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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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810 vote 0 2008.12.30 (23:07:01)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터이다. 기본적인 것은 무엇일까? 기본(基本)이 가장 기본적이다. 기본이란 무엇인가? 대지와 인간의 접촉점이다. 그 접점이 튼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기본은 무엇일까? 사랑이다. 사랑을 통하여 인간은 타인과 접촉한다. 그렇지 않은가? 지식의 기본은 무엇일까? 언어다. 언어를 통하여 우리는 세계를 이해한다. 어떤 영역이든 반드시 접촉점이 있다. 그것이 기본이다.

기본이 되어야 한다. 접촉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 네티즌은 랜으로 접속한다. PC가 없고 랜이 없다면 군인이 총을 들지 않은 것처럼, 시험을 보는 학생이 연필을 준비하지 않은 것처럼 기본이 되지 않은 것이다.

목수의 기본은 무엇일까? 규구(規矩)다. 규구를 이용하여 목수는 건물과 접촉한다. 그렇다. 기본은 무언가 외부와 접촉하게 하는 것이다. 떨어져 있는 둘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것은 무엇인가? 만남이다. 춘향전은 춘향과 몽룡의 만남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목수는 규구를 통하여 건물과 만나고 인간은 사랑을 통하여 타인과 만나고 네티즌은 접속을 통하여 사이버 세계와 만난다.

규구(規矩)는 컴퍼스와 곱자(norm)다. norm에서 normal이 나왔다. 규구(規矩)에서 규칙이나 규격이나 규율이나 규범이나 다 나왔다. 규(規)는 컴퍼스다. 컴퍼스는 하나의 중심점을 기준으로 동그랗게 묶어버린다.

땅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 그어진 금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이 곧 규칙이고 normal이다. 국어사전은 다르게 말한다. ‘행동하거나 판단할 때에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할 가치판단의 기준’이다.

● 노예 : 마땅히 지켜야 할 가치판단 기준 ≫ 주인 : 그어놓은 금 밖으로 나가지 마라.

느낌이 다르다. 국어사전의 풀이는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죽은 언어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이 묘사하고 있는 디스토피아를 연상하게 한다. 본래의 호흡을 되살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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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컵의 물을 보고 ‘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사람이고 ‘반 컵이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래에서 위로 우러러보는 사람이다. 보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진다.

컵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컵이라는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는 것이다. 컵이라는 잣대로 자기 자신을 재고 있다. 컵에 대하여 말하는 척 실제로는 아상(我相)에 사로잡혀 자기의 결핍을 호소한다.

어떤 위치에서 바라볼 것이냐가 중요하다. 주인의 관점에서 규범은 ‘금 밖으로 나가지 마라’는 뜻이고 노예의 관점에서 보면 ‘마땅히 지켜야 할 기준’이다. 국어사전은 노예의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다.

‘금 밖으로 나가지 마라’는 것이 규범이다. 머리카락 길이를 5센티로 제한하는 교칙이 있다면 5센티 기준으로 금을 딱 그어놓고 금 밖으로 나가지 마라는 거다. 이러한 본질을 안다면 단박에 의문이 든다.

그런데 왜 6센티면 안되고 딱 5센티여야 하는 거지? 이렇게 의문을 가지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을 모르고 규범을 마땅히 지켜야 할 기준으로 여긴다면 어떨까? 의문을 갖지 못하므로 저항할 수도 없다.

조지 오웰의 ‘1984년’에서는 단어 줄이기 방법을 쓴다. 영국 사회주의(England Socialism)는 영사(INGSOC)로 줄여진다. 이런 식으로 언어는 점차 암호가 되고 기호가 된다. 본래의 의미를 잊어버린다.

오염된 언어가 인간을 병들게 한다. 근본을 잊고 본질을 잊어서 비판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 한국어는 한자어에 오염되고, 영어에 오염되고, 지식인의 계급어에 의하여 변개된 결과 1984년의 newspeak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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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알아야 한다. 접점이 본질이다. 모든 존재는 무언가 접촉함으로써 시작된다. 반드시 접촉점이 있다. 그것은 만남이다. 만남으로써 이야기는 촉발된다. 만나지 않고 가능한 것은 없다.

접촉점이 있어야 한다. 접점이야말로 모든 존재의 기본이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곧 접촉점을 안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안다는 것은 운전자가 자동차와 접촉하는 지점을 안다는 것이다.

자동차에는 계기판과 핸들과 기어와 브레이크와 클러치가 접촉점이다. 접촉점을 통하여 운전자는 자동차를 장악하고 통제한다. 인간은 눈과 귀와 코와 입과 손으로 사물과 접촉한다. 인간의 인식은 접촉으로부터 촉발된다.

씨앗은 대지와 접촉하여 싹을 틔운다. 나무는 자라도 뿌리는 여전히 대지와의 접촉을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뿌리를 아는 것이 기본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명의 뿌리는 무엇인가?

역사가 문명의 뿌리다. 역사를 알아야 인간이 21세기 이 문명을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 역사를 안다는 것은 곧 접점을 안다는 것이다. 환경과 인간이 만나서 악수하는 지점을 안다는 것이다.

처음 인간이 자연과 접촉하였던 그 지점은 어디인가? 그것은 원시의 삶이다. 그것은 부족민의 삶이다. 자연으로 돌아가서 본래의 야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초의 접촉점이기 때문이다.

규구준승(規矩準繩)이라 했다. 컴퍼스와 곱자(norm)와 수준기와 먹줄이다. 먹줄은 점에서 선에 이르고, 곱자는 선에서 각에 이르고, 컴퍼스는 각에서 입체에 이르고 수준기는 입체에서 공간에 도달한다.

규구준승은 건물과 인간의 접점을 찾는다. 접점은 점과 선과 각과 입체다. 한 채의 건물은 벽돌과 벽돌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규구준승이 점과 선과 각과 입체를 조직하여 공간에 도달함으로 이루어진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다. 접점을 알면 관계가 보인다. 관계를 알고 사이를 알면 세상을 바라보는 격이 달라진다. 건축가는 벽돌을 쌓거나 나무를 깎고 돌을 쪼는 사람이 아니라 공간을 조직하는 사람이다.

만약 나무를 짜서 집을 짓는다고 여긴다면 목수의 상징은 망치와 대패여야 한다. 고대인은 왜 망치와 대패가 아닌 규구준승으로 목수의 상징을 삼았을까? 구상의 건축인가 추상의 건축인가다. 고대인도 추상을 알았던 것이다.

자동차를 안다는 것은 엔진과 기어의 결합을 아는 것이 아니라 토크와 마력의 상호관계를 아는 것이다. 건물이 공간을 조직함으로써 이루어진다면 자동차는 운동을 조직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 자동차가 엔진과 기어로 조직된다고 믿는 자는 기껏 운전수가 될 수 있을 뿐이다. 힘과 운동의 상호관계로 조직된다고 바로 아는 이가 엔지니어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관념과는 다른 더 높은 시선이 존재한다. 규범이 마땅히 지켜야 할 기준이라고 믿는 자에게는 건물이 벽돌의 집합으로 보이고 자동차가 엔진과 기어의 결합으로 보인다. 길들여진 노예의 시선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답을 찾는다. 실패한다. 구상을 넘어 추상에 도달해야 진실이 드러난다. 노예가 아닌 주인의 시선을 얻어야 한다. 접촉점을 보고 관계를 보아야 한다. 고대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뛰어난 연기자는 표정을 잘 짓는 사람이 아니라 그 무대를 장악하고 공간을 휘저을 수 있는 사람이다. 연기자가 얼굴을 찡그리거나 입을 헤벌려서 연기한다고 믿는다면 그 연기자는 성공하지 못한다.

연기자는 제 얼굴의 살갗을 움직여서 절묘한 표정을 끌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관객과의 소통을 끌어내는 사람이다. 무대와 객석과의 거리는 10미터다. 그 10미터라는 공간을 장악하고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피아니스트는 건반을 때리는 사람이 아니라 음(音) 하나하나를 조각하는 사람이다. 음은 현에서 울려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조립되고 건축된다. 음은 공간에서 자란다. 점에서 선으로 면으로 입체로 성장한다.

관광객은 관광지에 모여든다. 그들은 탑을 등지고 사진을 찍는다. 순례자는 지구라는 캔버스 위에 자기 발자국으로 그림을 그린다. 관광객이 노예의 마음으로 길을 떠난다면 순례자는 주인의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다.

동일한 하나의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가이다. 노예의 마음으로 볼 것인가 주인의 마음으로 볼 것인가? 먼저 자유인의 시선을 얻어야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

과학은 도시에 있고 미학은 시골에 있다. 시골사람의 기백을 얻지 못하면, 부족민의 야성을 잃으면, 자유인의 시선을 얻지 못하면 진정한 가치에 도달할 수 없다. 시골사람의 시선으로 보면 전혀 다른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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