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에 대해 대화하려면 지나가는 사람도 한두 번은 질문할 수 있으나 진지한 답변을 원한다면 구조론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남의 시간을 빼앗는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구조론의 제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지나가는 행인 1이 될 것인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제자의 마음을 먹으면 제자다. 정치칼럼은 지나가는 행인의 관점에서 읽어도 되지만 구조론 글은 구조론사람이 되어 제자의 자세로 읽어야 한다. 구조론은 방향과 철학과 이념과 원칙을 밝힌다. 세부적인 것은 논하지 않는다. 제자가 아니면 자세가 삐딱하다. 예컨대 이런 거다.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점잖게 가르치다가 돌연 깡패로 돌변해서 성전에서 몽둥이를 휘둘러 대는 모습을 보고 예수는 두 얼굴의 사나이인가? 말과 행동이 다르네? 내로남불이네. 이러면 피곤한 거다. 몽둥이로 원수를 사랑해준 것인가?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은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치는 말씀이고 성전에서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은 정치적인 맞대응이다. 이건 다른 거다. 이걸 구분 못하는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말이 통해야 대화를 하지.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함부로 못 마신다. 제사상에 밤을 올려야 하나 대추를 올려야 하나 이런 시시콜콜한 걸로 질문하면 공자도 난감하다. 괜히 신체발부 수지부모 이야기해서 천 년 동안 욕먹고 있는데 말이다. 여자와 소인배는 다루기 어렵다는 말도 주워담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판에 말이다. 제자라면 스승의 그런 말은 못 들은 걸로 한다. 그건 그 시대에 그 상황에 필요했던 말이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원칙과 방향만 배우고 구체적인 것은 무시한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간다. 스승의 기만 접수하고 결은 내가 판단한다. 정치적 반대파라면 이런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이런 데서 피아구분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편인지 적군인지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원칙과 방향만 접수하면 우리편이고 세부가 가시처럼 목에 걸리면 적이다. 구조론의 어느 부분에 관심이 가느냐다. 정치칼럼은 구조론의 제자가 아닌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시콜콜할 것을 따질 때도 있다. 내가 박원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김재련과 국힘당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다. 이러면 저쪽에선 그것이 노무현의 원칙이냐 하고 힐난한다. 원칙 좋아하네. 복수다. 아둔한 사람 있다. 노무현이 정치하지 말랬는데 왜 정치하냐? 우리가 이런 자와 대화를 해야 하는가? 이 정도로 이야기하면 대략 감이 잡힐 것이다. 제자에게는 점잖게 원칙을 가르치고 링 위의 상대방에게는 죽도록 패준다. 매를 아끼랴? 예수도 전광훈 같은 자를 만났으면 몽둥이로 패버렸을 것이다. 제자에게 하는 말과 사탄에게 하는 행동은 다르다. 내 자식은 사랑을 가르치고 적군은 쏴버린다. 당연하다. 그러므로 구조론연구소에서 대화하려면 제자인지 적군인지 행인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구조론의 원칙에 있어서는 시시콜콜한 것에 의견을 내면 안 된다. 예컨대 히잡을 금지한다든가 이런 데 의견을 내면 안 된다. 그런데 그게 정치문제로 되면? 맞대응을 해야 한다. 이슬람교 신자인데 노벨상급 천재에 박사라면? 알아서 모셔야 한다. 그걸 말이라고? 제자는 스승의 원칙을 존중하되 상황에 맞게 전술적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지만 스승은 제자에게 세부전술은 가르치면 안 된다. 세부적인 것을 말하면 그게 도그마로 변질된다. 마호멧이 괜히 세부적인 것을 이야기해서 융통성 없는 자들에 발목 잡혔다. 석가도 왼쪽 어깨를 드러내라는 둥 안 해도 되는 말을 해서 한국 스님들 추워서 돌아가실 판이다. 술 먹지 마라는 둥 이런 사소한 걸로 트집 잡아 스승을 괴롭히면 안 된다. 석가가 고기를 가려라 하면 알아서 적당히 먹어라는 말이구나 하고 찰떡같이 접수해야지.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니깐. 스승의 말은 원칙과 방향만 접수하면 된다. 교리로 화석화시키면 안 된다. 유연하게 해석해야 한다. 시시콜콜한 것은 질문하지 말라. 오로지 통제가능성과 맞대응의 원리를 따르라. 구조론 회원 중에도 이슬람 신자가 있을 수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통제가능성과 맞대응의 원칙이다.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사회의 문민통제를 따라야 한다. 선을 넘으면 정치적인 맞대응을 한다. 한국에서 아랍의 관습대로 명예살인을 하겠다면? 당연히 제지되어야 한다. 이런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가 있는 게임에 선수로 뛰는 것과 스승이 되어 제자를 가르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정치게임이면 칼 들고 설치는 놈은 총으로 쏴버려라 하고 맞대응을 시키는게 맞다. 스승의 가르침은 칼을 내려놓고 평화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 차이를 모르겠는가? 감독이 되어 선수에게는 점잖게 말하지만 자신이 선수가 되어 그라운드에서 뛸 때는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 침 뱉기와 꼬집기와 욕설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을 헷갈려 하는 고지식한 사람과는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없다. 알아들을 말귀를 세울 일이다. 어차피 공자의 텍스트는 제자들이 기록하고 싶은 것만 기록한 것이다. 제자들 입맛에 맞는 것만 기록되었다. 특히 증자와 자사가 왜곡의 주범이다. 공자의 달을 봐야지 공자의 손가락을 보면 안 된다. |
<아기와 목욕물>이라는 잘 알려진 비유가 있듯이-
아기를 목욕시키면서, 오염된 목욕물에 함몰된 결과,
우리는 아기까지 버리는 실수를 종종 한다
부분 때문에 큰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경우이다
순간에, 누구나 한쪽으로 쏠린 판단을 하기도 하고
탈탈 털면, 먼지는 우리에게 언제나 있다
우리가 육肉이라는 옷을 입고 있어서
과부하가 걸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독재를 할 수 없고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는 환경의 산産물이다
환경[시스템]이 고장 나 있으면
고장 난 환경이 우리에게 스며든다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어드는 경우와 같다
또 스며듬을 거부하면 불화不和하니, 그것이 싫어서
고장 난 환경에 적응을 해버리는 것이다
해서_ 스며듬과 옷이 젖어드는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통찰과 숙고와, 맥락을 살피는 관점이
늘상으로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