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5560 vote 0 2003.09.05 (13:47:30)

독서를 계절따라 가려해서는 아니되겠지만 언론에서 말하는 ‘독서의 계절’이 다가왔구만요. 인터넷시대에 책타령은 어울리지 않겠다만 저의 경험을 살려 느낀 바를 이야기해보는 것도 유의미하겠다 싶습니다.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일단은 고전으로부터 시작해야겠지요. 한국의 고전부터 읽을 것인가? 닥치는 대로 읽기가 최고입니다. 한국이든 외국이든 안가리고 손에 잡히는대로 읽는 것이 최고입니다. 가능하면 빠르게 읽기도 좋구요.

최악의 독서는 요점정리하고, 줄거리 요약하고, 교훈 되새기고, 주제 파악하고.. 이런거 절대로 하지마세요. 무조건 읽으세요.

또 하나의 규칙은 학생이라면 자기 수준에 좀 어렵다 싶은, 이해가 잘 안되겠다 싶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잘 이해가 되고, 감동이 물밀듯 밀려오고 흥미진진한, 재미만점인 책은 안좋습니다. 그게 무협지 아니면 만화책이거든요.

잘 모르겠고 알쏭달쏭한 책을 뜻도 모르면서 그냥 닥치는대로 읽어제끼는게 최고입니다.

독후감 절대 쓰지 말 것. 독후감 쓸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한권 더 읽을 것. 잼 없으면 중간중간 건너띄면서 읽어도 무방함, 정 시간 없으면 뒷부분 해설만 읽어도 무방함, 일단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한번씩은 손을 대보는게 좋음.

첫째의 규칙은 무조건 많이 읽고 빨리 읽기
둘째의 규칙은 수준이 높아서 내게는 좀 버겁다 싶은 책도 마다 않고 읽기
셋째의 규칙은 책 내용을 굳이 이해하고, 정리하고, 분석하고 하지 말 것
넷째의 규칙은 감동받지 말 것(이건 역설적 표현)
다섯째 규칙은 흥미를 느끼면 읽지 말 것(또한 역설적 표현)
여섯째 규칙은 해롭다는 책, 이른바 악서도 한번 쯤은 읽어볼 것
일곱째 규칙은 다 읽지는 못해도 한번쯤 훑어보거나 뒷장의 해설만이라도 읽어둘 것
여덟재 규칙은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한번은 손을 댄다는 자세로 덤빌 것.

여기서 역설적 표현이란 .. 감동받지 말라고 해서 감동이 밀려오는 좋은 책을 읽다가 책장을 덮을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 다만 그 감동에 휘말려 편식을 시작하면 시야가 좁아지고 책 선택의 폭이 좁아져서 다양한 책을 안읽게 되므로 너무 빠져드는 책은 의식적으로 피하라는 것.

‘악서는 없다’는 주장이 있어요. 사실 모든 책은 양서입니다. 불온서적 음란서적 이런거 없어요. 그건 좀 수준에 미달하는 판단력 없는 아이들을 위한 충고일 뿐. 분별력있는 사람에게는 불온서적 음란서적이 없지요.

한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책은 결코 마음의 양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이것도 역설적 표현이므로 곧이 곧대로 듣지 말 것) 책은 양식이 아니고 그 양식이 숨겨져 있는 보물섬입니다. 섬이 있어요. 그
섬 어딘가에 보물이 묻혀 있지요.


만약 그 보물섬에서 감동이라는 보물을, 교훈이라는 양식을 얻는데 성공한다면 곧 실패한 거에요. 그건 가짜이기 십상입니다.

감동, 교훈, 주제의식 이런거 안좋습니다. 문체를 파악하고 스타일을 꿰뚫고 흐름을 짚어내는게 중요해요.

시를 논하되 1000편의 시를 외기 전에는 섣불리 주제가 어떻고 운율이 어떻고 따지지 말것이며, 그림을 보되 10000편의 그림을 보기 전에는 구도가 어떻고 음영이 어떻고 논하지 말지니라. (옛날에는 시를 외었죠. 요즘은 굳이 외울 필요까지야 없지만..많은 시를 읽고 그 변화의 흐름을 포착하는게 중요하다는 말)

즉 책이라는 보물섬에서, 숨어있는 보물을 발굴하려고 하면 안되고, 그 섬에도 나름대로 질서가 있고 변화가 있고 흐름이 있다는 걸 깨치는게 중요하다는 말이죠.

어느 마을에 아들 삼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자식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어요.

"내가 포도밭 한 구석에 보물을 묻어 놓았으니 그 보물을 파내어서 사이좋게 나눠가지렴."

자식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밤새 포도밭을 파헤쳤으나 보물은 없었어요. 보물을 찾다 찾다 실패한 자식들이 하루는 지혜로운 랍비를 찾아가서 물어보았죠.

"아무리 포도밭을 파헤쳐도 돌아가신 아버지가 유언으로 말씀하신 보물은 없는데 어쩌면 좋을깝쇼?"

랍비가 이렇게 대꾸했지요.

"무슨 소리! 자네들은 이미 아버지의 보물을 발견했었지 않나?"

"네?"

"자네들이 열심히 포도밭을 파헤쳤기 때문에 깊이갈이가 되어 올해 포도농사는 풍작이 되었잖는가? 그게 바로 아버지가 자네들을 위하여 남겨준 보물이라네"

책 읽기도 이와 같아요. 양서만 골라읽겠다는 태도는 포도밭의 보물을 발굴하겠다는 거지요. 주제를 찾고 감동을 찾고 교훈을 찾는 것은 포도밭에 잘 영글은 포도만 따먹겠다는 거에요.

그건 안됩니다. 땅을 파헤쳐야 해요. 거름을 주어야 해요. 포도밭을 가꾸어야 하는 거지요. 책읽기도 이와 같아서 닥치는 대로, 빠르게, 많이, 다양하게 읽는게 최고에요.

포도밭 구석구석을 파헤쳐서, 흙 속으로 산소가 들어가게 하고 거름이 골고루 섞이게 하는 거지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서관의 책을 남김없이 다 읽어버리겠다는 자세로 가야 비로소 그 지식에 피가 돌고, 산소가 공급이 되고, 거름이 골고루 섞이는 거지요.

알맹이만 쏙쏙 빼먹겠다는 태도로 가면 결코 포도밭의 보물은 찾을 수 없어요. 주제, 감동, 독후감, 정독, 양서읽기, 이건 아주 고약한거에요.

시야를 좁히고, 편견과 고정관념을 쌓고, 패턴을 놓치고 흐름을 단절시키는 거죠.

시야를 넗히려면
편견을 버리려면
고정관념을 깨려면
창의적인 사고를 얻으려면
패턴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려면
판 전체의 돌아가는 흐름을 읽으려면

포도밭을 몽땅 파헤쳐서 그 흙 속으로 산소가 통하게 하고 거름이 고루 섞이게 해야만 해요.

다독에 속독에 발췌독에 건성으로 읽기가 최고라는 말. 천편의 시를 읽기 전에는 시를 논하지 말 것, 만편의 그림을 보기 전에는 그림을 말하지 말 것, 도서관의 책을 다 손대기 전에는 책읽었노라 말하기 없기. 이상 말한 내용을 액면 그대로,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 없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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