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포석정은 유상곡수시설로 볼 수 없다.

"포석정 곡수거시설의 폭은 약 35Cm, 깊이는 평균 26cm, 전체길이는 약 10m이다. 근래 실험으로 물을 흐르게 한 뒤 두개의 잔에 2/3정도 술을 담아 띄워 본 결과 작은 잔은 10분 30초,큰 잔은 8분이 걸려서 수로를 흘렀다. 이 정도면 시 한 수를 지어 읊을만한 시간이 된다."

과연 그럴까? 10분이나 8분의 시간이라면 시 한 수를 읊을 시간이 되는가? 천만에! 시회를 연다면 적어도 10여명이 참석해야 한다. 10분을 10명이 나누면 한 사람당 1분이다. 1분은 시 한 수를 읊을만한 시간이 못된다.

물론 더 적은 숫자의 인원이 참여하는 시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3명은 있어야 시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심부름을 하는 하인들이 따라붙는다.

전체 둘레 10미터에서 잔을 띄우고 회수하는 부분을 빼면 약 8미터, 이 8미터 안에 둘러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최대 5명 내외, 한 사람에게 배당된 거리는 최대 2미터, 2미터를 통과하는 시간은 길게 잡아야 2분 안밖이다.

거동할 때는 항상 하인의 부축을 받았고, 문밖을 나설때는 항상 시녀의 일산을 받았던 옛날 왕족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았다고는 볼수 없다.

포석정에서 시회를 연다면, 상놈들처럼 옹기종기 모여앉이 않는 이상, 다섯명 이상이 앉을 수 없다. 술잔이 돌아나오는데 한 사람당 2분 이상의 시간이 주어질 수 없다. 더구나 유속은 일정하지 않다.

곡선코스에서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잔이 회전하며 제자리에 머무르게 된다. 직선코스에서는 빠르게 다가온다. 다섯명이 둘러앉았을 때 직선코스에 앉은 사람에게 배당된 시간은 짧으면 10초, 길면 30초 정도로 볼 수 있다.

10초나 30초 만에 시 한수를 읊어서는 그것이 시회가 되지 않는다. 치명적인 것은 이렇게 좁은 장소에 오밀조밀 앉아서는 흥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나라의 예를 참고할 때 유상곡수의 시회는 보통 40명 이상이 참여한다.

많게는 200여명의 사람들이 폭 1미터 이상의 큰 냇가에 한 사람 당 5미터 이상의 공간을 확보하고 시종의 일산을 받으며 한잔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것이다.

포성정 곡수거가 유상곡수시설이 아닌 결정적인 증거는 돌 조각의 형태에 있다. 잘 살펴보면 안쪽은 2중테두리로 장식을 가하였고, 바깥쪽은 1회의 테두리조각을 베풀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구시설의 바깥쪽 보다 안쪽으로 시선이 모아졌다는 것이다.

즉 이 유상곡수연에 참여하는 사람은 유상곡수 시설의 안쪽에 위치하였던 것이다. 안쪽은 3명 정도가 앉을 수 있다. 옛날에는 어떤 잔치이든 독상을 받게 되어 있다. 옛날 빈차도나 가례도를 보면 전부 혼자 상을 받는다.

하나의 상에 여러 사람이 둘러앉는 경우는 없다. 즉 참가자들은 일정한 거리를 벌리고 떨어져 앉게 마련이며, 그 사이에는 시종들이 일산을 받치고 서거나, 음식을 나르는 것이다.

왜 간격을 벌릴까? 칼을 차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라도 마찬가지지만 신라시대라면 당연히 사(士) 는 곧 무사다. 원래 사(士)계급은 무사를 의미했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사(士) 계급의 본래의 의미에 맞다.

문사는 나중에 생겨난 것이다. 송나라 이후에 칼을 차지 않는 문사의 시대가 열렸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시대 무신의 난을 일으키게 한 그 시점에 문사의 시대가 열렸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에 있는 신라사신의 그림을 보면 당연히 칼을 차고 있다.

왜 반드시 칼을 차는가? 칼은 신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신라시대라면 문사는 존재하지 않았고 사는 곧 무사이며 무사는 칼을 차므로서 상놈이 아닌 사(士)계급에 속한다는 점을 나타내었다. 칼을 차지 않으면 상놈으로 오해되어 죽는 수가 있다.

항상 칼을 차고 있기 때문에, 물리적 충돌을 야기하는 접근은 어떤 경우에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잔치에서도 각자 자신의 상을 받는 것이다. 예수의 '최후의 만찬'처럼 큰 상에 여럿이 둘러앉는 것은 서양의 풍속이다. 그들은 칼을 차지 않기 때문에 따로 떨어져 앉을 필요가 없다.

서양에서 악수를 하는 것은 로마시대 병사들의 습관으로, 오른손에 칼을 들지 않았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칼을 들고 있으면 접근하지 않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두 손을 소매에 감추고 읍을 하는데, 이는 역시 손을 칼에서 멀리 떼어보이는 동작이다.

만약 어떤 사람을 길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손을 소매속에 감춘채 얼굴높이까지 들어서 읍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칼을 빼려 했다고 우기고, 먼저 칼을 뽑아서 죽여버려도 그만이다. 그런 시대였다.

고로 사계급이나 왕족이 체신머리없이 좁은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앉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최소한 칼의 길이만큼 띄워서 좌우에 1미터를 보장하고, 또 좌우에 시녀 2명이 일산을 받치고 서는 거리 2미터를 보장하고, 술잔을 나르는 하인의 통로까지 더하여 총 5미터 이상의 거리를 이격시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포성정 곡수거시설은 바깥쪽에 둘러앉을 경우, 3명 정도가 앉아야 체면이 서는 정중한 자리가 되고, 격식을 따지지 않는 친밀한 모임이라 해도, 조여앉아서 5명 정도가 앉을 수 있다. 이 인원으로 시회를 열 수 없다.

옛날 한량들이 기생집을 들어갈 때 선객이 있으면 밖에서 "죕시다"하고 구령을 붙이게 되어 있다. 사대부들은 옹기종기 모여앉는 법이 없기 때문에, 안에서 자리를 비켜주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실내에 있는 그룹이 유력자라면 호통을 쳐서 내쫓는다. 반대로 바깥에 있는 그룹이 더 유력자라면 실내의 무리들은 슬금슬금 꽁무니를 뺀다.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다. 이때 곧잘 말다툼이 벌어져, 싸움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기생집에 드나들어 본적이 없는 초보자는 예법을 모르고 반드시 해야하는 정해놓은 구호를 외치지 않았다가 얻어맞고 쫓겨나게 된다.

일정한 의식이 정해져 있어서 그 정해진 절차대로 구령을 불러조야 술한잔으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것이다. 하여간 기생집에 드나드는 의식은 까다롭고 복잡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빈차도나 가례도에서 그런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곡수거 맨 윗부분은 시종이 술잔을 띄워야 하니 앉을 수 없는 자리다. 여기서 술잔이 맨 앞자리에 앉은 사람 앞에 오는데는 10초 정도가 걸린다. 왜냐하면 맨 위 부분은 경사가 심해서 유속이 빠르기 때문이다. 10초 만에 시 한수를 때릴 수는 없다.

전체길이 10미터에서 맨 앞부분 2미터는 빼놓고 셈해야 하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굴곡이 심한 곡선코스가 시작되는데 수량을 적당하게 공급하면 유속이 느려지고 물이 제자리에서 회전하게 된다. 물론 수량을 적당하게 조절해야만 한다.

아랫쪽에 뭔가로 막아서 물이 고이게 하므로서 유속을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시설은 현재로서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시설을 이용한다면 유속이 조절되지 않아 시를 짓고 말고 할 수가 없다. 아니 잔을 띄울 수도 없다. 물이 고이지 않기 때문이다.

잔을 띄우려면?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10마력짜리 모터를 가동하여 소방호스만한 호스로 굉장한 량의 물을 공급해야 한다.(방송에서 이런 식으로 실험한 적이 있다.) 두 번째 방법은 하단에 둑을 막아 물의 흐름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을까?

맨 위의 돌확을 보면 알수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원래 그 위에 돌거북이 있었고 거북이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이때 수량은? 돌거북 입에서 물이 나온다면 수돗물이 졸졸 흐르는 이상이 될 수 없다. 이걸로는 술잔을 띄울 수 없다.

하인들이 양동이로 물을 퍼날랐다면? 어쨌든 상단의 돌 양동이가 세수대야보다 작다. 30센티 정도의 크기이다. 이 정도의 크기로 물을 받는다면 매우 적은 양의 물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양동이로 물을 퍼나른다면 돌 확의 크기가 적어도 폭 1미터, 깊이 50센티는 되어야 한다.

즉 어떤 경우에도 술잔을 띄울수 있는 정도의 충분한 양의 물은 흐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10마력짜리 양수기를 동원하거나 부지런한 노예 100명쯤 동원하여 사정없이 물을 퍼날랐다면 몰라도. 하긴 하인들이 번잡하게 물동이를 들고 왔다갔다하는데 무슨 흥이 나서 시회를 열겠는가?

혹자는 위쪽에 있는 배상지라는 저수지에서 물을 공급했다고 주장하는데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배상지는 포석정이 있는 위치와 반대쪽이라서 물을 공급하려면 하천을 건너야 한다. 남쪽 산기슭에도 작은 저수지가 있기는 한데 거리가 너무 멀다.

포석정의 곡수거가 하천과 인접하여 있음을 볼 때 멀리있는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오지는 앉았음을 알 수 있다.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바라보고 있는 감은사지는 야산 기슭에 있는데 아랫쪽에 작은 연못이 있다. 돌축대를 쌓아 잘 만든 연못이다. 물론 동해의 용이 된 문무대왕이 절을 찾아오는 물길이다. 즉 신라인들의 사상에는 용이 물을 따라 찾아온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 물이 법당 바닥까지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즉 물이 10미터 가량 되는 축대 위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근데 분수가 아닌 다음에야 물이 올라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위에서 아래로 물을 흘려보냈다고 보아야 한다.

어쨌든 감은사 법당의 대들보 밑에는 많은 장대석으로 만들어진 물과 관련된 수상한 시설이 있고 그 공간은 동해의 용이 올라와 머무는 공간으로 설명되고 있다.

최근 발굴된 나을신궁터에도 중심에 우물이 있다. 우물은 용이 살고있는 곳이다. 물은 탄생을 뜻한다. 용은 탄생설화들과 관련이 있다. 태조 왕건도 용의 자식으로 설정되어 있다. 신라왕족들도 용의 후예일 수 있다.

포석정의 유구시설은 단순하게 볼 때, 용이 물길을 따라 찾아오는 수로로 볼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유구시설이 완전한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유상곡수연을 위한 시설이라면 완전한 동그라미형태가 될 필요는 없다.

그저 원형으로 둘러앉을 수 있는 시설이면 족하다. 그러나 사진에서 보듯이 곡수거시설은 주위에 둘러앉기가 만만치 앉다. 주위에 둘러앉기 위한 시설이라면 곡선인 수로가 사람 앞에서는 일직선으로 되어 술잔을 볼 수 있는 시야가 확보되어야 한다.

상놈처럼 옹기종기 모여앉지 않는 이상 적당한 앉을 자리가 없다. 양반처럼 멍석을 깔고 적당한 거리를 띄우고 앉아서는 술잔이 보이지도 않는다.

첨부한 사진을 잘 살펴보면 안쪽은 이단 장식 띠를 둘렀고 바깥쪽은 1단의 띠를 둘렀음을 알 수 있다. 즉 안쪽의 이단띠는 장식성이 가미된 것이며 바깥쪽의 띠는 장식성이 없는 마감손질에 불과하다.

이는 이 시설의 사용자들이 유구시설 안쪽을 이용했음을 의미한다. 안쪽의 면적은 2~3인이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면적이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볼 때 포석정의 유구시설이 유상곡수연 시설일 가능성은 0이다. 필자 개인의 소박한 의견으로 본다면 용이 상승하는 물길로서, 용과 접촉하므로서, 용의 탄생을 기원하는 시설로 생각된다. 이는 감은사의 수로시설, 나을신궁의 우물과 같은 개념의 시설로 볼 수 있다.

정리하면
■ 안쪽의 이중으로 된 장식 띠 -> 유구 안쪽 공간위주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 안쪽 공간의 면적 -> 2~3인 정도가 사용하기에 적당한 넓이이다.
■ 돌확과 그 아래의 급경사 -> 술잔을 띄울 수 없는 적은 양의 물이 흘렀음을 의미한다.
■ 완전한 동그라미(Ω) 형태 -> 무언가가 사용자의 몸을 한바퀴 휘감아 돌았음을 의미한다
■ 물과 관련한 시설의 의미 -> 무언가의 탄생을 기원했음을 의미한다.

하긴 이 시설은 원래 두 사람이 사용하는 것으로, 한 사람은 상단에서 술잔을 띄우고 다른 한 사람은 10분 후 하단에서 술잔을 받고 이를 교대로 했다고 우기면 할말이 없다. 물론 100명의 노예가 양동이로 힘차게 물을 퍼날랐을 것이고.

무엇보다 석물을 손질함에 있어서 사람이 둘러앉을 것을 고려한 흔적이 없다. 결정적으로 곡수거 안쪽에 2단의 장식을 베풀었음을 볼 때, 곡수거 안쪽면적부분이 이용되었음에 유의한다면 유상곡수시설로는 볼 수 없다.

하여간 이 인공의 시설물은 유상곡수의 사상과 맞지 않다. 선비가 자연과 벗하자는 것인데 이런 인공의 시설에서 무슨 놈의 자연을 벗하겠는가?

단이라는 개념은 그 위에 무언가가 얹혀있을 때만 성립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안쪽에 무언가가 있었다. 제단 등의 시설이 세워져 있었을 수도 있고, 사람이 들어가 있었을 수도 있다.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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