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의 이해 모든 것의 근본은 변화다. 광대한 지식의 영역을 한마디로 함축하여 표현하라고 하면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단지 변화의 내막을 알아내고 변화의 양상을 통제하려는 것이다. 학문은 변화로 시작하고 변화로 끝난다. 변화로 어떤 불일치가 발생하면 우리는 그것을 되돌려 다시 일치시키려고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변화의 시작과 종결을 알고 방향과 속도를 알고 통제방법을 알아내면 그만이다. 모든 변화는 운동을 통과한다. 운동이야말로 변화를 읽어내는 확실한 단서가 된다. 우주의 근본은 운동이다. 그런데 당최 운동이 뭘까? 왜 이전에 여기에 있던 것이 지금은 저기에 가 있는 것일까? 그런데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힘이 있었다. 힘은 방향을 튼다. 힘이 있기 전에 입자가 있었다. 입자는 위치를 정한다. 위치는 방향전환의 시작점이다. 방향이 있어야 방향을 튼다. 그 방향을 만들어내는 것이 질이다. 질은 사건의 안과 밖을 나누어 계를 정한다. 계 안에서 위치와 방향과 속도가 성립한다. 통제가능성은 어떤 일이 일어났다면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 먼저 갖추어져 있더라는 거다. 결과가 나왔다면 늦고 앞질러 가서 사건의 원인측을 구성하는 조건들에 대응해야 한다. 그것이 통제가능성의 의미다. 우리가 현실에서 목도하는 것은 사건의 결과로 나타나는 량이고, 그 전에 량을 결정하는 것은 운동이며, 그에 앞서 운동을 생성하는 것은 힘이고, 그 이전에 힘을 연출하는 것은 입자고, 최초에 입자를 정하는 것은 질이다. 질의 계와 입자의 위치와 힘의 방향과 운동의 속도로 나타나는 조건들을 해명하고 그 단계에 대응하는 것이 통제가능성이다. 그런데 우리는 막연히 어떤 의도나 목적이나 계획이나 야심이나 욕망 때문에 사건이 일어난다고 믿지만 거짓이다. 그 전제조건들 때문에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조건들이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점이 각별하다. 이미 계와 위치와 방향과 속도가 세팅되었다면 이제 되돌릴 수 없다. 관성의 법칙에 의해 자동항법으로 간다. 즉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이유는 욕망, 야심, 동기, 의도, 음모, 흉계 때문이 아니라 계와 위치와 방향과 속도로 이루어진 시스템의 작용 때문인 것이다. 질의 계, 입자의 위치, 힘의 방향, 운동의 속도가 통제가능성을 정한다. 시스템이 세팅된 것이며 비로소 그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뭐든 할 수 있게 되면 그냥 하는 게 인간이다. 이미 발동이 걸려버렸다는 말이다. 에너지가 작동하는 것이며 에너지의 공간에서는 이성이 아닌 본능에 의해 지배된다. 이미 비용이 지출되고 투자가 집행되고 사건이 무르익어 되돌릴 수가 없다. 미끄러지듯 사건 속에 풍덩 빠져버린다. 이미 풍덩 빠져 있는 사람에게 목적이 뭐야? 의도가 뭐야? 계획이 뭐야? 음모가 뭐야? 흉계를 밝혀! 하고 다그쳐봤자 의미없다. 술꾼에게 왜 술먹냐 하고 물어봤자다. 마약중독자에게 왜 마약을 먹느냐는 질문은 허무하다.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에너지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쇄적으로 움직이므로 누구도 거기서 헤쳐나오지 못한다. 구조론으로 보면 운동은 없다. 여기에 있던 것이 갑자기 저리로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라지고 저기서 발생한다. 모든 운동은 둘의 자리바꿈이다. 그 자리를 바꾸는 것이 힘이고 자리를 만드는 것이 입자고 거기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질이다. 운동은 질과 입자와 힘이 사전에 모두 결정한다. 그렇다면 운동이 하는 일은? 운동이 하는 일은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를 외부와의 관계에 반영하는 것이다. 변화는 이미 일어났고 그것을 드러내어 알려줄 뿐이다. 섭외와 연기와 촬영과 편집은 끝났고 그것을 스크린에 비추어줄 뿐이다. 초보관객은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일로 착각하지만 촬영은 석 달 전에 끝났고 그동안 편집한 것이다. 많은 것이 이전에 결정되어 있다. 우리가 목도하는 움직임은 거시세계에서 관측자에게 보이는 현상이고 양자단계로 들어가면 그런 거 없다. 질과 입자와 힘의 변화가 운동으로 연출된다. 우리는 운동을 목격하지만 실제로는 량을 감지하여 뇌가 운동으로 해석한 것이다. 정말로 운동이 일어났을까? 여기서 저리로 움직여 갔나?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운동은 운동하지 않는다. 차가 가는가? 승객이 가는가? 정확히 말하면 변화는 차와 도로의 관계에서 일어난다. 차는 가지 않으며 승객도 가지 않는다. 승객은 차를 타고 차는 도로를 탄다. 실제로 변하는 것은 차와 도로의 상대적인 관계다. 사람이 간 것이 아니라 기차가 가듯이 기차가 간 것이 아니라 열차와 궤도의 관계인 질이 변한 거다. 그런 의미에서 운동은 운동하지 않으며 질과 입자와 힘의 변화가 운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질의 변화가 진실하다. 입자와 힘과 운동과 량은 그 질의 변화를 환경과의 관계에 반영하는 것이다. 동생이 태어나면 서열이 바뀐다. 막내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형이라는 감투를 쓴다. 그러나 동생의 탄생은 이전에 결정되어 있다. 10개월 전 엄마의 뱃속에서 이미 결정된 것이 뒤늦게 반영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동은 연출되는 것이다. 운동은 외부와의 관계가 변하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힘도 방향을 틀지 않는다. 입자가 틀어진 것이 힘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질의 변화가 입자로 나타난다. 최종적으로 모든 변화는 질 단계에서 완전히 세팅된 것이다. 내부에서의 질적 변화가 반영된 외부와의 관계변화가 입자의 위치, 힘의 방향, 운동의 속도, 량의 칼라다. 어떤 것의 내부가 바뀌면 외부와 관계가 바뀐다. 투표종료 시점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가 개표 막바지에 후보에서 당선자로 신분이 바뀌면서 외부와의 관계가 다 바뀌는 것이 입자의 위치와 힘의 방향과 운동의 속도와 량의 칼라이다. 그러므로 운동은 운동하지 않으며 운동이란 외부환경과의 관계변화다. 날아가는 총알은 전혀 운동하지 않는다. 새는 날개를 퍼덕이고 경주마는 다리를 내딛지만 총알은 가만히 있다. 총알은 날아가는 상태로 정지해 있으며 운동하지 않는다. 사람이 걸어가는 것은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므로 운동이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도 운동일까? 아니다. 운동이 아니므로 지구의 다이어트 효과는 없다. 45억 년 동안 쉬지 않고 태양 주위를 돌았지만 조금도 체중이 줄지 않았다. 다시 통제가능성으로 돌아가자. 에너지는 무조건 정확히 50 대 50으로 간다. 51이 될 이유는 없다. 50이면 상대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51의 힘으로 밀 수 있는 이유는 지구를 받침점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미끄러운 얼음판 위에서라면 자기 체중을 넘는 힘을 가할 수 없다. 상대에게 51을 가하려는 순간 상대가 저쪽으로 움직여 가버려서 실패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물체들은 모양이 제각각이다. 정확히 둥근 모양에 단단하고 무게중심이 잘 잡혀있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중심이 틀어져 있다. 단단하지 않고 물렁하다. 상대가 물방울이라면? 상대가 밀가루 반죽이라면? 상대가 부분적으로 깨져 있다면? 50 대 50을 만들기도 전에 일은 실패로 된다. 빗맞아서 정확하게 50 대 50을 맞출 수 없는 것이다. 에너지는 무조건 정확하게 50 대 50으로 가지만 사물들은 일단 독립해 있지 않다. 다른 것에 빌붙어 있고 무게중심이 틀어져 있고 모양이 괴상망측하고 굳기가 단단하지 않다. 마찰력이 발생해서 힘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당구공을 치면 정확하게 가서 쓰리쿠션이 되겠지만 호박을 치면 엉뚱한 곳으로 굴러간다. 호박이 깨진다. 에너지는 여러 가지로 새 나간다. 그것이 결이다. 결맞음이면 에너지는 최소작용의 원리를 따라 최단거리를 가지만 결이 어긋나면 삑사리가 난다. 마찰열의 형태로 빠져나간다. 깨져서 조각이 떨어져 나가고 미끄러져서 방향이 비뚤어진다. 우리는 운동의 속도와 힘의 방향과 입자의 위치로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하지만 사실은 질에서 이미 결정된 것이 외부환경과의 관계에 따라 단계적으로 집행하는 것이다. 통제가능성은 질에서 결정된 것이 외부환경과의 관계를 단계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다. 성소수자는 태어나면서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캠페인을 벌여 외부환경과의 관계를 바꿀 수 있다. 커밍아웃을 하면 환경이 바뀐다. 입법을 해서 동성결혼을 하게 되면 환경이 변하는 것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내부에서 이미 결정된 것을 외부환경에 반영하여 집행하는 절차이며 우리는 이 과정에 개입해서 적절히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 모든 운동은 궁극적으로 2로 이루어진 양자가 자기를 둘로 쪼개는 것이며 그 외에 없으므로 50 대 50으로 가는 길 외에 없다. 그러나 이는 에너지의 측면이고 실제로는 빌붙어 있고 걸쳐져 있다. 에너지 자신은 50 대 50으로 정확히 가지만 사물의 형태와 굳기와 무게중심과 마찰과 빌붙어 있는 점이 그것을 방해하므로 에너지는 빠져나간다. 그러나 이상적인 물체에 이상적인 환경에서 에너지가 작용하면 정확히 50 대 50의 최단거리에 최소시간으로 코스를 잡는 것이다. 양자단계에서는 정확하게 반영되지만 거시세계에는 이물질의 방해와 형태의 방해로 코스가 비뚤어진다. 무게중심이 안 잡힌 공은 똑바로 던져도 피쉬테일 현상을 일으키며 비뚤게 날아간다. 에너지가 샌다. |
지구는 똑바로 직진하는데 공간이 휘어져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태양주변을 도는 타원궤도로 나타나듯이 에너지는 언제나 50 대 50으로 가지만 현실적으로는 굉장히 많은 외부변수들 때문에 결따라 가는데 결이 어디로 나느냐에 따라서 에너지 손실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이는 거시세계의 일이고 양자단계에서 빛이 진공 속을 갈 때는 그러한 에너지 손실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 하는 혹은 상대방의 에너지 손실을 최대화 하는 디자인을 채택해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지구가 직진하는 것도 아니고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지구는 태양주변 타원궤도 위에 존재하며 지구가 태양을 돌듯이 태양도 미세하게 지구를 도는 것이며 그 에너지장이 존재할 뿐입니다. 에너지의 균일과 불균일에 따른 방향성이 존재할 뿐이며 빛이 진행하거나 지구가 돌거나 우주가 팽창하거나 다 그 에너지장의 균일과 불균일이 결정합니다. 일정한 조건에서 균일화 되면 방향성이 만들어져서 연쇄적으로 수렴됩니다.
이치는 에너지의 불균일이 내부적으로 균일을 도출하는 결 하나 뿐이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량은 운동이라는 토대 안에서 균일하고, 운동은 힘이라는 토대 안에서 균일하고, 힘은 입자라는 토대 안에서 균일하고, 입자는 질이라는 토대 안에서 균일하다는 식으로요. 관측자가 태양과 지구와 자신을 거리라는 잣대로 평가할 수 있었던 건 이미 그 이전에 셋이 운동이라는 토대 안에 엮여있다는 걸 사유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 지구가 태양 주위를 운동하네'라는 건 표현력의 부족일 뿐, 운동이라는 표현을 할 수 있었다는 건 이미 변화된 거리끼리 공유하는 토대를 눈치챈 것이며 그로부터 사유가 진행된거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 지구와 태양의 사이는 에너지의 불균일로부터 필연적인 방향성을 자아내는 일정한 조건을 충족한 각별한 관계의 연출이구나.' 라고 해야겠군요.
그렇습니다.
에너지가 수렴방향일 때 외력이 작용하면
계는 균일해지면서 축을 도출하고 축이 대칭을 작동시켜
축의 이동을 유발하는데 여기서 불균일을 유발하는 외력이 축의 이동에 숨게 됩니다.
즉 50 대 50으로 계가 균일해지지만 동시에 불균일을 일으키는 여력이 계속 작용하므로
계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내려가면서
계속 균일>불균일>균일>을 반복하다가 최종적으로 에너지를 외부로 배출합니다.
불균일한채로 따로 놀다가 힘이 작용하면 근육이 수축되면서 순간적으로 균일해지는 거지요.
즉 균일해진다는 것은 운동에 따른 상대적인 균일이며 불균일을 야기하는 불안요소를 하부구조로 떠넘긴 것입니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면 상체와 하체의 균일, 어깨와 팔의 균일,
상완과 하완의 균일, 손목과 손의 균일로 계속 내려갑니다.
최종적으로 에너지 일부가 공으로 침투하여 계에서 이탈하여 빠져나가면서 안정됩니다.
불균일한 전체는 자체 내부에서 부분적으로 안정된 균일분을 추려낸다. 스스로를 마이너스해서 작아진 전체는 여전히 불균일하니 이후에도 역시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간다. 이런 방식으로 불균일은 점차 내부적으로 진행한다. 50대 50으로 균일하게 나뉠 때 에너지가 쏠린 쪽에서부터 또다시 처음 100보다 더 작은 50 규모의 불균일이 촉발된다.
에너지를 밖으로 배출하는 식으로 처리하며 전체로부터 떨어져나온 계 50은 균일하며 안정된 상태이다. 관측자의 입장에선 에너지가 처리된 루트는 투수의 몸전체에서 공까지 내부로 진행한다. 공이 투수의 손끝을 떠났을 때, 여전히 날아가는 공에 실린 에너지 입장에서는 마이너스 시킨 것이 바로 투수의 신체이다.
" 최종적으로 모든 변화는 질 단계에서 완전히 세팅된 것이다."
이 글은 운동의 변화량을 표현하는 미분이 생각나게 하는 데, 미분에 있는 리미트는 사실 무한하게 줄어드는 양이 아닙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그냥 방향인데 수학자들이 그 말을 못해서 어렵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리미트를 써놓고 계산할 때는 어차피 없애거든요. 사실 방향과 양은 계층이 다른 표현인데, 양(하위)으로 방향(상위)을 표현하다보니 나온 개념이 무한소인 거죠.
50대50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51대49가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무한하게 한쪽 방향으로 쏠리는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둘 사이에 방향은 곧 서열입니다. 서열이 있으려면 그 이전에 기준이 있어야 하고요. 기준은 한단계 상위의 개념을 말합니다. 즉 변화하는 어떤 하나는 둘로 표현되며, 그 둘은 변화의 바깥에 변화의 중심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변화의 바깥을 함께 쳐다보면 라그랑주 역학이고, 바깥이 있다고 치고 고정시킨 후에 내부만 쳐다보면 뉴턴역학입니다.
그러므로 라그랑주의 중핵은 '계'인데, 이것은 어떤 것의 운동을 표현함에 있어 운동의 기준을 그것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계와 계 사이에 관계로서 운동이 있다는 걸로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분은 뉴턴역학적 개념이라 운동의 대상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거고, 라그랑주라면 무한소를 다르게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렇게는 안 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것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상위와 하위의 관계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뉴턴에서 라그랑주 역학으로의 발전은 곧 언어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논의 역설'이나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관측자의 위치를 대상에 고정시키는 즉, 관측자가 버스에 타고 있으면, 당연히 운동은 없고, 대신 관측자를 외부에 두어야 버스의 운동이 성립하는데, 이걸로 말장난 하는게 역설입니다. 하여간 2000년도 더 전의 그리스 아재들이 비슷한 논쟁을 많이 한 걸 생각하면 신기할 따름.
참고로 라그랑주는 스칼라를 쓰고 뉴턴은 벡터를 쓰는데, 스칼라는 단순히 방향이 없는 순수한 값이 아닙니다. 반드시 "단위" 즉 계가 있습니다. 가령 미터나 제곱미터 세제곱미터 킬로미터 하는게 다 스칼라죠. 물론 라그랑주는 계만 지정하고 대칭이 불분명해서 좀 아쉽습니다. 물론 이건 라그랑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좌표를 기반하는 데카르트와 고차함수가 정의된 방식의 오래된 문제이기 때문이라 한계가 있습니다.
또한 뉴턴역학에서는 이런 말도 사용합니다. "운동량의 시간 미분은 힘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뉴턴역학에서 시간은 뭘 의미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간은 보통 한 차원 위를 아래 차원에서 바라보고 붙인 이름입니다. 가령 2차원에서 3차원을 바라보고 이를 시간이라고 이름 붙이는 겁니다. 이런 개념으로 운동과 힘을 시간의 개념으로 해석하면 저렇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http://www.astronomer.rocks/news/articleView.html?idxno=82660
(100)짜리 전체가 내부적으로 (50+50)을 도출하는식으로 진행되는게 가장 효율적이지만, 실제로는 첫타로 50을 도출하지 못하면 차선으로 49하고 비벼본다 => (49+49)
이때 나머지 열발생과 같은 자투리도 (1+1) 식으로 자체 내부적으로 사건이 진행된다. 다만 (49+49)와 (1+1)은 서로 공유하는 토대가 달라진 바, 링크가 끊어졌으므로 이후엔 서로에 입장에선 써먹을 길이 없다. 엔트로피.
또는 더 비효율적일 땐 (30+30)와 (15+15)와 (5+5) 이런 식으로 갈가리 찢겨서 외부의 입장에선 통제가능성이 옆구리로 세버리는 수가 다반사겠네요.
쪼개진 계들이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효율적인 대칭 구조를 이루며 각자도생을 하며, 다만 외부 관측자 입장은 처음 100을 최대한 길게 써먹고 싶어하는 시선이다.
따라서 원본되는 통짜 자체에 대하여 최대한 추가 손실이 적게끔 반반으로 도출할 수 있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효율적인 방식인지를 평가할 수 있을런지요?
(50+50) => (49+49)+(1+1) => (48+48)+(1+1) ••• 생존 경쟁력이 높다.
(50+50) => (40+40)+(10+10) => (30+30)+(10+10) ••• 생존 경쟁력이 낮다.
여기서 (1+1)이나 (10+10)는 매 사이클마다 본래 의도에서 벗어난 이른바 곁가지를 나타낸다. 요런 식이 연상되었습니다.
질의 내부는 입자이고 입자의 내부는 힘이고 힘의 내부는 운동이고 운동의 내부는 량이다. 질의 입장에서는 입자를 변화라고 느끼지 못한다. 반대로 운동의 입장에서는 힘을 변화라고 느낀다.
즉 하부구조에서 상부구조를 추적할 때,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볼 때, 부분에서 전체를 유추할 때가 변화를 느끼는 때이다. 따라서 버스가 나를 지나쳐서 주행한다기보단 뚜벅이인 내가 현재 인도에 묶여있다고 말하는 게 더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