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란 무엇인가?
역학은 질서를 추구하고 미학은 가치를 추구한다. 가치란 무엇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끌림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끌리고 남자는 여자에게 끌린다.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 있다. 유혹하고 충동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완전과 불완전 사이,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 여자와 남자 사이에 있다. 그것은 언제나 사이에 있다.
어떤 것이 마음을 끄는가? 더 나은 것이다. 어떤 것이 나은가? 진위 중에는 진(眞)이 낫고, 선악 중에는 선(善)이 낫고, 미추 중에는 미(美)가 낫고, 주종(主從) 중에서는 주(主)가 낫고, 성속(聖俗) 중에는 성(聖)이 낫다.
왜 그것이 나은가? 진이 만나게 하고, 선이 나아가게 하고, 미가 어울리게 하고, 주가 그 주체성으로 통제하게 하고, 성이 비로소 소통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더 완전에 가깝기 때문이다.
진과 선과 미와 주와 성이 인간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유혹한다. 충동질한다. 매력이 있다. 사람을 홀린다. 동기를 부여한다. 선택하게 한다. 진, 선, 미, 주, 성은 정보의 집적도다. 존재의 밀도가 있다.
● 가치는 선택이다.≫ 선택하게 하는 것은 끌림이다.≫ 끌림은 불완전과 완전 사이에 있다.≫ 그것은 진, 선, 미, 주, 성이다.≫ 곧 만나기, 맞물리기, 맞서기, 하나되기, 열어가기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완전해 지고자 한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이 인간을 끌어당긴다.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서로 끌어당긴다. 인간에게 부족한 것은 진, 선, 미, 주, 성이다.
진-만남이 부족하고, 선-맞물림이 부족하고, 미-맞섬이 부족하고, 주-하나됨이 부족하고, 성-열어감이 부족하다. 마침내 그것을 얻어 내 안에 가득 채웠을 때 인간은 완전해진다. 비로소 소통할 수 있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일단 만나야 한다. 만나서 정밀하게 맞물려야 한다. 독립적으로 맞서야 하고 마침내 하나 되어야 한다. 한 사람과 사랑하더라도 그러하고 하나의 공동체에 참여하더라도 그러하다.
한 사람을 사랑하되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진과 선과 미와 주와 성을 끌어내지 못하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 사랑이 겉돌지 않고 톱니바퀴처럼 단단히 맞물려 들어가게 하는 것, 진짜이게 하는 것, 그것이 가치다.
가치란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진입하는 과정,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나아가는 과정, 단절에서 소통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질적인 심화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과 보다 정밀하게 맞물리는 것이다.
● 가치 있는 것 - 상대방과 정밀하게 맞물려 들어가는 것. ≫ 가치 없는 것 - 따로 떨어져나와 밀려나고 버려지는 것.
인간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7살 소년은 친구를 선택해야 하고 스무 살 청년은 직업을 선택해야 하고 서른 살 처녀는 배우자를 선택해야 한다. 사회의 중심부로 진입하여 갈수록 선택의 정밀도는 높아진다.
한 인간의 실존적 가치는 인류의 집단지능과 교감하는 소통의 밀도에 비례한다. 한 개인이 한 가족, 한 국가, 하나의 세계, 그리고 우주적 존재로 나아가며 소통의 밀도를 높여가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 인간의 가치는 상승한다.
가치는 불완전한 것을 완성시키고, 내면에 감추어진 가능성을 끌어내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고,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진입하게 한다. 그 대상과 더 밀접하게 맞물려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나의 전부로 너의 전부를 만나기다. 너의 표피를 넘어 너의 진실과 만나기다. 나의 근원으로 너의 근원과 대면하게 하는 것이다. 너의 진과, 너의 선과, 너의 미와, 너의 주와, 너의 성과 대면하게 하는 것이다.
###
어원으로 풀어볼 수 있다. value(가치)는 바람이 불다blow, 바람에 의해 거품이 부풀다bubble, 바람(생기)이 들어가서 팔팔하다vivid, 바람이 빵빵하다valid는 뜻이다. 왜 팔팔할까? 살아있기 때문이다.
가치는 살아있는 것, 생기 있는 것, 팔팔한 것을 의미했다. 우리말로는 ‘값’이다. 죽은 것보다 살아있는 것이 더 좋은 값을 받았던 것이다. 가치는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 그러므로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good’의 어원은 ‘가득’이다. 텅 빈 것보다는 가득한 것이 나은 값을 받았다. 더 나은 값을 받게 하는 것이 선택된다. 아니면 버려진다. 그러므로 가치는 버려지지 않고 선택되게 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더 높고, 더 좋고, 더 아름답고, 더 자유롭고, 더 새로운 것이다. 인간은 언제라도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왜 가치를 추구하는가? 가치가 더 심(心)에 가깝기 때문이다.
심은 이심전심의 심이다. 이심전심은 소통이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심이 있어야 한다. 심(心)은 ‘마음이 아니라’ 중심이고 핵심이다. 변재(邊材)가 아닌 심재(心材)다. 연필심이나 볼펜심과도 같다.
무엇인가? 심은 속에 들어차 있는 것을 의미한다. 붕어빵은 팥소가 심이다. 팥죽은 새알심이 심이다. 인간은 마음이 심이고 학자는 지식이 심이고 지성인은 이성이 심이다. 속에 빵빵하게 들어찬 것이 심이다.
심(心)을 인간의 변덕스런 마음이나 정서로 풀면 잘못이다. 이심전심은 이 마음에서 저 마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중심에서 저 중심으로 가는 것이다. 만약 중심이 없다면, 속에 들어찬 것이 없다면 이심전심은 실패다.
가치(value)있는 것은 팔팔한 것이다. 팔팔한 것은? 울림과 떨림에 공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반응하는 것이다. 호응하는 것이다. 응답하는 것이다. 독립하여 자유로운 것만이 반응한다.
속에 심이 들어찬 것이 반응한다. 속이 빈 것은 반응하지 않는다. 내면에 굳은 심지가 있는 것이 인간의 부름에 응답한다. 존재의 심지는 무엇인가? 생명이다. 생명은 반응한다. 무생물은 반응하지 않는다.
양초의 심지에 불을 댕긴다. 생명의 불꽃이 환하게 빛을 낸다. 울림과 떨림이 그 안에 있다. 생명이 있다. 반응이 있다. 응답함이 있다. 팔팔하게 살아있다. 스위치를 켜면 곧 불이 들어온다.
미인이 나를 향해 미소 지을 때 내 심장은 뛴다. 서로는 마주본다. 그리고 반응한다. 불꽃이 튄다. 한 떨기 꽃의 미소에는 벌과 나비가 반응하고 찬란한 태양의 미소에는 초목의 잎새가 반응한다.
산 것은 반응한다. 살아있는 강아지는 나의 부름에 응답한다. 나를 향해 꼬리를 흔든다. 죽은 석상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인간은 언제라도 죽은 것을 멀리하고 산 것을 추구한다. 산 것이 나의 의도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반응하는가? 진위(眞僞) 중에 진, 선악(善惡) 중에 선, 미추(美醜) 중에 미, 주종(主從) 중에 주, 성속(聖俗) 중에 성이 반응한다. 그것이 더 가치 있다.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바로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
###
성(聖)은 산의 정상처럼 스스로를 뾰족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내부에 감추어진 심의 존재를 드러낸다. 심이 있어서 공명하고 심이 있어서 응답한다. 성(聖)은 진과 선과 미와 주를 그 안에 품고 있다.
속(俗)된 것은 무리들 속에 묻혀 흘러간다. 속된 자는 부름에 응답할 수 없다. 속물은 진리의 부름에 응답할 수 없고 역사의 부름에도 응답할 수 없다. 그 안에 진과 선과 미와 주를 품지 않기 때문에 응답이 없는 것이다.
무엇이 성(聖)인가? 그러므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소통할 수 있다면 성스럽다. 그대의 부름에 응답한다면 성스럽다. 그대의 기도에 신(神)이 응답한다면 성스럽다. 그대의 부름에 강아지가 응답해도 성스럽다.
진과 선과 미와 주는 성으로 가는 정거장들이다. 위(僞)는 응답하지 않는다. 악(惡)은 응답하지 않는다. 추(醜)도 응답하지 않는다. 종(從)도 응답하지 않는다. 오직 진을 품은 선, 선을 품은 미, 미를 품은 주만 응답한다.
그대의 눈빛에 응답하고 그대의 희망에 응답한다. 그대의 기도에 응답하고 그대의 바램에 응답하고 그대의 간절함에 응답한다. 그러므로 소통할 수 있다. 모든 소통하는 것은 성스러운 것이다.
한 그릇의 밥을 먹는다면 혀가 단맛에 반응한다. 그것은 가치가 있다. 모래를 씹는다면? 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가치가 없다. 한 곡의 음악을 들어도 그러하고 한 폭의 그림을 보아도 그러하다.
내 심장을 뛰게 하는 것, 내 몸에서 아드레날린과 엔돌핀이 솟구치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반응하고 호응하는 것이며 모든 반응하는 것은 속에 진과 선과 미와 주와 성이라는 심지를 감추고 있다. 원자 핵처럼 있다.
사람이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머리가 있기 때문이다. 인체에서는 머리가 심(心)이다. 정치는 권력이 심이고 생물은 호흡이 심이다. 만남과 맞물림과 맞섬과 하나됨과 열어감을 주관하는 센터가 있다.
삶은 사랑이 심이다. 학문은 깨달음이 심이다. 존재는 자유가 심이다. 역사는 진보가 심이다. 세상은 문명이 심이다. 진보는 이상주의가 심이다. 공동체는 소통이 심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심을 가졌는가? 그대의 센터는 무엇인가?
###
존재는 진(眞), 선(善), 미(美), 주(主), 성(聖)이라는 다섯 가지 심지로 반응하다. 그것은 존재가 바깥세상을 향해 내민 촉수들이다. 각각 만남과 맞물림과 맞섬과 하나됨과 열어감의 손길을 내민다. 그리고 유혹한다.
그림그리기에 비유할 수 있다. 어린이는 진(眞)을 선택한다. 1학년 어린이의 그림에서는 손을 그리되 손가락이 다섯이라는 사실을 애써 나타내려고 한다. 사람을 그리되 인체해부도처럼 그리는 것이다.
하늘을 그릴 때는 반드시 해를 그려 넣는다. 해가 있어야 땅이 아닌 하늘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니까. 자신이 무엇을 그렸는지를 표시하여 알리려는 것이다. 어린이의 그림은 점차 기록으로 변한다. 이집트의 고분벽화처럼.
그것이 진(眞)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눈과 코와 귀와 입을 해부학적으로 배치하여 그것이 진짜 사람이라는 증거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럴수록 부분과 부분들 사이의 맞물림이 어긋난다. 그만 어색해지고 만다.
중학생은 선(善)을 선택한다. 선(善)은 부분과 부분들을 매끄럽게 연결하기다. 눈은 정면이 그리기 쉽고 코는 측면을 그리기 쉽다. 그 부분과 부분이 하나의 시점으로 통일되어야 부드럽게 맞물린다.
고교생은 균형을 선택한다. 균형은 맞섬이다. 맞섬이 미(美)다. 좌우와 상하와 소실점과 명암과 채도가 균형에 맞아야 하고 구도가 맞아야 한다. 음과 양의 밸런스, 동(動)과 정(靜)의 밸런스에서 미가 얻어진다.
화가는 주제를 선택한다. 주제는 주(主)다. 주제가 부분과 부분을 묶어 전체를 하나의 메시지 아래 통일시킨다. 그림이 주제를 실을 때 자유를 얻고 자유를 얻을 때 비로소 그림은 그려지는 대상으로부터 독립한다.
화가의 작품은 주제를 얻을 때 모델과 닮았는지의 사실성 여부에서 해방된다. 중학생의 그림은 주제가 불분명하므로 모델과 닮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화가의 작품은 굳이 모델을 닮을 필요가 없다. 주제를 태웠기 때문이다.
주제를 태웠을 때 그림 속의 모든 구성요소들이 한 줄에 꿰어진다. 그러한 성취에서 그림은 물감과 캔버스와 모델로부터 독립하여 온전한 자유를 얻는다. 주체성을 획득한다. 그 자유로 하여 그림은 관객과 만난다.
진정한 대가는 스타일을 선택한다. 스타일이 성(聖)이다. 스타일은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그림이 캔버스 안에 갇혀있지 아니하고 관객과 캔버스 사이에 선다. 무대와 관객 사이에 선다. 그 순간 그림은 주제를 초월한다.
● 주제-그림 속의 구성소들을 한 줄에 꿰어낸다. ≫ 스타일-작가와 그림과 관객과 무대를 한 줄에 꿰어낸다. 요는 전부 한 줄에 꿰어낼 수 있느냐다. 주제는 그림 안에서 그림 속에 배치된 구성소들을 한 줄에 꿰어낼 뿐이다. 스타일은 그림 밖으로 나와서 관객의 마음과 작가의 마음까지 전부 한 줄에 꿰어낸다. 이게 진짜다.
진정한 작품은 작가의 작의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다. 관객이 그림을 자유로이 해석하기다. 주제는 감추어질수록 좋다. 관객은 작가의 스타일을 응용하여 관객 자신이 추구하는 바에 따라 상상의 나래를 편다.
그림이 작가의 의도에 갇히지 않고 관객과의 소통에 의해 새로이 재창조되는 것이다. 진정한 작품은 그러하다. 그림 속에 성(聖)이 있다. 소통이 있다. 응답함이 있다. 그럴 때 빛난다. 모든 완성된 것은 그러하다.
###
미학이란 전부 한 줄에 꿰어내게 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수단으로 꿸 수 있다. 소재, 줄거리, 구성, 주제, 스타일이다. 가치란 이 다섯 중에서 더 높은 수준의 수단을 사용하여 요소들이 긴밀하게 맞물리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 진-소재 ≫ 선-줄거리 ≫ 미-구성 ≫ 주-주제 ≫ 성-스타일.
소재는 허구가 아니라 진실에 가까울수록 가치 있다. 진실이어야 꿰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이야기가 정교하게 맞물려 들어갈수록 가치 있다. 설사 소재가 허구라 해도 줄거리의 긴밀함으로 꿰어낼 수 있다.
구성은 이야기 속의 대립되는 요소들을 밸런스에 맞게 배치할수록 가치가 있다. 설사 줄거리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해도 플롯의 절묘한 배치에 의해 만회될 수 있다. 역시 꿰어낼 수 있다.
주제는 이야기 속의 모든 사건들이 하나의 결론을 바라보도록 방향성을 부여한다. 이야기의 전개가 산만하지 않고 하나의 명백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수준이 높을수록 작품성이 뛰어나다.
스타일은 이야기 밖으로 나와서 작가와 관객을 꿰어낸다. 작품 안에서 사건들을 꿰어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밖에서 담론을 꿰어낸다. 작가와 평단과 작품과 관객과 시장을 꿰어내기다. 비로소 소통된다. 스타일이 진짜다.
고전적 아카데미즘은 주제가 강조된다. 주제는 그리스 신화의 방대한 이야기를 결정적인 장면 하나로 압축한다. 그림은 한 컷이지만 그 안에는 몇 시간 분량의 장대한 스토리가 숨어 있다. 그 압축률이 높을수록 가치가 높다.
무엇을 압축할 것인가이다. 인상주의는 작품성의 판단기준이 다르다. 그리스 신화의 방대한 서사를 굳이 한 컷의 그림으로 압축하여 집어넣을 필요가 없다. 대신 색과 빛과 형태를 집어넣는다. 작가의 마음까지도 담아낸다.
최고의 미는 최고의 압축률을 자랑하는 것이다. 최고의 미인은 겉모습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마음과 교양과 표정과 인격까지 전부 한 줄에 꿰어져 있어서 누구나 편하게 다가가서 말을 걸고 싶게 하는 사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