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언어의 실패다. 천재들이 국어공부를 못해서 말을 똑바로 하지 않고 얼버무리니 오해가 쌓인다. 일단 코펜하겐 해석은 해석이 아니라 해석유보다. 닥치고 계산이나 하라는 말이다. "Shut up and Calculate" 다중세계 해석이나 앙상블 해석은 모형을 만들려는 도전이다. 이것이 과연 세계의 초천재들이 백 년씩이나 논쟁할 일인가? 거시세계에도 형태가 없는 것은 많다. 사랑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사랑은 둘의 관계이다. 하나는 볼 수 있고 둘도 볼 수 있는데 둘의 관계는 보지 못한다. 남한과 북한은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증상이 드러나면 뭔가 있구나 하고 추정하는 것이다. 휴전선에서 총성이 울리면 둘 사이에 깊은 갈등이 잠복해 있었구나 하고 알아채는 식이다. 현재의 한일관계도 그러하다. ‘쟤들 갑자기 왜 저래? 그동안 뭔가 쌓인 게 있었구만.’ 개인청구권은 아베가 제 입으로 말한 것이다. 위안부 문제도 아사히가 한동안 논의한 거다. 후쿠시마 직격탄을 맞고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관계는 변한다. 그리고 한참 후에 알게 된다. 관계는 쌍방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조론으로 보면 존재는 원래 관계다. 존재 사이에 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 관계 그 자체가 존재다. 둘의 관계로 존재하는 것은 원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확정할 수 없다. 관계는 사건의 원인과 결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운동량이 원인이라면 위치는 그 결과다. 원인에는 결과가 없고 결과에는 원인이 없다. 빛은 진행하는 공간과의 상대적인 관계로 존재하므로 당연히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가질 수 없다. 빛의 위치는 공간과의 관계가 정하지 빛 자신이 정하지 않는다. 광속은 진공 속에서 일정할 뿐 매질에 따라 속도가 달라진다. 빛은 빛 자신에 없고 공간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빛이 빛 자신에 있다면 한 곳에 정지해 있을 것이다. 빛은 정지할 수 없다. 공간이 빛을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불완전성의 원리도 불확정성의 원리도 근본은 같다. 사건의 일부는 언제라도 닫힌계의 바깥에 있다. 엔트로피 때문이다. 사건이 진행하면 조금이라도 빠져나간다. 마찬가지로 사건이 촉발되려면 조금이라도 밖에서 들어와야 한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으로 사건은 시작되고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되며 사건은 닫힌계 안에서 완전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새 나간다. 물론 완전성은 존재한다. 둘이 나란히 간다면 손실은 없다. 사건은 무조건 손실을 일으키지만 나란히 함께 가는 둘 사이에는 손실이 없다. 예컨대 이런 거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사건을 일으켰다. 무조건 손해를 본다. 갑돌이도 손해보고 갑순이도 손해본다. 커플이 되든 결혼을 하든 연애를 하든 무조건 둘은 조금이라도 손해를 본다. 그럼 왜 사귀는가? 이익은 다른 곳에서 본다. 커플은 솔로보다 평판이 높아지고 잘하면 세금도 절약하고 방세도 절감할 수 있다. 사건의 일부는 닫힌계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불완전성의 정리라면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불확정성의 원리다. 사건이 아닌 사물로 바라보므로 헷갈리는 것이다. 양자역학 개념이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은 사물로 바라보고 있다는 말이다. 사건으로 보면 당연히 그렇다. 위치와 운동량 사이에는 분명히 시간차가 있다. 고속도로 유령정체의 유령을 찾는 것과 같다. 유령은 어디에 있을까? 유령은 분명히 그곳에 있다. 그러나 여기 혹은 저기라고 딱 찍어서 말할 수 없다. 다세계 해석은 일단 틀렸고 앙상블 해석은 소극적이다. 신이 주사위를 던지지 않아도 거기서 유령은 찾을 수 없다. 코펜하겐 해석은 해석이 아니다. 사건을 받아들이는 데서 진실은 시작된다. 코펜하겐 해석 - 유령은 모든 곳에 존재하지만 교통방송 아나운서가 결정한다. 다세계 해석 - 자동차 숫자만큼 교통방송이 있지만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들린다. 앙상블 해석 - 자동차가 너무 많아서 모를 뿐 잘 살펴보면 언젠가 알 수 있다. 구조론의 정답 - 유령은 도로와 자동차의 관계가 만든다. 학자들은 빛에 주목할 뿐 공간의 성질에는 관심이 없다. 숨은 변수는 공간에 있다. 우리는 공간의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뿐 아니라 모른다는 사실 자체도 모른다. 어떤 존재의 성질은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외재한다. 빛에서 빛을 찾으므로 빛을 찾지 못한다. |
"어떤 존재의 성질은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부분 외재한다."
전자기장을 양자화하면 곧 빛입니다.
입자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도 입자요, 공간도 입자요, 에너지도 입자입니다.
입자는 불연속입니다.
E = nhν
플랑크의 에너지-주파수 관계식에서
n은 양의 정수이며, 에너지는 1,2,3,4... 씩으로
정수배로만 증가합니다.
불연속(양자)은 불확정성으로 연결됩니다.
양자의 특징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초당 수백억번 요동칩니다. 그걸 양자요동이라고 하며
그 양자요동 과정에서 입자가 탄생합니다.
하이젠버그의 에너지-시간의 불확정성 원리에서
말하는바는 관계가 곧 존재라는 겁니다.
ΔtΔE≥h/2π 라는 부등식에서
Δt와 ΔE의 관계에 의해 우주가 생겨납니다.
한 값의 불확실성을 0에 가깝게 줄이면
다른 값의 불확실성이 거의 무한대로 발산합니다.
Δt가 작으면 작을수록 ΔE 에너지(eV)가 커지며
ΔE에서 입자가 튀어나온다는 말입니다.
단 여기서 Δt와 ΔE를 곱한 값의 크기는
플랑크 상수 h에 의해 제한됩니다.
고로 우주는 유한합니다.
양자역학의 의미는 무한은 없다는 것입니다.
미니멈이든 맥시멈이든 우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