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인공지능의 목적
-인간은 생존을 위해, 인공지능은 인간이 제공한 문제를 풀기 위해 존재한다는 개념에 대한 반박입니다.
인간이 대결하는 대상은 언제라도 환경입니다. 이때의 인간은 개체 혹은 집단으로 정의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환경 또한 이 기준에 따라 다르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 또한 그 설계 범위에 따라 대결의 구도가 달라집니다. 간단한 수학문제를 푸는 정도의 인공지능이 있는가 하면, 알파고처럼 좀 더 복잡한 문제를 푸는 놈도 있습니다.
즉 인공지능의 대결구도는 문제로 표현되는 환경이라는 겁니다. 이때 굳이 인공지능에는 문제라는 말로 대결구도를 다르게 표현한 것은 그 문제를 아직까지는 인간이 규정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강 인공지능과 약 인공지능을 나누는 기준 또한 이것이겠습니다. 사람이 규정한 문제를 푸느냐 혹은 사람과 대등하게 환경이라는 문제를 푸느냐에 따라 갈리는 거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공지능보다는 기계지능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지능이라는 표현은 인간레벨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의도가 내포된 것일 겁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이 죽음에 맞서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대개 인간이 죽음에 맞선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죽음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환경의 일부로 여깁니다. 모호하게 표현한 것이죠. 죽음과 환경의 일치점은 그 실체를 '알 수 없음'입니다.
인류가 종교를 발달시켜온 것도 혹은 과학을 발전시킨 것도, 모두 이 근원적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 '알 수 없음'을 알고자 하는 것이죠. 환경을 지배한다는 표현도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알면 지배할 수 있는 거죠.
인간 개체에는 죽음이 존재하지만, 인류에게는 죽음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체는 죽음이 성립하지만 유전자풀로 보면 죽음은 없고, 다만 교체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나의 일부로 한다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환경을 지배한다는 것도 내가 그것을 품는다라고 바꿔 말할 수 있는 거죠.
정리하면, 이 세상 모든 문제의 정의는 대상과 나,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에 대한 기술로 정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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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키는 문제에 따라 인간이건, 인공지능이건, 사물이건 모든 존재는 규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리키는 즉, 자신이 규정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의 인간을 개체로 볼 것이냐, 집단으로 볼 것이냐는 그 하나의 인간이 가리키는 대칭하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대표성을 띤 인간은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령 가족을 거느린 가장은 하나의 인간이라고 표현하기에 애매합니다. 가장이 죽으면 식솔 또한 죽기 때문입니다. 대표성을 띤다는 것은, 여러개가 중첩되어 있다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조론 사이트에서 말하는 리더란 이런 다양한 가치가 중첩된, 대표성을 가지는 인간입니다. 이것은 그가 무엇을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라는 주사위는 더하고 빼면 큰 차이가 없지만, 확률의 개념에 따라 그것으로 하늘을 가리킬 것인지, 땅을 가리킬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그냥 스트레스라고 하면 아무 가치없는 표현입니다. 스트레스는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쓰이는 언어입니다. 인간이 어떤 언어를 쓸 때는 그 언어의 부모와 자식까지 분명히 규정해주어야 합니다. 다시말해, 본인이 말하는 스트레스가 어디에 속하는지 또 여기에서는 어디를 가리키는지 까지를 말해주어야 청자로 하여금 "아~"하게 만드는 거죠.
인간은 왜 사는가?
인간은 호르몬이 나와서 살거나, 죽음이 두려워서 사는게 아닙니다. 그림자가 두려워서 빛으로 들어가는게 아니듯, 인간은 죽음이 두렵다는건 전근대식 생각입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의 원인을 찾자면, 그가 동기부여 되는 것을 찾으면 됩니다. 자, 인간은 무엇에 의해 동기부여됩니까?
그러면 암흑이님은 왜 여기에 댓글을 썼습니까? 죽음이 두려웠나요? 글을 쓰면 살 수 있나요? 아니죠. 글로 먹고사는 작가야 그걸로 돈 번다지만, 여기서는 아니잖아요.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삶의 추동을 일으킨다는데, 왜 스트레스만 보고, 정작 그 스트레스의 원천은 안 찾는 겁니까?
적어도 스트레스가 원천이 아니라는 건 알잖아요. 그 단어를 쓸 때는 '직장상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라던지, '과도한 하중에 의해 받침점에 해당하는 교각에 스트레스가 축적되어 붕괴 위험이 있다'라는 등, 반드시 원인을 적시해야 합니다. 포수가 공이 날아오는데, 던지는 놈이 없으면 이상하잖아요.
인간의 스트레스는 다른 말로 척력입니다. 암흑이 님은 무언가에 밀려, 다른 곳에서는 말할 수 없으니깐, 여기에 와서 제 글에 댓글을 단 거 아닙니까? 구조론사이트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왜 여기로 스며듭니까? 수준 낮은 사람들하고는 못 섞이니깐, 거기서는 밀리니깐 이곳으로 오는 거 아닙니까?
구조론에서 주구장창 인간은 죽음이 두려워서 행동하는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거기다가는 암말 안 하다가, 만만해보이는 챠우에게 한 마디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님은 이곳으로 흐를 수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엄마한테 혼나고 동생한테 화풀이 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문제는 동생인줄 알았던 사람이 동생이 아니라는 거죠. 미는 놈이 있어야 받는 놈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 미는 놈과 받는 놈이 합의해야 합니다. 당신이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적어도 주는 놈과 합의된 겁니다.
이해 안 되나요? 난 직장상사와 스트레스에 대해 합의하지 않았다고요? 합의하지 않는다면 당장 사표를 쓰겠죠. 합의했으니깐 열받는 겁니다. 열받으니깐 후임한테 그 스트레스를 또 전달하는 거고요. 그래본 적 없다고요? 꾹 참아봤다고요? 정신의학적으로 누적된 스트레스를 홧병이라고들 부릅니다. 흔히 관찰되는 현상이죠.
당신이 무엇에 의해 여기에 댓글을 달았는지 잘 생각해보세요. 그게 인간 행위의 원천 동기입니다. 사건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데, 왜 어둠을 논합니까? 언제라도 빛이 정답입니다.
댓글에 날이 서있습니다.
그 인간이라는 단어가 챠우님의 본론에 것과 마찰이 생기기 때문에 저는 화가 났고 댓글은 적은 겁니다. 저는 인간이란 대중 쪽으로 보았고 챠우님은 지도자 쪽으로 본 방향이 틀린 것입니다. 왜 그랬냐면 본론만 봐서는 그 내용 속에 인간이란 단어가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지 몰랐기 때문이었죠.
사건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어둠을 논해야 합니다. 동전을 이해하려면 앞면을 알고 뒷면을 알아야 동전을 이해하는 것이죠. 언제라도 빛이 정답인데 그래서 베테랑도 아닌 탐정이 다짜고짜 연역법을 사용합니까? 귀납법이 베이스로 깔리고 연역을 해야 하는 거죠. 연역하고 싶은데 안되니깐 귀납을 논하는 중간단계가 있는 겁니다. 저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실험쥐와 동일하다는 베이스를 깔고 접근하는 겁니다.
왜 어떤 인간은 하필이면 어둠을 택하고, 또 어떤 인간은 반대만 할까요? 왜 박원순은 문재인의 패권을 부정할까요?
어떤 사람이 문재인이 되고, 또 어떤 인간이 빛이 될 수 있을까요? 빛이 아닌 것이 어둠이지, 어둠이 아닌 곳이 빛은 아닙니다. 이 두 차이를 모른다면 기본이 안 된 겁니다.
상대를 제압할 때는 목을 잡아야지 다리 같은데 잡으면 걷어 차입니다. 진리란 놈이 있다면, 그 놈의 목부터 틀어버려야 하는 거죠. 제가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머리가 아닌 꼬리를 선택했나요? 선택을 하긴 했나요? 그냥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요?
사람이 빛을 선택하려면 용기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어떤 집단을 변화시키려고 한다고 칩시다. 혹은 꼬맹이 집단에게 무엇을 가르쳐준다고 칩시다. 당신의 임무는 전부다 가르쳐야 하는 상황입니다.
누구부터 가르치겠습니까? 당연히 그 집단의 리더부터 가르쳐야 하는 겁니다. 리더를 가르치면 한 명으로 끝나지만 한 명씩 가르치려면 100번이고 1000번이고 개고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리더를 가르치면 알아서 전파합니다.
다시말해 흐름을 만들어 집단을 통제하는 겁니다. 박근혜 일당이 한국을 개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최순실이 실세라도, 박근혜 목만 날리면 일당을 일망타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잔챙이 꼬리만 물고 늘어지겠다면 답답해지는 겁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아마추어로 남을 겁니까? 연역이 어려우니 안 배울꺼라고요? 그 연역은 이미 당신 안에 있는 겁니다.
이미 매 순간 당신은 연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알아채지 못해서 그렇지. 일단 인터넷에서 연역과 귀납이 뭔지부터 검색해보세요.
진리란 놈이 있을 때 목부터 잡으면 진리란 놈은 목 이상의 것을 잡아 버립니다. 제가 진리를 한 번에 제압하지 못하면 되려 제압당해 버립니다. 그래서 꼬리 정도를 잡으면 그 정도만 한 반격이 올 뿐입니다. 그 상태가 자연스러운 거죠.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귀납을 배울 수 있다고 하면 다른 데서도 연역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어차피 네이버 사전에 나와있으니깐요. 그런데 구조론에서 말하는 연역이라면 귀납도 다른 데서는 못 배웁니다. 이곳 밖에 없죠.
제가 아는 구조론은 초등학생도 배울 수 있을 만한 쉬운 수준입니다. 이원성의 눈을 뜨고 일의적 동시 확정성 이것만 알면 됩니다. 그런데 용기라뇨? 엄청나게 복잡한 말입니다. 구조론의 기본은 이중의 역설입니다. 처음에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보고 그 담에 앞에 보이는 것에 배후를 보고 그 담에 다시 처음에 봤던 걸 이해하는 것입니다. A → B → A' 이런 패턴이죠. 문명이 눈앞에 보이니깐 전쟁이 배후에 보이죠. 그래서 문명을 다시 이해하고자 하니깐 전쟁 이거 때문에 안되는 겁니다.
사람이 트라우마가 박혔는데 이해가 안 간다고 하면 곤란합니다. 아직 자기 자신마저 통제가 되지 않는 마당에 타인이 용기라고 하면 제가 변한답니까? 구조론이 초등학생 수준으로 쉬울지 몰라도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은 경험이 아니고서야 터득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을 밀어버리려 하지말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뇌에 그것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겁니다.
죽음이 뭔지, 인류가 뭔지,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판에 박힌 말 말고, 순수 논리로만 생각해보는 겁니다. 인간이 죽음을 경험해볼 수는 없습니다.
트라우마 극복은 모든 앎의 극복과 마찬가지 메커니즘으로 이뤄집니다. 지식인이라면 죽음 뿐만 아니라 삶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인류가 무엇인지, 역사가 무엇인지, 우주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보다 더 큰 것을 고민해보고 그것을 다시 돌아보는 거죠. 더 성숙해진 어른으로서 아이였던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겁니다.
트라우마는 그렇게 극복'됩'니다. 극복'하는'게 아닙니다.
구조론 옛글 찾다가 오늘 이기준님을 처음 알게 됐는데 2012년 이때가 구조론 전성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특히 남녀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사고회로가 어떤지에 내용은 상당히 흥미롭게 읽히더군요. 그때 자료에 흥미가 있으니 계속 찾아봐야겠군요. 된장녀가 한국 경제를 도약시킨다? 결국 제 트라우마 라는게 세력 전략이 싫다는 겁니다. 근데 이 분은 그걸 장난감 다루듯 가지고 놉니다.
그런데 이런 댓글 적으면 제재받거나 짤리는 건지요?
그럭저럭 잘 나가시다가 비열한 심보를 내보이시는 군요.
뭐 좋습니다. 이기고자 하는 호르몬의 명령일테니.
그러나 호르몬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이기는 길이 아닙니다.
진리의 명령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자기편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호르몬 마저 자기 편이 아닙니다.
호르몬은 호르몬의 편일 뿐인 거죠.
진리외에는 모든 것이 적이라는 것 부터 깨우쳐야 합니다.
첫 걸음은 그 다음에 디디실 수 있습니다.
제재는 잘 모르겠고,
하여간 당장 눈에 들어오는 자잘한 방법보다는 전체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긴장이란 근육의 수축인데 사람의 몸은 항상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수축을 이질적으로 받아들이고 호르몬을 통해 근육을 이완시키려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 상황 속에서 사람은 진지한 사고를 해야만 근육을 이완시킬 수 있기 때문에 진지해지는 겁니다.
기쁨이고 슬픔이고, 행복이고 불행이고, 오르가즘이고 통증이고 이런 것들은 둘로 되어 있는데
결국 하나로 정리하면 스트레스로 통일되는 것이죠.
인간은 죽음을 스트레스로 인식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겁니다.
지금도 아마존 자연인들은 우리보다 1만 년 뒤처진 문명을 지니고 있습니다만
어차피 유전자는 똑같은 인류입니다.
문명인들이 발전한 건 자기들끼리 스트레스를 주고받고 하다 보니 에너지가 팽창한 거죠.
자연인들은 그럴만한 껀덕지가 없기 때문에 적당히 발전하는 것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