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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2]이상우
read 3253 vote 0 2017.03.20 (22:13:03)

<우리반 부모님께 드리는 글>

아이의 말,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요?
이것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까요?
도대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만약 바닥에 떼어쓰는 붙임딱지를 다 쓰고 난 뒤, 수학책 뒷편에 붙임딱지비닐 종이를 제가 집에 가서 버리라고 하면 몇 명이나 버릴까요? 한 21~22명 정도는 버리고 7~8명 정도는 바닥에 버리거나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어쩌면 버린게 아니라 바닥에 떨어뜨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아이 옆에 붙임딱지 비닐종이가 떨어져 있길래, '이거 네 것이니?'라고 물으면 아이는 망설임 없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 번 네 꺼 있나 찾아봐'라고 해도 찾을 생각 안합니다. 다시 찾아보라고 얘기하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변명합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주은 비닐 종이에 비어있는 별모양 붙임딱지 숫자와 아이가 교과서에 붙인 붙임딱지 숫자가 딱 일치합니다. 아이는 그래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너 거짓말 하냐!'라고 윽박지르면 아이가 눈물을 터뜨렸을 것입니다. 그냥 아이에게 잘 챙기라고 주고 말았습니다. 아이는 아마 제가 글을 쓰는 지금도 '선생님이 준 종이는 내 것이 아니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일은 제게 매우 자주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뭐가 떨어져 있어서 애들에게 물어봤는데 아무도 없으면 제가 처리하고 맙니다. 자칫 아이를 정직하지 못한 아이로 몰아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학년 아이는 자기 기억도 불분명하고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지 못하고, 사실과 자기 욕구도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친구가 무슨 자랑을 하면 자기도 금새 없는 얘기를 만들어서 자랑합니다. 그걸 보고 '넌 거짓말장이야'라고 하기엔 아이들의 발달수준이 이에 미치지 못합니다.

물론 명백히 드러나는 거짓말인 경우는 제가 대화로 해결합니다. 거짓말 했다고 혼쭐을 내지 않습니다. 거짓말했다고 세게 혼내면 앞으로 거짓말을 안하는게 아니라 혼날까봐 더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우선은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의 두려운 마음을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리고 나서 거짓말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어떤 피해를 받는지 알려줍니다. 거짓말을 하는 자신에게도 피해가 미칠 수 있음을 얘기해 줍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이에게 더 이익이 됨을 얘기합니다. 아이가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이론적으로는 이렇지만 거짓말에 관련된 대화는 중간에 끊기게 마련입니다. 아이가 당황해서 울음을 터뜨리기 때문입니다. 12일간 아이와 생활하면서 어떤 이유건 아이가 울음을 터트린 아이가 10명은 넘습니다. 자기가 잘못도 안했다고 생각하는데 친구가 일러서 울고, 친구가 같이 안놀아줘서 울고, 뭘 물어봤는데 대답 못해서 울고...

"우유 안먹은 사람 우유 먹어라"고 하면 몇 명이나 우유를 안먹을까요. 어제 그제는 우유를 잘 먹더니 오늘은 우유가 3개 남았습니다. 안먹은 사람 손들으라고 하면 손들을까요? 손안듭니다. 우유 안먹었다고 제가 혼내는 것도 아닌데 손을 안듭니다. 주위의 시선과 심리적 부담때문에 잘 나오지 않습니다.
점심시간에 한 아이가 밥먹다가 '선생님 바나나가 없어졌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제가 잘 찾아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는 분명 없어졌다고 합니다. 하긴 누가 가져갔다고 하지 않는게 다행입니다. 심증상으로는 아이가 바나나를 받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 생각에는 분명 자신은 바나나를 받았고 바나나는 없어진 겁니다. 아이의 머릿 속 진실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변 아이들 얘기는 바나나를 못봤다는 겁니다. 그럼 진실은 뭘까요? 사실 바나나를 못봤다는 애들 얘기도 좀처럼 믿기 힘듭니다. 애들은 자기 밥먹을 때 남에게 관심없습니다. 그리고 기억도 오락가락 합니다.

제가 왜 이렇게 길게 비슷한 얘기를 하는 것일까요? 짐작하신 분들은 있을 것입니다. 아이가 집에 가서 어떤 얘기를 했을 때 그 말을 다 믿지는 마시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아이 말을 의심하고 비난하지도 마시라는 겁니다. 아이가 하는 얘기를 들어주시고 웬만하면 대화로 푸시고, 지나치게 걱정이 되시면 제가 연락 주시면 됩니다.

지난 주에도 한 친구가 자신을 괴롭혀서 학교 가기 싫어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유심히 두 아이를 살펴 보았습니다. 결론은 약간의 다툼은 분명 있고, 한 친구가 약간 그 친구를 건드리는 것은 맞지만, 반대편 아이는 당당하게 그 아이에게 맞서고 자기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잠깐 일어나는 일이고 학교에서 발표도 잘하고 제게 얘기도 잘하고 밥도 잘먹으면서 학교생활을 즐겁게 합니다.

그럼 아이가 왜 그런 말을 할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친구와의 불편한 점을 학교 가기 싫다는 말로 표현한 겁니다. 학교가 싫은게 아니라 친구와 다투는 게 불편하다는 것을 강조한 거죠. 또 한가지는 부모님께서 그런 얘기에는 반응을 잘하시고 다른 얘기에는 반응을 잘 안보이셔서 그럴 수 있습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부모님께 사랑받는 길을 찾고, 그 방법을 계속 사용합니다. 부모님이 학교생활의 부정적인 측면에 관심을 보이면 아이도 부정적인 말만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라고 묻는 것과 "오늘 학교에서 무슨 재미난 일이 있었니?"라고 묻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놀이터에서 친구와 잘 놀았어?"와 "놀이터에서 친구와 뭘하고 놀았니?"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대화의 흐름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특히 어머님들은 아이가 학교 가기 싫다고 하거나 친구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하면 본능적으로 걱정이 앞섭니다.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엄습합니다. 우리 아이가 힘들어 하는데도 좀더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교사에 대한 서운함도 생깁니다. 이러다가 아이가 점점 나빠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노심초사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그것을 포착합니다. 부모님의 불안은 아이의 불안으로 이어지고, 아이의 불안은 학교생활의 불안으로 이어집니다. 불안으로 아이 삶의 일관성이 정해지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노골적인 왕따나 학교폭력에 대해서 둔감하시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10건중 8~9건은 미미한 것인데 그것을 학교폭력으로 생각하시면 아이의 학교 적응력이 더 떨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아이는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일도 부모님을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말을 너무 믿지도 말고, 의심하지도 말고 그저 아이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겁니다. 함께 해결책을 조금씩 찾아보는 겁니다. 때로는 부모님의 경험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 정도만 해도 웬만한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대화의 중심을 문제 중심에서 '좋은 일 중심'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대화의 균형이 맞습니다. 긍정적인 내용을 3~4가지 얘기해야 1가지 부정적인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나 부모님이나 교사나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의 심리적 물리적 생리가 그렇습니다. 알림장을 쓰다가 너무 말씀을 많이 드렸네요. 제 말의 중심을 충분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궁금하신 점은 댓글로, 월요일에 교육과정 설명회때 문의하셔도 좋습니다.

제가 늦깎이로 교사 생활 10년 하면서 얻은 결론은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애쓸 수록, 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나에게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록 인간에 대해서 이해가 깊어지고, 공동체의 문제와 성장의 방향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교직 경력 10년 만에 2학년 아이들과의 만남은 제게 새로운 활력소이고 기쁨입니다. 아이들을 이해하기 어려울 땐,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수용하고, 기다려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간혹 저도 인간인지라 버럭할 때도 있지만, 최대한 아이들과 웃는 얼굴로 유머도 곁들여 가면서 즐겁게 학교생활 하려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계속 지켜봐 주시고 우리 아이들 많은 칭찬과 격려로 함께 해주세요.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아이들과 함께 하는 세 번째 주말 오후 담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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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반 부모님께 드리는 글로 학급밴드에 올리는 김에 페이스북과 심리학 자녀교육밴드에 올렸더니 반응이 열광적이네요. 왜 이 글에 공감을 많이 표현하고 반성할까 생각해보니 기분 나쁘지 않게 인식의 갭을 확인하고과 오개념을 바로잡는데 도움이 된 듯 합니다.

사실 교사와 학부모는 각각이 섬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말을 하지요. 소통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지요. 그 섬을 제가 연결하려 합니다. 교사를 위한 학부모상담 집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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