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론에서 구조론으로 근대과학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원자론과 인과율이다. 원자는 공간에 대한 관점이고 인과는 시간에 대한 관점이다. 공간과 시간의 좌표를 통해 인간은 자연을 해석한다. 인과율은 잘못이 없다. 인과율이 대수학의 근거다. 인과율이야말로 근대과학의 버팀목이다. 대수의 맞은편에 기하가 있다. 대수가 시간의 인과를 추적한다면 기하는 공간의 대칭을 추적한다. 당연히 우리는 공간의 대칭성과 시간의 인과성을 중심으로 자연을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뜬금없이 원자론이 등장한다. 맥락이 없는 갑툭튀다. 문제는 원자론이다. 원자론이야말로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장애물이다.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떠억하니 존재한다. 태어났을 때 다들 놀라하고 감탄하지 않았던가? 어라? 내가 존재하다니. 이럴 수가.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있다. 불가항력적으로 있다. 압도적으로 있다. 산도 있고 강도 있다. 버티고 있다. 당해낼 수 없다. 물러가라고 소리쳐 봤자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원자론은 하여간 그것이 분명 있으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일 뿐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는 제안이다. 인류가 스스로 한계를 정한 것이다. 원자는 쪼개지지 않는다. 쪼개지 말자는 제안이다. 선을 넘지 말자는 거다. 쪼개면 골치가 아파진다. 양자역학을 보라.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식겁하고 있잖아. 평행우주가 어쩌고 하면서 점점 배가 산으로 가고 있잖아. 혼란하다. 원자론은 인류가 스스로 한계선을 정한 것이다. 편리한 도망이다. 비겁하다. 학자는 지적 용기를 내야 한다. 쪼개지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내부가 없는 것은 외부도 없기 때문이다. 내부와 외부는 대칭이니까. 양자역학 시대에 원자론적 사유를 버려야 한다. 구조론은 원자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원자를 버리고 에너지로부터 사유를 시작한다. 원자는 1개다. 에너지는 그룹이다. 한 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고유한 속성이 결정한다. 그룹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둘 이상의 상대적인 관계가 결정한다. 양자는 그룹이다. 양자역학 시대에 맞게 원자라는 개체가 아니라 에너지라는 그룹으로 사유의 출발점을 세워야 한다. 관계는 외부에서 본 것이고 내부에서 보면 구조다. 반대로 내부의 구조를 외부로 끌어내면 그것이 관계다. 관계는 연결이고 구조는 얽힘이다. 얽힘으로 연결된다. 어떤 하나는 속성에 지배되고 인간은 그 하나의 고유한 속성을 알 수 없다. 양자역학은 그 속성을 부정한다. 수학적 관계가 있을 뿐이다. 소수는 특별한 성질을 가진다. 왜 그러한가? 이유는 없다. 그냥 소수라서 그런 것이다. 쪼개지지 않으므로 암호를 풀 수 없다.
원자는 내부를 쪼개서 왜 그런지 설명해야 하지만, 관계는 소수처럼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렇다. 관계의 기본은 대칭이다. 왜 대칭인가? 그냥 그렇다. 더 이상 설명을 요구하지 말라. 마침내 극단에 도달한 것이다. 답이 나왔다. 왜 헤어졌지? 관계가 틀어졌다. 그렇구나.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다. 관계는 둘의 연결이고 연결이 끊기면 끊긴 거다. 반대로 연결되면 연결된 거다. 왜 전구가 켜지지 않지? 전선이 끊어졌다. 음 그렇구나. 더 이상 질문할 수 없다. 관계는 명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적인 해답을 찾은 것이다. 관계의 연결과 단절 그리고 연결과 단절 여부를 추적하는 대칭성이야말로 인간이 자연으로 쳐들어가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한계다. 단절되면 끝이다. 사실이지 원자론은 얼버무린 것이며 도망친 것이다. 사고방식 자체가 틀려먹었다는 말이다. 알갱이란건 없다. 우리가 밤이나 호두나 도토리 따위를 만지다 보니 알갱이에 익숙해져서 세상이 알갱이로 되어 있다면 셈하기가 편하겠구나 하고 알갱이라고 가정해 본 것이다. 왜? 셈하기 좋으라고. 그러나 자연이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봉사하는 존재는 아니다. 겸허해져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등불은 자연의 대칭성이다. 대수학이 시간의 인과에 의지하듯이 기하학은 공간의 대칭에 의지한다. 안과 밖이 대칭되므로 밖을 보고 안을 알 수 있다. 쪼개지 않아도 내막을 알 수 있다. 더 이상 작은 소립자를 찾을 이유가 없다. 집은 벽돌로 짓는다. 벽돌은 모래로 만든다. 모래는 무엇으로 만들었지? 몰라도 된다. 모래에서 벽돌을 거쳐 건물로 가는 방향만 알면 된다. 거기서 패턴을 찾으면 된다. 하나의 패턴이 하나의 원자와 같다. 밤이나 호두는 원자처럼 낱개로 추적하지만, 물이나 사건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원자론의 사고방식은 폐기되어야 할 봉건시대의 잘못된 관점이다. 어떤 입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룹의 어떤 방향이 있는 것이다. 그룹은 움직이고 움직이면 방향이 생긴다. 효율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한 개는 효율이 없다. 두 개면 효율이 생긴다.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가면 효율적이다. 이러한 수학적 성질에 의해 존재가 성질을 획득하는 것이다. 원자의 고유한 성질은 없고 에너지 그룹의 수학적 효율성이 있다. 효율성을 만드는 것은 대칭성이다. 대칭이 축을 공유하므로 효율적이다. 여기서 출발한다. 자연이 어떻게 움직이는 것은 어떤 속성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게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두 코스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의 코스가 선택된 이유는 두 코스가 싸웠는데 그 코스가 이겼기 때문이다. 고유한 속성은 없고 상대적인 승부가 있다. 모든 존재는 이긴 존재다. 빛이 항상 지름길로 가는 이유는 그 코스가 이겼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코스로 동시에 가지만 이긴 코스만 확정된다. 입자로 보면 민주당이 국힘당보다 나은 점이 포착되지 않는다. 똥 묻은 개나 겨 묻은 개나 오십보백보다. 방향이 다르면 갈수록 격차를 벌린다. 중권들의 내로남불 타령은 방향의 차이를 모르는 입자적 사고 때문이다. 우리는 대칭으로 알 수 있는 공간의 방향과 인과로 알 수 있는 시간의 순서를 통해 우주를 깡그리 해석할 수 있다. 왜? 뭐든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절차를 통과하여 그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것은 그렇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렇게 되는 조건만 탐색하면 된다. 그 조건은 이기는 것이고, 이기게 하는 것은 수학적 효율성이고, 효율성을 만드는 것은 대칭성이다. 뭐든 대칭적으로 만들면 비용을 절감한다. 건축가들이 대칭을 쓰는 이유다. 왜 거리는 사각형인가? 비용절감 때문이다. 군인들이 사각형 모양으로 대오를 갖추고 행진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이기기 때문이다. 무질서하게 가는 부대는 전쟁에 진다. 자연이 특정한 모양을 띠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승리하기 때문이다. 상대는 외부에 있다. 즉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것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원자론적 사고는 속성이 내부에 있다는 믿음이다. 산은 왜 우뚝할까? 물 때문이다. 주변에 빙하가 있으면 산이 뾰족해진다. 원인은 언제나 바깥에 있다. 그러므로 그룹의 성질을 추적해야 한다. 어떤 인간이 특정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주변에 그런 인간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대개 그렇다. 의사결정 과정을 추적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 딱 걸리는 관문이 있기 때문이다. 병목이 있다.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모든 존재는 결정을 거쳐 존재를 달성한다. 물은 물러져서 물이고, 돌은 단단해서 돌이고, 흙은 부서져서 흙이다. 물러지고 단단해지고 부서지는 절차가 있다. 그 변화절차에 딱 걸리는 것이다. 인간의 딱 걸리는 지점은 탄생과 입시와 취업과 결혼과 사망이다. 그 인간의 정체와 수준과 역량이 들통나고 만다. 자연도 탄생할 때 들키고 변화할 때 들킨다. 변화의 관문만 지키고 있으면 된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의사결정할 때 들킨다. 본질을 노출시킨다. 의사결정이 어떤 원리에 의해 일어나는지만 알면 된다. 어떤 하나는 알 수 없다. 두 사람을 같은 곳에 놓아보면 안다. 둘이서 노는 모습을 보면 똑똑한 넘과 멍청한 넘이 가려진다. 외부와 내부는 대칭이기 때문이다. 외부와 관계를 맺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관측대상 내부의 구조를 추론할 수 있다. 겉을 때려보고 반응을 살펴 속을 알아낸다. 대칭을 통해 자연을 거의 추적할 수 있다. |
대체로 서구문명은 근원에 관심이 많고, 아시아문명은 관계에 집중하는 듯 보입니다. 양자역학은 각자 발전하던 두 문명의 문제의식에 공유점이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