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공간에 어떤 둘이 있다면 만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둘은 크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은 점입니다. 우리는 흔히 만난다고 말하지만 원자 단위로 크기의 단위를 줄이면 모든 사물은 만나지 않습니다. 전자기력에 의해 서로를 밀어내기만 할 뿐입니다. 우리는 단추만한 자석의 크기가 눈에 보이는 크기라고 생각하지만, 전자기력을 기준하여 크기를 정의하면 자석은 자력의 크기입니다. 단추만한 자석이라도 실제로 호박 크기라 말할 수 있는 거죠. 물론 이는 다른 자석과 함께 비교할 때만 성립합니다. 서로 밀어내는 상황에서만 크기를 정의하는 거죠. 이 논리로 극을 돌려 둘이 붙는 상황이면 크기를 정의할 수 없습니다.
가령 어떤 둘이 가까워진다고 칩시다. 우주 공간에서 둘만으로 둘이 가까워지는지 정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둘이 가까워지는지 정의하려면 가까워지지 않는 다른 둘과 비교해야 합니다. 이는 제논이 말하는 다른 역설인 "사람은 결승점을 통과할 수 없다"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과 결승점 둘만으로 둘의 만남을 정의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만나지 않은 어떤 둘을 전제하여 사람의 결승점 통과를 정의합니다. 물론 당신은 이러한 판단과정을 의식할 수 없습니다. 무의식에서 전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역설은 "사람은 결승점을 통과할 수 없다"를 확장한 겁니다. 결승점을 거북이라고 치면 두 역설은 동일합니다. 제논이 까려고 했던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합니다. 뜨거운 것은 차가운 것이 있기 때문에 정의할 수 있다고. 인간은 뜨거움과 차가움의 두 가지를 온도(열)라고 정의하여 사용하는 겁니다. 둘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열이라는 것은 열이 아닌 다른 것과 비교된 겁니다. 제논이 헤라클레이토스를 깔 수 있는 건 절대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상대성을 보았다면 제논은 상대성의 상대성인 절대성을 본 겁니다. 그러니깐 움직이는 것을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거죠.
당신은 어떤 음식이 맛있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맛없는 음식을 먹어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둘을 당신 자신을 기준으로 정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과 나의 취향이 다른 겁니다. 평생 먹어본 게 다르잖아요. 이는 최대공약수의 개념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두 수가 있을 때, 둘을 통일하는 수를 구하는 게 최대공약수입니다. 일단 공약수를 구하고 나면 그 수가 어떤 크기를 가졌건 1이라고 칩니다. 그러면 원래 두 수의 비율이 구해지는 거죠. 여기서 공약수가 기준이 됩니다. 근데 "최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1이라고 친 그 수는 사실 다른 어떤 수와 비교된 겁니다. 그러니깐 1이라고 치는 거죠.
그리고 최대공약수 개념은 재귀함수로 이어지고 재귀함수는 트리로 이어지며 트리구조는 곧 컴퓨터의 아키텍쳐로 만들어지는데, 컴퓨터 아키텍쳐는 주체(프로그램)와 객체(데이터)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계산이 끝날 수 없고 그러므로 외부에 정지규칙을 두자는 게 튜링머신입니다. 그리고 폰노이만은 제자튜링을 응용하여 게임이론을 만들고 하는식이죠. 게임이론에도 심판이 있지만 문제는 플레이어를 기준하여 심판을 보려는 관점입니다. 그러니깐 미니맥스 같은게 나오는 거죠. 여전히 무한의 수렁에서 나오질 못합니다.
중요한 건 방향입니다. 연역이냐 귀납이냐. 태양과 지구 중에서 무엇을 기준하여 대상을 판단할 것이냐입니다. 어떤 것을 기준하여 대상을 바라보냐는 것을 정의하는 논리는 베이즈 추론에서도 나타납니다. 베이즈추론의 중핵은 모집단의 크기를 뭘로 정하냐입니다. 어떤 (각각 모집단을 가지는) 두 대상을 전제하는 (전)모집단의 크기를 일치시켜 각각의 확률을 통합 혹은 정규화(normalization)합니다. 몬티홀 문제가 베이즈추론을 푸는 문제죠. 인간이 원래 이런 거에 약합니다. 헷갈려 죽죠. 결국 그 둘은 만날 수 없습니다. 근데 만납니다. 만났다고 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