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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7450 vote 0 2008.12.30 (23:13:46)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우리 시대는 해독되고 있는가? 21세기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인간들은 무리지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이 문명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산업화에 이어 정보화로 간다면 정보화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세기가 혁명의 세기라면 혁명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실존주의 등장, 구조주의 철학, 칼 포퍼의 열린사회,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인상주의 화풍의 석권, 대중문화의 지배, 재즈와 팝아트, 매스미디어의 등장.

양차 세계대전 후 나타난 새로운 징후들이다. 확실히 이전시대와 차별화 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20세기를 특징짓는 것은 사회주의 운동이다. 그러나 양차 세계대전 후 나타난 실존주의, 매스미디어, 인상주의, 대중문화 등은 사회주의와는 다른 흐름이다.

21세기가 가는 길은 계몽의 길이 아니라 소통의 길이다. 20세기의 낡은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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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은 하나가 바뀌면 전부 바뀌는 현상이다. 전부를 변하게 하는 하나는 생산력의 변화다.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생산관계의 변화가 20세기 이후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생산력의 하나의 변화가 촉발한 ‘전부의 변화’는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는가? 사실주의가 아니라 인상주의, 고전음악이 아니라 대중음악이다. 진보주의의 당초 전망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사회주의 운동의 전개가 도리어 탈사회주의화를 촉발하고 있다. 사회주의 이론과 밀접한 밀레와 쿠르베의 사실주의가 도리어 고흐에서 피카소까지 인상주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히고 있다. 이런 경향은 도처에서 감지된다.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식그룹이 주장하는 진보의 전망과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진보주의가 기획한 닫힌사회가 아니라 열린사회의 전혀 다른 패러다임으로 가고 있다.

사회주의는 계몽운동이다. 고전주의는 계몽운동이다. 사실주의도 계몽운동이다. 이는 진보주의의 당초 전망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새로운 모럴은 진보진영의 기획의도에서 이탈하고 있다.

애초에 군주가 궁궐 앞에 광장을 개설한 것은 그 광장을 이용하여 군대를 사열하고 위력을 과시하여 민중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광장은 지금 무질서한 민중들 손에 접수되고 말았다.

광장은 민중의 창발성에 의해 다른 용도로 전용되고 있다. 장사치와 광대패와 선동가와 이방인이 모여들어 제멋대로 상품을 거래하고 희극을 공연하고 군중을 선동하며 새로운 문화의 꽃을 피워내고 있다.

지식인이 고전적 이상주의라는 기획의도로 개설한 사회주의, 사실주의, 고전주의라는 계몽의 광장이 민중들의 손에 넘어간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인상주의, 대중음악, 팝아트라는 소통의 광장으로 바뀌고 있다.

혁명은 전부 바꾸자는 것이다. 전부 바꾸려면 계몽이 아니라 소통이어야 한다. 고전적 이상주의를 앞세운 지식의 통제로는 한계가 있다. 보다 인간의 본성에 밀접한 대안의 패러다임이 제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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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인가? 사상이란 무엇인가?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역시 ‘맞섬’으로 풀어야 한다. 철학과 사상과 이념은 인간이 환경의 도전에 맞서 응전하는 하나의 스탠스에서 얻어진 각각의 포지션들이다.

사상(思想)의 사전적 의미는 ‘하나로 통일된 인식과 판단의 체계’다. 사상은 체계적인 인식이다. 왜 체계인가? 판단하기 위해서다. 무엇을 판단하는가? 가치를 판단한다. 가치판단에 의해서 전부 한 줄에 꿰어진다.

판단은 갈림길 앞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다. 무질서하게 흩어져 가는 군중들도 갈림길 앞에서는 질서를 찾는다. 어느 길로 갈지 합의해야 하니까. 선택의 갈림길에서 군중의 아이디어들은 모두 한 줄에 꿰어진다.

인간의 눈과 귀와 코와 몸으로 얻어진 다양한 정보들이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선택하기 위해서는 인식과 판단과 행동의 체계가 필요하다. 아이디어들을 전부 한 줄에 꿰어 질서를 부여하기다.

갈림길 앞에서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인식에 체계(體系)가 있어야 한다. 체(體)는 합치고 계(系)는 가른다. 체(體)가 인식을 합치는 몸통이라면 계(系)는 판단과 행동으로 갈라지는 팔다리가 된다.

환경과 인간의 맞섬 ≫ 인식과 판단과 행동을 유도 ≫ 인식은 철학으로, 판단은 사상으로, 행동은 이념으로 전개

인간은 환경 위에 내던져진 존재이며 그 환경은 거칠기 짝이 없는 생존경쟁의 생태계 환경이다. 환경의 도전에 응전하기 위해 인식과 판단과 행동의 체계가 필요하다. 철학과 사상과 이념이 필요한 거다.

인간은 도구를 이용하여 세상과 맞선다. 목수는 망치와 끌로 세상과 맞선다. 선비는 붓과 먹으로 맞선다. 지식인은 진리와 이성으로 맞선다. 맞서려면 자세를 고쳐잡아야 한다. 인식과 판단과 행동을 한 줄에 꿰어야 한다.

나(我)의 어원은 손(手)에 창(戈)을 쥐고 대적하여 맞선 자세이다. 인간은 맞서는 존재이다. 내가 외부의 환경에 맞설 때 나의 존재는 뚜렷해지고 내가 맞서지 않고 뒷걸음칠 때 내 존재는 희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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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이 시대의 도전에 맞서 응전하는 인간의 실존적 스탠스가 있다. 그것이 현대성이다. 우리는 현대라는 시대배경과 맞서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를 사상한다. 우리는 현대를 사상하는 것이다.

생산력의 변화가 생산관계의 변화를 촉발한다. 산업화로 특징되는 20세기 질서의 결이다. 그 결은 사회주의, 사실주의, 계몽주의로 대표되는 진보주의 비전으로 전개된다. 그렇게 인식을 낳고 판단을 낳고 행동을 낳는다.

그리고 지금은 21세기다. 무엇인가? 산업사회의 결은 생산관계의 변화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삶의 양식의 변화를 촉발한다. 진보주의는 진보주의적인 삶의 양식을 완성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 ‘인식-생산력의 변화≫ 판단-생산관계의 변화≫ 행동-삶의 양식의 변화’

생산력의 변화가 동기라면 삶의 양식의 변화는 보상이다. 우리는 단지 세상을 바꾸는데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 우리들 자신이 존엄으로 보상받으려는 것이다. 진보의 최종결론은 인간 개개인의 존엄이다.

생산력이 변화하는 이유는 지식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달 덕분이다. 인식이 생산력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인식의 변화는 삶의 결을 따라 전개되어 판단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로 최종 완성된다.

인터넷의 등장은 정보의 생산력을 변화시킨다. 네티즌 세력의 등장이 그러하다. 네티즌은 웹세계를 인식한 사람이다. 그들은 리플을 통하여 생산관계를 역전시킨다. 정보의 소비자였던 네티즌이 스스로 정보의 생산자가 된다.

네티즌은 쌍방향 의사소통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선보인다. UCC의 등장이 그러하다. 웹 2.0이라는 개념도 소개된다. 정보를 소비하는 양식이 변화한 것이다. 문화의 변화로 최종 완성된다. 소통의 문화로 양식화 된다.

양차 세계대전 후 나타난 구조주의, 실존주의, 인상주의, 팝아트, 대중문화, 매스미디어.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는? 삶의 양식의 변화다. 생산력이 1라운드면 생산관계가 2라운드고 삶의 양식이 마지막 3라운드다.

● 개인은 인식-판단-행동≫학문은 철학-사상-이념≫사회는 계몽-투쟁-소통

19세기에 보급된 새로운 인식은 과학의 계몽으로 종교를 극복하고 20세기에 보급된 새로운 판단은 사회학으로 투쟁하여 정치를 정비하고 21세기에 보급된 새로운 행동은 미학으로 소통하여 문화를 완성한다.

● 19세기는 계몽의 세기 ≫ 20세기는 투쟁의 세기 ≫ 21세기는 소통의 세기

르네상스 양식은 이탈리아의 한 도시 피렌체에서 촉발되었다. 그 시대의 시대정신의 정수를 담아내는 미학적 양식을 세련되게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르네상스 정신을 유산으로 남겼다.

그 이전에 광야에 뿌려둔 씨앗이 있었다. 그리스의 이상주의다. 그리스 정신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완성시켰다. 뿌리가 있었기에 르네상스로 부활할 수 있었다. 근대 계몽주의 사상 역시 르네상스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중국문명은 당송시대가 미학적으로 완성시켰다. 그 이전에 남조문화가 있었다. 당송시대가 로마라면 남조문화가 그리스다. 로마문명이 그리스문명의 표절에 불과하듯이 당송시대의 번창은 남조문화의 답습에 불과하다.

영국은 셰익스피어가 방점을 찍었다. 셰익스피어 이후 다시는 셰익스피어가 나오지 않았다. 오늘날 미국문명은 양식의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 그리스 정신에 맞먹는 미국정신이 없다. 미국에 이상주의가 없기 때문이다.

이상주의가 빈곤한 로마문화가 그리스문화의 표절에 불과하듯이 이상주의가 없는 미국문화는 세익스피어 시대의 영국문화를 뛰어넘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21세기의 미국이 18세기의 영국보다 못하다.

이상주의가 축이다. 이상주의가 문화를 한 줄에 꿰어낸다. 이상주의란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신의 완전성, 혹은 진리의 완전성에 맞서 각을 세우는 지점이다. 가장 크게 세상과 맞서 대립각을 세워야 한다.

거기서 진리라는 하늘의 질서와 이상이라는 인간의 가치가 유도된다. 하늘의 진리와 인간의 이상이 맞서는 지점이 있다. 그 아슬아슬한 그리고 긴장된, 바늘 끝처럼 첨예한 극한의 밸런스에서 진정한 완성의 미학이 찾아진다.

8세기 신라 왕실문화의 극성, 12세기 고려 귀족문화의 번성, 17세기 조선 선비문화의 완성에 이어 21세기 이 시대의 시대정신에 맞는 새로운 삶의 양식은? 진정한 이 시대의 모럴은? 21세기 현대미학의 완성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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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는 ‘빛을 그렸다’고 한다. 햇볕이 비치는 야외로 나가야 빛을 그릴 수 있다. 그런데 야외로 나오면 유화물감이 변질된다. 마침 햇볕에 노출되어도 변질되지 않는 안료가 새로 발명되었다.

인상주의 등장은 과학의 혁신에 기반을 둔다. 과학은 인식에서의 변화다. 인식의 변화가 판단의 변화를 유도하고 행동의 변화를 촉발한다. 곧 사실주의라는 판단의 변화를 거쳐 인상주의라는 행동의 변화로 전개한다.

쿠르베는 ‘머리가 아닌 눈으로 그려라’고 했다. 눈으로 그리기 어렵다. 안료가 변색되기 때문이다. 명암이론과 색채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르베 이전에는 눈으로 그리고 싶어도 그것이 불가능했다.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밀레와 쿠르베의 사실주의가 인상주의 선구가 된다는 점이다. 이는 고전주의가 일구어낸 기교와 형식의 완성이 도리어 그 고전적 형식미를 극복하는 낭만주의를 촉발한 예와 유사하다.

마네는 빛에 도전한다. 빛은 과학이다. 명암이론과 색채이론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도전이다. 세잔은 형태에 도전한다. 평면 위에 입체를 구현하려 한다. 역시 과학이다. 현대는 과학이 만들었다.

과학의 진보가 테마 위주에서 이미지 위주로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주의 인식을 촉발했고 그 이미지의 핵심은 빛과 형태라는 인상주의 판단을 거쳐 관객의 마음과 직접 소통하려는 표현주의 행동을 촉발한 거다.

안료 발명, 색채학 발달, 명암이론, 소실점이론이 생산력의 변화다. 사실주의는 확실히 생산력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생산력의 변화가 생산관계의 변화를 촉발한다. 인상주의는 생산관계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인간의 관념이 주체가 되는 회화에서 자연의 대상이 주체가 되는 회화로 계급 사이에 역전현상이 일어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산관계의 변화가 삶의 양식의 변화를 자극한다. 인상주의에서 표현주의로 진전한다.

사실주의가 동기라면 인상주의는 과제이고 표현주의는 보상이다. 사실주의가 긴장이면 인상주의는 밸런스고 표현주의는 릴렉스다. 사실주의가 계몽이면 인상주의는 투쟁이고 표현주의는 소통이다.

예술은 그 시대의 시대정신에 맞는 삶의 양식을 완성하는데 궁극적인 의미가 있다. 소통의 양식으로 진보는 최종 완성된다.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현대성이다. 현대성이라는 종착역을 향하여 줄기차게 달려온 것이다.

인상주의 등장은 프랑스 혁명과 같은 정치변혁과 관련이 있다. 대중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지식인이 독점하는 계몽의 가치가 퇴색하고 관객이 주체가 되는 소통의 가치가 확립된 것이 인상주의와 표현주의로의 전개이다.

고흐는 10년 동안 무려 879점을 그렸으나 한 점의 그림도 제값받고는 팔지 못했다고 한다. 왜인가? 화가와 평단이 시장의 주체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관객이 시장의 주체로 등장했을 때 고흐의 그림에 제값이 매겨졌다.

관객이 시장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 바로 그것이 현대성이다. 계몽의 시대가 아니라 소통의 시대가 되어야 관객이 시장의 주체가 된다. 그러려면 관객 자신이 시장의 주체가 되려는 욕망을 표출해야 한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작가 자신의 조형적 질서에 따라 자연의 완전성을 재현함이다. 쿠르베는 자연의 사실에서 그 질서를 찾아내었고 마네와 모네는 빛의 인상에서, 세잔은 사물의 형태에서 그 질서를 찾아낸 것이다.

고흐는 관객의 내면에 깃든 관객 자신의 조형적 질서를 드러내고픈 욕망에 방아쇠를 당겼다. 관객이 각자 자신의 내면에 고유한 자기만의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때 진정한 소통은 가능하다. 그것이 현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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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참(眞)된 리(理)다. 어원으로 보면 리(理)는 옥(玉)+리(里)로 보석세공사가 옥을 갈아내는 결이다. 옥은 결대로 커트해야 한다. 결대로 커트하지 않으면? 약간의 충격에도 깨지고 만다.

결이란 무엇인가? 나이테가 결이다. 그래서 나이테를 한자어로 목리(木理)라 한다. 나이테는 무엇인가? 나무 자신의 내적 정합성에 맞는 조형적 질서다. 나무가 세상과 맞서 밸런스를 유지하는 실존적 스탠스다.

나무의 자아가 그 아(我)의 손(手)에 창(戈)을 쥔 것이 나이테다. 진리는 존재의 나이테다.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은 자기 내부에 나이테를 감추고 있다. 심과 날이 있다. 심과 날 사이에 결이 있다. 진리는 존재의 결이다.

모든 존재는 내면에 자기 자신의 조형적 질서를 감추고 있다. 자기다움이 있다. 내가 나다운 것이 곧 나의 결이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고 떳떳함을 느끼는 지점이 있다. 표현주의가 최종적으로 그것을 찾아내었다.

성경이나 희랍신화에서 베껴온 남의 메시지를 그림으로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안에서 나 자신의 조형적 본성을 찾아 관객과 직접 소통하기다. 비로소 진정한 현대회화의 확립이다.

사실주의 이전의 성경이나 희랍신화를 바탕으로 한 그림들은 고전 텍스트를 이미지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사실주의가 처음으로 예술을 ‘텍스트의 계몽’에서 ‘이미지의 소통’으로 전환시켰다.

사실주의가 현대를 촉발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주의는 자연의 텍스트를 모방하는데 그치는 한계가 있었다. 자연의 메시지를 포착하려 한 것이다. 여전히 메시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근대와 현대의 차이는 텍스트의 메시지 전달에 의한 일방향적 계몽이냐 이미지의 직관에 의한 쌍방향적 소통이냐에 있다. 예술의 본질은 이상주의다. 그 이상주의를 어디서 찾아내는가다.

성경이나 그리스의 신화에 있다고 믿어져온 이상주의를 사실주의가 자연에서 재발견하고, 다시 인상주의가 빛과 형태에서 재발견하고, 표현주의가 마침내 인간의 내부에서 재발견한다. 그리고 재현하기다.

진정한 것이 있다. 진리의 완전성이다. 우리가 그것을 찾아내고 우리 앞에서 그것을 재현해 보여야 한다. 그것이 문명의 의미다. 르네상스의 의미가 재생에 있다면 이 시대 문명의 본질은 역시 재현에 있다.

오래도록 희랍신화나 성경 속에 있다고 믿어져온 그것을 자연에서 재발견한 것이 서구의 계몽주의라면 인간 내부에서 재발견한 것이 동양의 깨달음이며 이를 공동체적 삶의 양식으로 재현하기가 현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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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와 피카소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회화를 추구하는 조형적 본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마네와 모네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은? 인간은 본래 그것을 욕망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남의 것을 거간한다면 진짜가 아니다. 희랍신화에서 혹은 성경에서 베껴온 남의 메시지를 관객들 앞에서 중계방송 한다면 사이비다. 그것은 진정한 예술이 아니다. 브로커의 짓이고 뚜쟁이의 짓이다.

미학은 사물 자체에 내재한 조형적 질서를 찾는다. 결을 찾는다. 리(理)를 찾는다. 나이테를 찾는다. 도공은 흙에서 결을 찾아내고 석수장이는 돌에서 결을 찾아내고 목수는 나무에서 결을 찾아낸다.

추사는 금석학에서 그 결을 찾았다. 이전에 석봉의 글씨는 다만 자와 획의 결을 따를 뿐이었다. 자획의 질서에서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 거다. 추사는 금석학에서 찾아낸 결을 종이와 먹과 붓의 대결로 재현하여 보이고 있다.

마네가 빛에서 찾고 세잔이 형태에서 찾은 것을 추사는 금석학에서 찾은 것이다. 마네의 그림에는 빛들의 전쟁이 숨어 있고 세잔의 그림에는 형태들의 대결이 숨어 있으며 추사의 글씨에는 붓과 종이와 먹의 대결이 숨어 있다.

존재는 맞섬이다. 결은 맞섬이다. 먹은 퍼짐으로 종이에 맞서고, 붓은 날램으로 먹에 맞서고, 종이는 빨아들임으로 붓에 맞선다. 추사의 글씨에는 종이와 붓과 먹이 치열하게 맞서서 고민하고 다툰 흔적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추사의 글씨는 과학이다. 쿠르베의 사실주의가 색채학에 기반을 둔 과학이듯이 추사체는 금석학이라는 과학에 기초한다. 추사는 초기의 금석학적 사실주의에서 말년에 이르러 추사체 특유의 표현주의까지 단번에 전개시켜 버렸다.

추사 초기의 글씨는 밀레를 닮았다. 이위정기(以威亭記)를 쓴 31살의 추사가 밀레라면 명선(茗禪)을 쓴 제주도 유배기의 추사는 마네였다. 마침내 고흐가 되어 판전(板殿)을 쓰고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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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의 전개는 객관적 회화에서 주관적 회화로의 전개다. 고전주의가 객관이라면 낭만주의는 주관이다. 추사의 금석학이 객관적 회화라면 그가 창안한 추사체는 주관적 회화다.

19세기가 ‘머리로 그리는’ 미완성의 객관이라면 20세기는 ‘눈으로 그리는’ 완성의 주관이고 21세기는 ‘마음으로 그리는’ 소통의 직관이다. 그러나 지식그룹의 이론은 여전히 낡은 시대의 객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평론가들은 머리로 그린 영화를 선호한다. 아직도 관객을 가르치려 드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장의 관객들은 이미 주관주의를 넘어 직관주의를 선호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과학의 객관이 생산력의 변화를 낳는다. 생산력의 발전이 생산관계의 변화를 촉발하면 생산관계가 역전된다. 공급자 시장의 객관주의에서 수요자 시장의 주관주의로 시장의 질서가 전복된다.

상품의 가치는 비용과 효용이 결정한다. 객관은 생산자가 투입한 비용이다. 그 제조원가는 객관적으로 검증이 가능하다. 생산자가 상품제작에 100을 투입했다면 그 제품의 가치는 정확히 100이다.

주관은 소비자가 결정하는 제품의 용도다. 케이크 한 조각의 가치는 그것을 혼자 먹느냐 아니면 연인과 함께 먹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선물용 상품은 주는 쪽과 받는 쪽 양쪽에서 동시에 가치가 발생한다. 당연히 비싸다.

비용과 효용을 넘어 제 3의 가치가 있다. 직관은 양식의 가치다. 곧 브랜드 가치다. 그 상품의 소비와 무관한 3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전파의 값어치다. 객관의 비용도 아니고 주관의 효용도 아닌 응용의 가치가 있다.

● 객관-비용으로 평가 ≫ 주관-효용으로 평가 ≫ 직관-응용으로 평가

시장의 질서는 공급자의 비용이 지배하는 단계에서 소비자의 효용이 지배하는 단계를 거쳐 브랜드의 파급효과가 지배하는 응용의 단계로 넘어간다. 타인에게 전파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따라 가치는 달라진다.

비틀즈의 음악은 대중이 따라부를 수 있다. 전파할 수 있다. 고흐의 그림이 주는 울림은 더불어 공감할 수 있다. 예술이 대중화 되고 상업화 되는 이유는 전파에 의한 양식화라는 제 3의 가치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나이키 신발 한 켤레의 가치는 제조원가로 검증되는 비용도 아니고 그 신발이 소년의 발을 보호하여 주는 효용도 아니다. 그 소년이 또래들에게 영향을 주는 응용의 가치다. 예술의 진정한 목적이 여기에 있다.

한 편의 영화가 직접 관객에게 주는 즐거움은 작고 먼저 그 영화를 본 사람이 미처 그 영화를 보지 못한 친구에게 간접 전파하는 즐거움은 크다. 함께 그 영화를 본 사람이 공감을 나누는 기쁨은 더욱 크다.

객관과 주관과 직관이 있다. 객관은 비용이고 주관은 효용이며 직관은 응용이다. 응용은 양식화이며 그것은 나와 타인의 행동을 일치시켜 집단지능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더불어 함께 나눌수록 가치가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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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변한다.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 위주의 객관적 회화에서 그려지는 대상 자체에 내재한 조형적 질서를 추구하는 주관적 회화를 거쳐 관객과의 쌍방향 소통을 위주로 하는 직관적 회화로 변한다.

무대 뒤의 연출자가 지배하는 드라마에서 무대 위의 배우가 즉석에서 애드립을 보여주는 쇼로 바뀐다. 마침내 객석의 관객이 댓글을 달고 추임새를 넣는 UCC로 뒤집어진다. 가치 창출의 주체가 바뀌는 것이다.

80년대 코미디는 연출자가 지배했다. 90년대 개그쇼는 배우의 즉흥연기가 지배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든 관객의 쌍방향적 참여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예술 분야에 공통된다.

이상주의에 기초한 진보주의 애초의 기획의도는 객관이었다. 과학이었다. 사실주의였다. 그러나 그 과학이 촉발한 21세기의 새로운 물결은 민중이 주체가 되는 직관이다. 곧 ‘현대성’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맞이했다.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은 만인이 인정하는 객관의 과학이다. 그러나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하는 첨단 촬영기술은 판타지와 결합하여 점점 더 주관으로 이행하고 있다.

80년대 홍콩영화의 성공 원인은 피아노줄을 이용한 아크로바틱한 액션기술이었다. 역시 기술의 발전이 성공의 원인이다. 그럴수록 판타지의 비중이 높아진다. 객관의 과학이 도리어 예술을 주관화 시킨다.

CG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내면을 주관적으로 묘사하게 된다. 머리로 영화를 보는 60년대의 구로자와 아키라에서 눈으로 영화를 보는 80년대의 스필버그를 넘어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 21세기의 김기덕으로 간다.

예술의 본질은 소통이다. 무엇으로 소통할 것인가? 매개가 있어야 한다. 소리의 매질은 공기다. 예술의 매질은 무엇인가? 고전적 아카데미즘은 텍스트로 기록된 성경이나 그리스 신화의 메시지를 매개로 삼았다.

밀레와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자연의 완전성을 매개로 쓴다. 마네와 세잔의 인상주의는 자연의 사실에서 인간의 시선으로 옮겨온다. 표현주의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끌어낸다. 결국 정답은 인간의 존엄이다.

고흐와 박수근은 안료의 특성을 활용한다. 추사는 붓과 먹과 종이라는 재료의 특성에서 찾아낸 조형적 질서를 매개로 삼는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관객 개개인의 내면에 숨어있는 조형적 질서를 매개로 삼는 것이다.

만인이 공유하는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 그 자체를 매개로 삼을 때 진정한 소통이 일어난다.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진 미적 본성이 있다. 그것이 현대성이다. 김기덕의 영화가 그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평론가들이 강조하는 주제의식 따위는 고전회화가 성경이나 신화에서 끌어온 텍스트를 이용하듯이 남의 것을 매개 삼는 것이다. 관객 개개인의 가슴 속에서 끌어내지 않은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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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양식을 완성한다. 양식은 구성소 전부를 한 줄에 꿰어내는 조형적 질서를 매개로 삼는다. 그 질서를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그리스의 이상주의에서? 성경의 메시지에서? 자연의 사실에서?

진정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것은 존엄이다. 인간에게는 본래 부끄러움을 피하고 떳떳함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 거기서 조달해야 한다. 왜 인간은 존엄한가? 부끄러움을 피하고 떳떳함을 추구하므로 존엄하다.

모든 존재에 내적 정합성이 있다. 대칭과 평형의 원리가 있다. A가 이렇게 하면 B는 이렇게 한다는 대응논리가 내적 정합성이다. 인간의 내면에서는 부끄러움과 떳떳함 그리고 어색함과 자연스러움이 내적 정합성을 이룬다.

비틀즈는 노래한다. 네 안에서 내적 정합성을 이루는 자연스러움과 어색함의 대결을 포착하라고. 그 둘의 절묘한 밸런스에서 생동하는 그대 마음의 질서를 포착하라고. 그것으로 너의 전체를 한 줄에 꿰어내라고.

고흐와 김기덕은 말한다. 네 안에서 일어나는 떳떳함과 부끄러움의 부단한 대결구조를 포착하라고. 네 안에서 그 둘의 첨예한 대결이 빚어내는 날카로움으로 타인의 날카로움과 소통하라고. 그 방법으로 서로 친구가 되라고.

왜 인간은 존엄한가? 부끄러움을 피하고 떳떳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어색함을 피하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래 하늘의 것이었다. 그리스의 이상주의로 혹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그 하늘의 것을 밀레와 쿠르베가 땅에 심었다. 마네와 모네가 한 떨기 꽃으로 길러내었다. 고흐와 김기덕이 마침내 그 꽃을 피워내고 그 향을 퍼뜨렸다. 예술은 인간의 내면에서 존엄을 끌어내는 과정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팔 하나만 잘못 만들어져 있다면 당신은 매우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그 작품이 걸작에 가까울수록 약간의 실수는 더욱 크게 도드라져 보일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황금비례라는 하늘의 진리에 있다면 고전주의다. 그것이 자연의 완전성에 있다고 믿으면 사실주의다. 그것이 자연과 인간의 교감에 있다면 인상주의다. 본래부터 인간의 내면에 그것이 있었다고 믿으면 표현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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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觀)은 볼 관 자(字)다. ‘나는 이렇게 본다’는 것이다. 좋게 보거나 나쁘게 보거나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곧 평가한다는 것이다. 평가대상은 가치다. 주관과 객관과 직관은 가치를 평가하는 구분기준이다.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갈수록 가치가 상승한다. 미완성 부품은 자체적으로는 평가할 수 없다. 짝을 만나지 못한 부품의 가치는 제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가치는 언젠가 완성될 것을 기대한 잠재적 가치다.

젓가락 한 짝은 쓸모가 없다. 나머지 한 짝을 만나야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젓가락 한 짝의 가치는 객관으로 평가된다. 제조원가로 평가된다. 투입된 비용으로 평가된다.

마침내 짝을 만나 한 벌의 수저를 이루었을 때 그 가치는 사용자의 쓰는 바가 결정한다. 쓰이는 가치가 효용이다. 돼지에게 던져준 진주는 가치가 없다. 올곧게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쓰여야 가치가 발생한다.

습작단계의 학생은 객관으로 평가한다. 학생의 시험이 객관인 이유는 그 공부가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완성단계의 작가는 작가 자신의 주관으로 평가한다. 진정한 것은 타인이 평가할 수 없다.

대중화 단계에서는 직관으로 평가된다. 예술의 발달사가 그러하다. 객관으로 평가되고 있다면 태동기다. 주관으로 평가되면 성장기다. 직관으로 평가되고 있어야 예술의 대중화 단계다. 인간 내부에서 존엄을 끌어내는 단계다.

예술은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클래식한 흐름에서 객관적 평가가 불가능한 인상주의 경향을 거쳐 보다 직관이 강조되는 표현주의 단계로 넘어간다. 예술은 언제라도 객관≫주관≫직관의 궤도를 따라간다.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클래식에서 팝으로, 계몽에서 소통으로 나아가며 점차 대중화 되고 상업화 된다. 그 과정에서 양식을 완성시킨다. 진정한 것은 소통의 양식이며 예술은 그 양식을 끌어내는 매개일 뿐이다.

베드로 성당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진실로 말하자면 석가탑과 다보탑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가치는 없다. 진실로 말하면 베드로 성당을 성취한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 가치 있다.

예술은 양식을 완성시켜 그 사회의 구성원이 서로 소통할 수 있게 유도하는 매개다. 그러므로 양식이 완성되는 시점에 예술은 소멸된다. 양식이 완성된다면 예술가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질병이 사라진다면 의사는 필요 없다. 전쟁이 사라진다면 정치가는 실업자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서로 완벽하게 소통할 수 있다면 예술조차도 부질없다. 그러므로 고려의 청자보다 조선의 백자가 더 뜻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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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상품은 태동기, 성장기, 확산기의 1 사이클을 가진다. 상품은 객관으로 태동하고 주관으로 완성되고 직관으로 전파된다. 직관으로 갈수록 보다 인간의 실생활과 밀접해진다.

학문이 객관을 요청함은 실생활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수학이나 논리학은 객관일 수밖에 없다. 그 자체로는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이 객관과 주관을 거쳐 직관으로 넘어가는 것은 직접 사용되기 때문이다.

연필이나 노트나 전화기나 컵은 객관으로 평가된다. 노트와 연필은 불완전하다. 둘이 만나서 글씨를 이룰 때까지 노트와 연필의 가치는 잠정적이다. 객관으로 평가되는 것은 모두 만나서 완성될 부품들이다.

연필과 노트가 끝내 만나지 못한다면 둘의 가치는 소멸된다. 객관으로 평가되는 것은 모두 미완성이며 주관으로 평가되는 것은 모두 완성이며 직관으로 평가되는 것은 모두 전파되는 것이다.

조리된 음식, 그려진 그림, 써놓은 글, 잔에 따라놓은 술은 주관으로 평가된다. 그러므로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의 가치와 배부를 때 먹는 음식의 가치가 다르다. 당신은 그 가치를 극대화 하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다.

직관은 모임에 참여한 사람의 수에 따라 결정된다. 한잔의 술이 그 모임에 참여한 백 명의 흥을 돋운다면 그 가치는 증폭된다. 인간의 내면에 숨은 자연스러움과 떳떳함을 끌어내기에 성공한다면 직관의 가치는 무한하다.

● 객관-비용-제조원가 ≫ 주관-효용-소비가치 ≫ 직관-응용-소통가치

진정한 것은 미학적 양식이다. 모든 예술은 최종적으로 소통의 양식을 완성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극장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재미있다며 만족해하는 것은 당신이 그 영화를 보는 진짜 이유가 아니다.

왜 당신은 영화를 보는가? 재미있으니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같은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만들어진다. 그 공통점이 인간들 사이의 소통을 매끄럽게 한다. 그것이 당신이 영화를 보는 진짜 이유다.

당신이 ‘화려한 휴가’를 보는 이유는 ‘화려한 휴가를 본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이후 한국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게 된다. 이미 화려한 휴가를 본 사람과 아직 그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다. 둘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소통한다.

영화를 보는 진정한 이유는 영화를 본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수십만 원이나 하는 비싼 돈을 들여서 재미도 없는 오페라 따위를 관람하는 어리석은 짓을 왜 하겠는가? 효용이라고는 거의 없을 텐데 말이다.

존엄이 진짜다. 양식은 존엄을 지향한다. 자연스럽고 떳떳한 것이 존엄이다. 무엇이 떳떳하고 무엇이 자연스럽고 무엇이 부끄럽고 무엇이 어색한지에 대한 당신과 나의 판단을 일치시키기 위해 예술은 존재한다.

화려한 휴가를 본 그룹과 보지 않은 그룹의 떳떳함과 부끄러움에 대한 판단은 달라진다. 이후 두 그룹 사이의 소통은 어긋나고 만다. 어느 그룹에 속할 것인가? 미래를 열어가는 사람들의 그룹에 속해야 한다.

당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미래의 트렌드를 제시할 수 있는 최고수준의 사람과 부끄러움과 떳떳함, 자연스러움과 어색함에 대한 판단을 완전히 일치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비싼 예술활동이다.

최고의 연주자가 느끼는 섬세함과 그대의 섬세함을 일치시킬 수 있다면, 추사가 대안목으로 고른 것을 그대의 심미안으로도 고를 수 있게 한다면 그 예술품의 가치는 무한에 가깝다. 그대의 전부와 교환해도 아깝지 않을 터이다.

인간은 욕망한다. 최고의 인물이 알아본 것을 자신도 알아볼 수 있기를. 최고의 예술가가 반응한 것에 자신도 반응할 수 있기를. 만약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소통의 속도는 급속하게 빨라진다. 모든 갈등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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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자들이 비싼 루이뷔똥을 구입하는 이유는 루이뷔똥이 오히려 절약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핸드백은 옷과 어울려야 한다. 대부분의 옷과 무난하게 어울릴 수 있는 가방이 구찌와 루이뷔똥이다.

옷장에 걸린 옷의 숫자만큼 가방을 구입할 수는 없기 때문에 비싼 구찌를 구입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일본 여자들의 심미안이 서구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이탈리아에 막대한 벌금을 물고 있는 셈으로 되었다.

만약 일본인들의 안목이 높다면 언제라도 옷에 어울리는 가방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옷에 어울리는 가방을 찾느라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다. 스트레스를 피하려고 비싼 구찌를 사들일 필요가 없다.

무엇인가? 예술을 모르면 일본처럼 된다. 양식의 문제에 걸려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게 된다. 예술의 가치는 공동체 내에서 소통의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예술을 모르면 의사소통에 실패하여 사회의 갈등지수는 높아진다.

물론 사회의 진보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예술은 필요하지 않다. 그 시점에는 지식인이 주도권을 잡는다. 대중은 단지 지식인의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사회가 일정수준 이상 발전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회가 발전하면 상승한 개인이 주도권을 잡으려 한다. 그 방법은 친구와 동료들 사이에서 정보의 전파자가 되는 것이다. 먼저 영화를 보고 먼저 맛있는 것을 먹고 먼저 음악을 듣고 전파하는 데서 주도권이 얻어진다.

미학적 양식의 완성에 실패하면 그 전파에 실패한다. 그 경우 소통하지 못한다. 공동체 내부에서의 마찰에 의해 강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 스트레스를 피하려 하다가는 일본처럼 구찌를 사들이며 외화를 낭비하게 된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시대의 삶의 양식이다. 그것은 보다 인간화된 즉 인간의 본성과 밀접한 것이어야 한다. 공동체 내에서 부끄러움과 떳떳함에 대한 판단을 일치시켜 의사소통을 속도를 극적으로 높이는 것이어야 한다.

평론가는 객관으로 설명하지만 작가는 주관으로 그려내고 관객은 직관으로 받아들인다. 비틀즈의 노래처럼 고흐의 그림처럼 추사의 안목처럼 새로운 시대의 삶의 양식을 끌어내는 직관의 소통이 진짜다.

내가 부끄러워하는 지점에서 당신도 부끄러워함이 직관이다. 내가 떳떳함을 느끼는 지점에서 당신도 떳떳함을 느끼게 하는 것, 그러므로 서로 통하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술의 전부다. 통하지 않고는 사랑할 수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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