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구조론에서 몬티홀 딜레마를 다룬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세월이 좀 지났으니 다시 한 번 더 다뤄보죠. 최근 구조론에서 주로 다루는 계의 개념과 닿아있습니다.
https://namu.wiki/w/%EB%AA%AC%ED%8B%B0%20%ED%99%80%20%EB%AC%B8%EC%A0%9C
당신이 한 게임 쇼에 참여하여 세 문들 중 하나를 고를 기회를 가졌다고 생각해봐라. 한 문 뒤에는 자동차가 있으며, 다른 두 문 뒤에는 염소가 있다. 당신은 1번 문을 고르고,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회자는 염소가 있는 3번 문을 연다. 그는 당신에게 "2번 문을 고르고 싶습니까?"라고 묻는다. 당신의 선택을 바꾸는 것은 이득이 되는가?(나무위키)
사실 너무 단순해서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이건 무조건 선택을 바꾸는 게 유리합니다. 왜냐하면 확률에서 모집단의 크기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곧 계가 바뀐 거죠. 처음에 당신이 한 선택은 1/3 짜리 값을 가진 선택입니다. 3개 중에 하나를 골랐으니깐.
그러다가 사회자가 하나의 문을 열어 선택지를 제거했으므로 이제 선택을 새로 하는 게 유리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확률은 1/2이잖아요. 즉 모수(계)의 크기가 3 -> 2로 바뀐 겁니다. 당연히 1/3 보다는 1/2이 유리하죠. 근데 사람들은 이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이 대상을 바라볼 때 그것의 바탕에 깔린 기준을 쉽게 바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제를 잘 못 바꾸는 거에요. 사실 사람은 대상을 중심으로 사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말이 안 되거든요. 그 어떤 사람이라도 전제를 바탕하고 그리고 대상을 사고합니다. 다만 전제가 바뀌는 걸 잘 적응하지 못합니다.
물론 이를 표현함에 있어 '입자 중심의 사고'라고 할 수는 있겠죠. 이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에서도 1은 변하지 않았거든요. 다만 분모가 3에서 2로 바뀌었죠. 즉 1/3 -> 1/2입니다. 앞의 1은 뒤의 1과 다릅니다. 같아 보인다면 눈을 의심하세요. 근데 당신은 이 둘을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눈을 뜨고도 3 -> 2를 못 보는 겁니다.
인간은 무조건 전제>진술의 사고를 합니다. 다만 그 전제는 생략되어 있고, 생략한다는 행위 자체가 "고정"된다는 말이 됩니다. 고정했으니깐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죠. 생각하지 않으므로 그게 있었는 지도 모르고, 당연히 바꿀 생각도 안 합니다. 평소에 전제를 고정시킨채 인지도 못하고 진술만 써먹다가, 어느날 전제가 바뀌면 이 진술이 그 진술이 아님을 느끼고 당황하는 게 인간입니다.
보통은 남자애들이 눈치가 없는게 전제 바뀜을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친구 부모님이 더 놀다 가라고 해서, 냉큼 자고 갔다가 다시는 그 집에 못 간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눈치가 없었던 거죠. 몇 번 거절하고 밀땅하면서 상대의 진의(전제)를 파악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하여간 이러한 '계 바뀜'을 다루는 수학이 '베이즈추론'입니다. 새로운 정보(증거)를 획득함에 따라서 계를 업데이트 하는 개념이죠. 베이즈추론을 보통 '주관적 확률'이라고 하는 이유는 사전(事前)에 가정한 확률이 개인마다 다른 것을 표현한 겁니다. 고정된 1차원 확률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2차원 관점입니다. 반대로 빈도주의는 누구에게도 같은 확률인 객관적인 확률을 다룹니다. 근데 이게 관점이 없는게 아니라 관점 고정이죠. 1차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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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어떤 것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계를 선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게 훼이크죠. 언어의 문제인 겁니다. 언어 훼이크는 대개 전제 바꿔치기거든요.
반대로 사회자가 계(분모)를 선택하는 문제라고 설명했다면, 사람들은 쉽게 이해했을 거라고 봅니다.
납득이 안 되는 말씀인데 상식적으로 셋이서 고스톱을 친다고 해도
내가 이길 확률이 1/3일때 나머지 둘 중에 한 명이 피껍데기 하나 못 가져 갔다면
내 패는 내가 들고 있으니 알고 있고 나머지 한 사람이
그 피껍데기 하나 못 먹은 사람의 것을 죄다 가져갔다고 보고
초조해져서 집중 견제하는게 상식이지 내 패를 내가 알고 있는데
나머지 한 명이 기권했다고 내가 이길 확률이 올라갔다고 착각할까요?
내 확률은 고정되어 있고 나머지 사이에서 변동이 일어났으니까
하나가 꽝 되면 그 이익을 다른 넘이 먹었다고 보는게 상식이지요.
민주당과 자한당 바미당이 경쟁하고 있는데 바미당이 망했다고 하면
자한당이 이득보겠구나 하고 생각하는게 맞지 민주당도 이득을 본다고 여길까요?
앗, 사회자가 플레이어의 첫 의사결정에 종속되는 만큼에 해당하는 통제가능성을 플레이어가 제대로 써먹으려면 '사회자 결정+기존선택을 바꾸는 결정' 즉 2번의 기회를 써먹는 결정을 내려야겠네요.
제가 첫 댓글에서 틀리게 말한대로 되려면, 사회자는 플레이어가 처음 결정한 문을 열어서 내용물을 보여준 다음에 꽝이면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식이어야 하구요.
다르게 말하면, 사회자는 전체에서 꽝이라는 리스크를 마이너스 시킬 수만 있으므로 내 편이라 할 수 있겠네요. 내 정보꾼이 정보를 주었는데도 그 정보를 제대로 써먹지 않는 건 명백히 손해겠구요.
사회자 문과 플레이어 문을 합쳐서 세개 중 총 2개의 문이 열리는 게임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게임이 첨부터 플레이어에게 2번의 기회를 준다고 가정하는 경우는 (첨부터 맞추는 확률)1/3 + (첨에 틀리고)2/3 * (두번째 맞출 확률)1/2 =1/3 +1/3 = 총 2/3 확률.
원래 게임대로 사회자의 오픈에 연동되어 기존 결정을 바꾸는 것은 기존의 (첨부터 맞추는 확률)1/3 확률에다가, 사회자의 오픈을 2번의 기회 중 첨에 틀리는 경우라고 볼 수 있으므로 위의 (첨에 틀리고)2/3 * (두번째 맞출 확률)1/2=1/3 을 더하는 행위이므로 애초 2번의 기회를 부여받는 것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므로 승률이 2/3 가 되는 것이군요.
즉, 사회자에게 반응하여 결정을 바꾸더라도 그 바꾼 결정은 이미 첫 1/3 승률을 먹고들어간 상태에서 첫번째 틀리고 두번째 기회를 사용하는 승률까지 더해야겠습니다.
사실 자동차는 2번문에 있었고 플레이어가 처음에 1번을 선택한 경우에 사회자가 3번을 보여주고나서 플레이어가 2번으로 결정을 바꾸더라도, 그 사건은 첨부터 플레이어에게 두번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한 번에 맞춘 경우를 포함한다는 거죠. 수학에서 말하는 사건과 구조적 동질성이므로 구조론의 그것과는 뜻이 다를 수 있겠습니다.
쓰고 나서 본 게시글에 링크된 나무위키를 보니 거기에도 기타 설명란에 이런 식으로 써놨네요.
오류를 저질렀던 수학자들이 결정을 바꾸지 않아도 여전히 1/3 확률이라 말했었다는데, 그 말대로라면 무조건 바꿔야 하겠지요. 남은 건 두가지 문인데 하나가 1/3이라면 당첨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니니 나머지가 무조건 2/3일 테니까요. 1/2이라면 그냥 가던대로 가면 되는데 동전 던지자고 했던 저도 틀렸었구요.
나무위키 작성자가 뭘 알겠습니까.
기껏해야 공대생인데.
셈을 하지 마시고, 언어의 전제가 바뀌었음을 보셔야 합니다.
본문에서 자꾸 1/2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래봤자 챠우님도 처음 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셨던 겁니다. 언어의 전제가 바뀌었음을 제대로 보셨다면 동렬님처럼 2/3라는 결론이 나와야죠. 실제 컴퓨터로 횟수를 크게 해서 실험한 결과도 매번 결정을 바꾸지 않은 승률 1/3과 결정을 바꿔온 승률 2/3로 나뉘지 않았습니까.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뜯어 나열해 분석한 결과도 그렇구요.
기존 결정을 바꿈으로서 승률이 1/3에서 1/2로 도약하는 것이 아니라 2/3로 도약하는 것입니다. 사회자 입장에서도 제시할 두 개의 염소 문 중 하나를 고르는 데에 따르는 제약이 따른다는 걸 플레이어가 간파함으로서, 본인이 맞대응 할 수 있다면 사회자는 내 편인 것이지요. 사회자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구요. 수학과 언어를 너무 분리하시려 한다면 곤란합니다.
1/2과 2/3 둘 다 맞습니다.
1/2는 모집단(계)이 작아짐을 말하는 것이고(분모가 작아짐),
2/3은 경우의 수(선택)가 커짐을 말하는 거죠(분자가 커짐).
근데 제 글의 주제는 모집단 변화잖아요.
제목에 계라고 써놨구만.
글을 잘 읽으셨는지 의문스러운데 그 모집단을 구조론이 말하는 사건의 '계'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오류라는 뜻입니다. 구조론의 '계'는 집합과는 다르니까요. 이 사건은 승률을 높이는 방향 즉 계 내부로 수렴한다고 표현할 수는 있겠으나, 단순 모집단의 변화를 설명하는 예시로는 애초에 적절한 사건이 아니지요.
계는 질의 관점, 모집단은 입자의 관점
제목은 질의 관점, 본문은 입자의 관점
예시인 몬티홀 딜레마는 질의 관점, 그 설명은 입자의 관점
2/3는 질의 관점, 1/3이나 1/2은 입자의 관점
1/3과 1/3 둘을 비교하니 1/2이 나온거죠.
1/2이니 선택을 바꿔도 안바꿔도 그만, 2/3이니 선택을 바꾸는 것이 무조건 합리적.
어차피 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실 컨셉이라 뭔 말씀을 드려도 통하지 않을 겁니다. 뭐 구조론에서 현강님만 그런 건 아니니깐 새삼스럽진 않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현강님의 게임과 저의 게임은 계가 다릅니다. 제가 어떤 식으로든 현강님을 돕고자 해도 도울 수가 없는 거에요.
부디 우리의 게임이 김동렬의 관심을 목적하는 게 아니라, 반진리에 맞서는 진리를 목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김동렬을 두고 링 위에서 경쟁하는 게 아니라, 진리의 판에서 무식에 맞선 팀원이 되어 협력할 수 있습니다.
남의 생각에 맞서려고 할 수록 진리는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대신 그걸 품어보려고 해보시죠. 그래야 지금 우리의 대화가 보일 겁니다.
http://gujoron.com/xe/369417#comment_369764
이걸 보면 사람들이 머리가 나쁘다 하는걸 알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과연 실제로 이런 게임을 만들어놓고 무작위로 뽑은 사람들을 상대로
테스트를 하면 확률이 1/2라고 판단할지 실험해봐야 하겠습니다만
사람들이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텐데.
왠지 실제상황이라면 본능적으로 바꿀 것 같지 않습니까?
일단 자기가 선택한게 1/3인데 나머지 둘이 2/3로 그 남의 떡이 커보이잖아요.
남의 떡이 탐나는 것이 당연한데 선택을 바꾸지 않고 고집을 피운다?
뭔가 게임이 바뀌었는데 대응을 해야지 가만 있으면 바보같잖아요.
수학자들이 속아넘어가는 것은 너무 숫자만 상대해서 현실감각이 사라진 거.
갓난아이들을 상대로 테스트를 해도 바꾸는 사람이 훨씬 많을걸요.
비둘기를 상대로 테스트를 해도 비둘기가 선택을 바꿨다는데.
제 생각엔 길 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테스트를 하면 대부분 바꿀 것 같다는 느낌.
1. 솔직히 과거의 무식한 저였다면,
1) 일단 상황 판단을 못한다. 즉 이게 뭔 상황인지를 인지하지 못한다. 뒤에서 자동차를 옮기는 트릭을 썼을지, 사회자의 말이 페이크일지 판단할 수가 없다. 왠지 내가 정답을 맞추었기 때문에 사회자가 내 선택을 바꾸는 것을 유도하는 것 같다.
2) 사회자를 어떻게 믿어?
> 사회자가 사기치는 것 같다고 느껴서 안 바꿀 것 같네요.
2. 즉, 사회자를 내편으로 여기냐 아니냐에 따라서 선택이 갈린다고 봅니다.
1) 사회자를 믿는 순진한 사람이라면 선택을 바꿀 것이며,
그러므로 아무나 잘 믿는 아기는 사회자의 말을 바꾸라는 신호로 받아들이지만,
2)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선택을 바꾸지 않죠.
발랑까진 청소년은 어른이 사기치려는 줄 알잖아요.
3) 하지만 그럼에도 사회자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재산이 많은 만수르입니다.
믿는다기 보다는 어떻게 하나 보는 거죠. 슈퍼카 그까이꺼 얼마한다고.
3. 모든 게임의 승자는 어떤 식으로든 부자인 사람이라고 봅니다. 돈이건, 마음이건, 실력이건.
물론 아예 순진한 사람도 어른 말 듣고 이기긴 하죠. 물론 머리 좀 굵어지면 탈탈 털리겠지만.
반면 트럼프아베는 마음이 거지라서 게임에 질 테고.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서
출제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고 오판할 수 있습니다.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은
이게 우리가 일상에서 무수히 경험하는 일인데
왜 정답을 알려줘도 딴지 거는 수학자가 있는가 하는 거지요.
순간적인 오판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중요한건 우리가 맞고를 치지 셋이서 안 하잖아요.
셋이서 인터넷게임으로 고스톱을 치면
나머지 두 명이 짜고 속일게 백퍼센트 아니에요?
실제 도박판에 무수히 짜고 칩니다.
시계방향으로 베팅을 한다고 치면
3시 방향에 있는 사람이 죽을 쑤고 있다면 그 이득은
백퍼센트 4시방향에 앉은 사람이 가져갈 것이고
따라서 처음 자리선정할 때부터 옆에 붙어 앉은 놈들이
짬짜미를 할 거라는 사실을 우리가 쇼트트랙을 보지 않아도 훤하게 알잖아요.
이건 뭐 현실에 골백번도 더 경험하는 익숙한 일인데
우리가 일상에서 늘 저 새끼들 둘이 짜고 날 왕따시키는거 아냐 하고 경계하는데
누가 죽었다면 그 이득은 백퍼센트 다른 사람이 가져가는 거.
영감이 죽어도 아들이 이득을 보고
남편이 죽어도 마누라가 이득을 보고
마누라가 죽어도 남편이 화장실에서 세 번 웃고
이건 뭐 초딩도 아는 상식 아닌가요?
먼저 나와 타자로 선을 가르고 내 확률이 1/3인데
나머지 둘 중에서 변동이 나왔다면 무조건 한 넘이 다 먹은 거지요.
왜 익숙한 고스톱판이 떠오르지 않느냐지요.
이건 뭐 수학까지 갈 이유가 없는 무수한 현실의 경험칙입니다.
선택을 바꾼다 게 꼭 이미 결정은 했지만 열어보지 않은 1번 문을 팽하고 2번 문을 결정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2013년 구조론연구소 자유게시판의 '당신에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바꾸시겠습니까?' 글을 찾아서 읽어봤는데요. 동렬님이 댓글로 쓰신 유리함을 챙겨먹는 절차를 시행하는 방법은 바뀐 상황에서 1,2번 문 중 동전던지기를 해서 다시 결정하는 식으로 진행해도 되지 않나요?
문제를 바꿔서 만약 3개 문 중 차례로 두 번 문을 열어봤을 때 있는 물건들을 가지는 룰이라고 칩시다. 이번엔 사회자가 개입하지 않고 플레이어 본인이 직접 3번 문을 열어서 염소 꽝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1번과 2번 문 중 선택해야 하겠는데요. 현실 세계에 적용해 보자면 보수는 호르몬이 떨어져 본인에게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더 있음에도 귀찮아서 3번 문의 염소를 들쳐메고 집에 가거나, 눈이 장식이라서 두번째 기회에서도 3번문을 닫았다가 또 다시 열며 기회를 날리는 식이라는 거죠.
아니면 세개의 문이 각각 자동차, 염소, 꽝인데 처음에 염소 문을 열게 되자 주최측이랑 염소를 다시 충전하기로 합의봐서 두번째 기회에서도 처음 알게 된 염소가 있는 문을 고르는 겁니다. 보수는 주구장창 염소에만 만족하는 거죠. 현실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기회는 계속해서 주어지므로 꽝과 염소라는 시행착오만 겪으면 그 다음엔 무조건 자동차를 얻을 수 있는데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