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소풍 끝나기 전에
이 세상 소풍 끝나기 전에 책 한 권 정도는 남기고 싶다. 그 한 권은 구조론이다. 학문의 역사는 구조론에 대한 안내서 격이다. 구조론을 이해하려면 먼저 구조론적 세계관을 머릿속에 세팅해 두어야 한다.
구조론적 세계관은 세상을 보되 입자 알갱이가 아니라 관계망으로 보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유다를 낳고 하는 식으로 연쇄적인 고리로 세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구조의 세계에서 정과 반은 대립,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받는다. 이어받아 완성시킨다. 정이 반을 낳고 반이 합을 낳아 완성시킨다. 질서가 가치를 낳고 가치가 양식을 낳아 마침내 완성시킨다.
구조의 세계에서 입자는 야구공처럼 동그랗게 생긴 덩어리가 아니다. 내가 주먹으로 벽을 세게 치면, 내 주먹의 치는 힘과 벽의 맞서는 힘이 작용 반작용으로 팽팽한 맞물려 교착되는 성질 그 자체가 입자다.
이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다. 세계관의 변화가 필요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이후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깨졌는데도 아직도 세상은 새로운 세계관으로 바뀌지 않고 있다. 이제 바뀌어야 한다.
지식계를 지배하는 마르크시즘은 여전히 낡은 시대의 결정론적 사고에 빠져있다. 왜 상대성이론의 시대, 양자역학의 시대, 불확정성의 시대, 엔트로피의 시대에 여전히 인간들은 결정론적으로 사고할까?
사람들은 말한다. ‘결정론은 절대로 틀렸어. 상대론이 절대로 옳아.’ 이 말은 자체 모순이다. 상대론이 옳다면 상대론이 옳다는 그 말도 상대적이어야 한다. 상대성의 세계관은 여전히 확립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과 무엇이 상대적이지? 상대의 相은 서로 상이다. 서로는 둘이어야 한다. 무엇과 무엇이 둘이지? 질서와 가치다. 질서는 결정론적이고 가치는 상대론적이다. 질서는 앞에서 길을 열고 가치는 뒤에서 완성한다.
계몽과 소통이 상대적이다. 동기와 보상이 상대적이다. 긴장과 이완이 상대적이다. 이백과 두보가 상대적이다. 결정론적인 거시세계와 상대론적인 미시세계가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구조론이 양자를 통일한다.
구조론적 세계관을 획득하기 바란다. 그것은 剛과 柔, 공자와 노자,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코스모스와 카오스, 교종과 선종, 순수와 응용을 대립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