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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893 vote 0 2015.08.24 (00:17:54)

     

    세상은 구조로 되어 있다. 구조는 의사결정원리다. 하나의 존재는 다섯차례의 의사결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라는 다섯차례 의사결정이 하나의 사건을 이룬다.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양은 침투한다. 자연은 이 방법으로 자기 존재를 연출한다.


    인간에게는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존재’로 인식된다. 에너지는 연결하고, 물질은 균일하고, 공간은 대칭하고, 시간은 질서하고, 존재는 반응한다. 인간은 그 최종적인 반응을 인식한다. 사건은 에너지의 원인측에서 존재의 결과측으로 진행하며 인간의 인식은 결과측 반응을 취하고 그 이전단계는 추론된다.


    자연이 있고 인간이 있다. 자연은 존재하고 인간은 인식한다.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존재’는 자연의 존재절차다. 존재는 시공간적인 사건이며, 사건의 연출과정이 이러하다. 인간의 과학은 존재를 근거로 삼는다. 존재는 반응이다. 인간이 대상을 툭 건드려봐서 어떤 반응이 있으면 거기에 무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연출된 허상이다. 인간은 속는다. 반응하기 이전에 이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하나 허무하다. 객석의 관객이 스크린을 쳐다보고 하는 말일 뿐, 등 뒤에서 돌아가는 영사기를 알아보고 하는 말은 아니다. 이면에서 작동하는 진짜를 봐야 한다. 모름지기 깨달을 일이다.


    깨달음은 각별하다. 지나간 사건의 결과를 보고 추론하여 원인을 되짚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의 진행과정을 따라가며 그 과정을 복제한다. 자연이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 지켜보면서 이를 똑 같이 따라한다. 자연은 플랫폼을 쓴다. 깨달음은 자연의 플랫폼을 빌린다. 자연이 내 안에서 일하게 한다.


    지게차는 팔레트를 쓴다. 루트라고도 할 수 있다. 거쳐가는 경로다. 인터넷은 네트워크를 쓰고, 기차는 철길을 쓰고, 자동차는 도로를 쓰고, 웨이터는 쟁반을 쓰고, 인간은 언어를 쓴다. 자연의 플랫폼은 구조다. 구조는 에너지가 진행하는 경로다. 다섯 단계의 연속적인 의사결정이 모여 하나의 사건 단위를 이룬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존재라 하여 모든 사유의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존재 이전에 이미 많은 것들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그 존재 이전단계의 경로를 도교에서 도道라거나, 불교에서 법法이라거나, 유교에서 성性이라거나 하는 식의 여러 개념으로 표현해왔다. 그런데 경로는 항상 송신측과 수신측이 있다.


    원인측이 있고 결과측이 있다. 한 단어로 나타내는 것은 이상하고 두 단어로 나타내야 떳떳하다. 도교는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고 한다. 도道라고 할 수 있지만 좀 이상하고 뭔가 하나 더 있다는 뜻이다. 명名은 존재다. 도道는 존재 이전이다. 벌써 짝이 지어졌다. 뭔가 하나가 더 있으므로 짝이 필요하다.


    route는 원래 쌍으로 작동한다. 불교에서는 법法 한 글자로 나타내려니 이상해서 색즉시공이라 한다. 색色과 공空으로 짝을 지으니 route의 느낌이 와준다. route는 원래 쌍방향이니 공즉시색으로 균형을 맞춰준다. 유교 역시 성性 한 글자로 나타내려니 어색하다. 리理를 추가하여 성리학으로 가도 뭔가 조금 이상하다.


    성性을 해부하여 이기理氣 이원론으로 짝을 지으니 맞춤하다. 주역에는 쓰던 음양陰陽 개념과도 통한다. 역易은 변화다. 에너지 개념과 맥락이 통한다. 에너지는 운동한다. 음양으로 전개한다. 뭔가 그림이 맞아준다. 서양에는 카오스와 코스모스 개념이 있다. 역시 대칭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둘의 쌍은 이상하다.


    도道나 법法이나 성性이나 리理나 한 단어로 말하면 사건의 성질을 나타낼 수 없고 두 단어로 짝지어 말하면 팔레트의 보편성과 어긋난다. 일원론과 이원론 사이에 고민이 있다. 지게차가 쓰는 팔레트는 하나이나 그 화물을 주고받는 송신측과 수신측은 둘이다. 무엇인가? 둘인데 둘이면 복제되지 않는다. 쓸모가 없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는 항상 둘의 대칭 쌍이 요구된다. 선과 악이라든가 질서와 무질서라든가 승리와 패배라든가 빛과 어둠이라든가 귀족과 평민이라든가 둘로 짝지어 구분해야 뭔가 답이 나와준다. 그러나 실제로 인류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은 복제다. 선이 악을 치든, 질서가 무질서를 치든, 답이 나오면 복제한다.


    2차대전에 누가 이겼는가? 누가 이겼든 승리자의 시스템을 복제한다. 만약 독일이 이겼다면 나치즘을 복제했을 것이고, 일본이 이겼다면 나라마다 덴노를 세웠을 것이고, 미국이 이겼다면 미국식 정당정치를 복제했을 것이다. 그대로 되었다. 지구의 반은 승리한 소련팔레트를 가져갔고 반은 미국팔레트를 가져갔다.


    선악개념이든 음양개념이든 여야개념이든 어떤 둘로 짝지워진 대칭은 결론을 내리기 위한 절차일 뿐이고 결론이 나오면 인간들은 팔레트를 복제한다. 곳곳에 플랫폼을 설치한다. 무엇인가? 진리는 반드시 일원론으로 돌아간다. 대칭의 이원론 쌍은 의사결정과정의 도구일 뿐이고 실제 인간의 목적인 결론의 무한복제다.


    결국 이원론적인 차별개념, 대칭개념은 반장이 답을 알아내는 과정에 쓰이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며 반장이 답을 반원들에게 알려주면 모두 컨닝을 하는 것이다. 모든 차별과 구분과 대립은 답을 찾아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실제로 인간은 월드컵 우승팀이 내놓은 하나의 정답을 찾아 이를 포드시스템으로 복제한다.


    티키타카가 뜨면 이를 복제하려는 심산이며 독일식 토털사커가 뜨면 또 그것을 복제하려는 것이다. 복제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2원론의 대칭을 구사하나 결론이 나오면 모두 우승팀의 방법을 자국 대표팀에 이식하고자 한다. 구조론의 결론은 일원론이다. 단 그것은 복제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1 속에 2 있다.


    1은 씨앗이며 2는 전개다. 하나의 씨앗을 에너지로 때리면 뿌리와 줄기 2로 펼쳐진다. 구체적으로는 5다.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과 열매다. 이 다섯은 차례차례로 펼쳐진다. 뿌리에서 줄기, 줄기에서 가지, 가지에서 잎, 잎에서 열매의 전개는 2로 보여진다. 그러나 2는 과정이며 의사결정을 계속하여 최종 5로 완결된다.


    세상은 주고받기로 되어 있다. 주기와 받기 2다. route 1로 나타내야 한다. 축구를 해도 공을 주고받고, 바둑을 해도 승부를 주고받는다. 그러나 시합은 1이다. 여기에 공간과 시간이 들어가서 합이 다섯이 된다. 무엇이든 주고받으려면 공간과 시간이 지정되어야 한다. 시합≫주기≫공간≫시간≫받기로 한 사이클이다.


    그것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사건이다. 사건은 존재다. 에너지는 배후에서 작동하는 본래의 모습이며 사건은 자연의 모습이고 존재는 인간의 인식이다. 인간은 최종적인 존재를 인식한다. 인간이 인식했다면 이미 다섯 단계를 거쳤다. 만약 무언가 보았다면 빛이 사물을 통과하고 시공간을 지정하여 인간의 뇌에 새긴다.


    인간이 인식한 존재는 뇌에 새겨진 그림이다. 인간이 본 것에서 추론을 시작하면 이미 늦었다. 대칭의 쌍이 움직이면 상대성이 적용되어 헷갈리고 만다. 그 운동하는 쌍을 보지말고 배후의 팔레트를 보라. 웨이터가 가져오는 포도주와 잔을 보지 말고 그것들을 받치고 있는 쟁반을 보라. 그것은 언제나 1이다. 통제된다.


    포도주와 잔은 2다. 통제되지 않는다. 쟁반은 1이다. 통제된다. 인간이 무언가 실속있는 일을 하려면 언제나 선악으로 나뉘기 전의, 여야로 나뉘기 전의, 승패로 나뉘기 전의, 남녀로 나뉘기 전의 1을 보아야 한다. 그 1을 챙겨야 한다. 그것을 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속있기 때문이다. 만약 2를 취하면 실패다.


    당신은 분해되고 만다. 승자나 패자로, 혹은 선이나 악으로, 혹은 강자나 약자로 나눠져 시달리게 된다. 당신은 승자가 되어 만족하지만 실속은 경마의 승자인 당신이 아니라 마사회가 챙겨간다. 당신이 도박판에서 한 번 돈을 따고 득의양양하지만 현찰은 하우스의 꼬장이 가져간다. 돈은 당신의 손을 거쳐갈 뿐이다.


    당신은 승리자가 아니라 하우스장이 돈을 가져가는 route로 이용되고 있다. 당신이 팔레트가 되어 있다. 지게차가 와서 실어간다. 당신에겐 쓸쓸한 개평이 주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깨달아야 한다. 이기는 자는 지는 자이다. 지는 자도 지는 자다. 오직 복제하는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 당신은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DSC01488.JPG


    스티브 잡스는 자연을 복제하고 건희는 잡스를 복제합니다. 어떤 조직이나 집단이든 정점에 쓴 자는 자연을 복제합니다. 복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을 진리라고 합니다. 진리가 좋은 이유는 아무리 복제해 가도 뒷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제할 수 있을 때 까지 알아도 아직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깨달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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