠다고 주장했지만 이 새뀌도 난해한 넘이다. 갈수록 태산이다. 제프 쿤스는 쉬운 소재를 그렸다지만 한술 더 뜬다. 난해하다. 결국 안목 있는 사람이 권력을 잡는 것이다. 중개상은 맥락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권력게임인 것이며 마네는 그러한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며 인상주의 거지 화가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보다 살롱전을 장악하는 권력이 더 우월하다는 본질을 알았을 뿐이다. 마네는 분명히 반항아였다. 하지만 그의 추종자처럼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의식적으로 세상과 싸운 예술가는 아니다. 마네는 자신이 옳다고 여긴 것들을 묵묵히 그렸을 뿐이다. '왜 지금 이 현실을 그리면 안 되는가.' '원근법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 세상이 자신을 비난할 때 마네는 낙담했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 인간의 개인적인 신념이 혁명의 씨앗이 됐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 씨앗을 넘겨받아 싹을 틔웠다. 그리고 피카소라는 천재의 붓끝에서 만개했다. 현대미술은 이렇게 진화했다.[기사발췌] 최악의 개소리다. 진정한 개소리의 화룡점정이다. 까놓고 진실을 이야기하자. 마네는 주변부 권력보다 중심부 권력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이게 권력게임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달리도 그랬고, 발자크도 그랬고, 모짜르트도 그랬고, 마네도 똑같다. 원래 시인은 다 계관시인이고, 화가는 다 궁정화가고, 음악가는 다 궁정음악가다. 베토벤은 진짜배기다. 황태자 행렬을 보고 감탄하는 괴테를 비웃고 친구관계를 끊었다. 베토벤도 따지자면 권력지향이다. 권력자를 비난하는 좌파들도 권력지향이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민주당이 권력 잡으면 안 되나? 진실을 말하자. 혁명은 생산력에서 온다. 생산력을 높인 사람이 혁명가다. 혁명가들은 종종 기득권과 영합하는 지름길을 선택한다. 혹은 혁명을 성공시키고 구시대 기득권 흉내를 낸다. 나폴레옹처럼 혁명가이기도 하고 배반자이기도 하다. 원래 예술은 귀족들의 장식품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가는 보수반동의 성향이 얼마간 잠복해 있다. 뜨지 못하면 좌파에 가담하고 뜨면 우파가 된다. 우리는 생산력에 주목해야 한다. 권력이동은 분명히 일어난다. 인상주의는 권력의 이동과정을 생중계로 보여주었다. 우리는 거기서 영감을 받아야 한다. 대중이 생산력을 장악해야 대중의 시대가 열린다. 대중문화 시장을 발전시켜야 대중이 권력을 잡는다. BTS를 띄워야 십대 소년이 권력을 잡는다. 소년들이 BTS를 추종하는 이유다. 이게 다 권력게임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안다. 새로운 유행, 새로운 문화, 새로운 작품, 새로운 기운이 계속 이어져야 대중이 권력을 틀어쥐게 된다. 대중이 주최측이 되는 것이다. 무조건 자기네가 이기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백인이 흑인음악을 해먹은게 엘비스 프레슬리다. 흑인이 백인에게 개방한게 에미넴이다. 물론 엘비스 프레슬리는 흑인 작곡가들에게 로열티를 십 원도 주지 않았다. 서태지처럼 그냥 해먹은 것이다. 에미넴이 흑인음악을 한 것이 흑인들의 주도권에 유리한가 불리한가? 구조론의 정답은 무조건 상호작용을 늘리는 쪽으로 가라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손해다. 장기적으로는 이긴다. 단 똑똑해야 한다. 멍청하면 그냥 먹힌다. 흑인이 멍청하면 백인 좋은 일 시키는 셈으로 되고 그 반대면 시장의 파이를 키워 흑인들이 이득을 본다. 대중은 대중에게 이익이 되는 권력게임을 설계해야 한다. 인상주의로부터 영감을 받는게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