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배우려면 그의 목적론적 사고를 이해해야 한다. 세상 모든 사물에는 고유의 목적이 있다. 사람의 목적은 최고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행복하기 위한 것이다. 자연은 목적없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https://brunch.co.kr/@inmunart/126 [웹검색] 구조론의 통제가능성 개념은 목적론이나 결정론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르다. 목적론은 신이 한 차원 위에서 통제한다. 즉 외부에서 개입하는 것이다. 외부는 통제되지 않는 타자성의 공간이다. 반면 구조론은 닫힌계 안에서 통제된다. 통제되는 주체의 공간이라는 점이 다르다. 목적은 위하여다. 위하여는 일단 거짓이다. 인과율과 맞지 않다. 위하여는 비과학적 언어사용이다. 목적은 목적어다. 목적어는 주어와 대칭된다. 에너지 방향이 반대다. 그러므로 사건에 영향을 줄 수 없다. 통제할 수 없다. 목적은 사건을 일으키지 못한다. 사건과 상관없는 엉뚱한 것이다. 이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문제다. 사람이 말을 이렇게 개떡같이 하면 안 된다. 바른 언어가 아니다. 왜 인간은 목적어를 쓸까?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목적은 타인과 공유되는 점에서 말하기 편하다. 목적은 눈의 표적이다. 곧 소실점이다. 눈짓으로 방향을 가리키면 알 수 있다. 화장실에 간다고 치자. 왜 화장실에 가는 거지? 똥 누려고. 이렇게 이해하면 편하다. 사실은 똥이 마려워서 화장실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말이 길어진다. 똥이 마려우면 기저귀를 차면 될 텐데 왜 화장실에 가는 거지? 이걸 다 설명해야 하나? 배가 아프면 병원에 간다. 왜 병원에 가지? 건강해지려고?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배가 아파서라고 말한다. 이때는 인과율에 맞게 논리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경우에 따라 다른 것이다. 왜 화장실은 목적어를 써서 엉터리로 말하고 병원은 인과율을 써서 사리에 맞게 말할까? 화장실은 내가 잘 알지만 병원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저 편한 대로 말하는 것이다. 원인은 과거에 있고 목적은 미래에 있다. 남과 대화할 때는 과거로 대화하기보다 미래로 대화하기가 더 편하다. 지난번에 돈을 잃었기 때문에 약 올라서 베팅한다고 말하지 않고 이번에는 돈을 딸 것 같아서 베팅한다고 말한다. 말을 돌려서 한다. 그런데 거짓이다. 원인은 내부에 있고 목적은 외부에 있다. 내부로 대화하기보다 외부로 대화하기가 편하다. 외부의 사정은 눈에 보이므로 말하기 좋다. 내부사정은 보이지 않으므로 설명하기가 힘들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다. 배고픈 것은 내부사정이고 밥 먹기는 외부의 사건이다. 밥은 눈에 띄는 외부에 있다. 외부에 있고 미래에 있으면 상대방 눈에 보인다. 말하기가 쉬운 것이다. 내부의 위장은 보이지 않으므로 설명할 수 없다. 왜 서울을 가지. 고향이 싫어서라고 말하기 어렵다. 왜 고향이 싫은지 설명해야 한다. 목적론은 편하게 대화 상대방을 납득시키려고 것이다. 적당히 둘러대는 비논리적인 말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이니 최고의 선이라느니 하는 건 적당히 둘러댄 말에 불과하다. 불행이 최고의 에너지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한다. 외부의 목적은 사건의 원인이 아니다. 목적은 학습되거나 공유된 것이며 직접적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밥을 먹는 이유는 배가 고파서지 밥이 달기 때문이 아니다. 배가 고파서 무언가 먹기로 결정하고 밥이냐 빵이냐 국수냐 중에서 밥을 선택한 것은 밥이 달기 때문이다. 인간은 에너지에 의해 움직이는 동물이며 에너지의 작동방식을 깨닫지 못하므로 적당히 말을 맞추어 목적을 꾸며내는 것이다. 구조론은 또 결정론과 다르다. 사건 내부만 통제하므로 외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사건 안쪽만 결정되어 있다. 공부한 만큼 성적이 나온다는 게 구조론이다. 그런데 컨닝을 하면? 항상 예외가 있다. 컨닝을 해도 더 큰 단위로 보면 역시 시험장 안에서 결정난다. 그 바깥과 경계가 있고 한계가 있다. 사건의 범위가 커질수록 희미해진다. 작은 사건은 명확히 결정되어 있지만 큰 사건은 세부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왜 기상청은 태풍이 가는 진로를 맞추지 못할까? 태풍의 덩치가 커서 그렇다. 즉 큰 사건은 희미하게 맞추는 게 바로 맞추는 것이다. 작은 사건이라도 양자 단위까지 맞출 수는 없다. 큰 사건은 큰 범위에서 맞고 작은 사건은 작은 범위에서 맞으며 작은 사건도 현미경을 들이대면 애매해지고 큰 사건도 윤곽만 따지면 명확해진다. 봄이 오고 그다음에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는 것은 명백하다. 큰 틀에서는 예측이 다 맞는 것이다. 큰 틀에서는 맞는데 세부적으로 안 맞는 것은 사건이 큰 단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례가 있으며 비례로 보면 명확하다. 통제가능성은 중요하다. 이춘재는 30년 전의 범행을 정확히 기억해서 수사관을 놀라게 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보면 이춘재의 기억력이 예외적으로 특별하다. 이춘재는 머리가 비상해서 기억했거나 특별히 메모를 해서 기억했다. 통제가능성 관점으로 보면 이춘재는 그것을 기억할 만큼 오르가즘을 느꼈기에 살인중독에 걸린 것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방향이 반대다. 일반적으로는 보통사람을 기준으로 놓고 이춘재를 거기서 엇나간 플러스로 본다. 통제가능성으로 보면 그저 죽일 수 있으니까 죽인 것이다. 죽일 수 있는 조건이 죽인 사건보다 크다. 이춘재가 느낀 오르가즘이 컸다는 말이다. 범죄자는 양심에 찔리고 그 때문에 고통받는다. 그럴수록 중독성이 크다. 양심에 찔리는 짓을 태연하게 하려면 더 많은 에너지를 끌어와야 한다. 더 많은 호르몬이 나와줘야 한다. 그러려면 대한민국 전체 혹은 인류전체와 각을 세워야 한다. 인류를 상대하는 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여겨야 한다. 그래야 양심이 물타기 되어 양심에 찔리는 고통이 쾌감으로 변한다. 사건은 일어났다. 이춘재는 큰 사건을 일으켰고 그 사건에 끌려다닌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이 먼저다. 대담한 행동은 큰 사건에서 가능하다. 범죄자는 보통 밤길은 위험한 것이며 연약한 여학생에게 밤길의 위험성을 알려주기 위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식으로 둘러대곤 한다. 인류에게 위험을 경고할 목적이라는 것이다. 즉 작정한 사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일반의 관점 - 평범에서 벗어난 살인사건 범죄자 관점 - 큰 위험성 안에서 작은 경고 히틀러도 유태인과 공산당의 위험을 경고하려면 1억 명쯤 죽여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런 식이다. 인류의 생존이라는 큰 문제 앞에서 1억 명 죽음이라는 작은 희생으로 범위를 좁혔다는 말이다. 이것이 통제가능성 개념이다. 통제되려면 결과는 원인보다 작아야 하므로 큰 사건을 발굴해야 한다. 이춘재라는 작은 몸집의 작은 존재로부터 논리를 전개하면 잘못된다. 큰 사건은 큰 게임에서 벌어진다. 히틀러는 인류의 위험이라는 큰 논리를 개발했다. 큰 인류에서 작은 전쟁으로 통제해 간 것이다. 작은 히틀러에서 큰 전쟁으로 가면 통제되지 않는다. 통제되지 않는 논리는 틀린 것이다. 조국의 전쟁도 그렇다. 국민은 큰 국민이 작은 검찰집단을 통제한다고 믿는다. 반대로 검사들은 큰 엘리트 시스템이 작은 민주당 진영을 통제한다고 여긴다. 즉 사건의 주체가 국민이냐 엘리트 시스템이냐에서 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다. 언제나 큰 것이 작은 것을 통제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
"국민은 큰 국민이 작은 검찰집단을 통제한다고 믿는다. 반대로 검사들은 큰 엘리트 시스템이 작은 민주당 진영을 통제한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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