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34073.html
우리는 당연히 가家를 생활단위로 생각한다.
그러나 고대의 가는 경대부의 장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반인들은 가를 소유할 수 없다.
무슨 돈으로? 화폐경제도 없던 시절에.
가家를 이루려면 일백명 이상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귀족이어야 한다.
신라로 치면 귀족들이 사는 35 금입택이 가로 부를만한 것이다.
일반인들은 방坊에 살았다.
전성기 경주에는 17만호 1360방이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전한다.
중국 산동반도에도 신라방을 설치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방의 정체가 무엇이냐 연구해봐야 한다.
방은 중국 객가족의 토루 비슷한 공동주택이다.
주성치 영화에 나오는 돼지촌을 떠올려도 좋다.
위 인용한 기사에는 모량리 무산 대수촌의 태수방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17만호 기록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는데 경주에 가서 땅 파보면 알게 된다.
도심에서 6킬로 떨어진 논밭인 우리집 주변 어디에도 기와가 나온다.
남산에만 절터 128개소 석탑 72기 불상 100체가 있는데
절 하나당 신도가 가족까지 1000명이라고 본다면 얼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신라 당시에는 평지에 주로 사찰이 있었다. 게다가 남산 외에도 산은 많다.
다만 호를 곧 가구수로 계산하는건 잘못이다.
전시에 동원될 수 있는 성인 남자로 계산해야 한다.
노인과 어린이, 여자를 빼면 그게 호다.
삼국지 위촉오의 호를 셈하는 기준을 참고할 때 4를 곱해야 한다.
위나라가 65만호 440만명, 오나라 50만호 230만명, 촉나라가 30만호 95만명
이것도 다시 보니 헷갈리는데 중간값인 오나라 기준으로 보자고.
아마 촉은 인구가 부족해서 최대한 동원했기 때문에 호가 많이 등재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경주 인구를 70만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거기에 노예 숫자는 포함되었는지 알 수 없다.
기와조각이 발견되는 도시면적이 지금의 3배는 확실히 넘으므로 70만은 된다.
문제는 신라인들이 전부 기와집에 살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도 초가집에 살았는데 신라인은 왜 기와집에 살았을까?
방에 담장과 대문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말은 집에는 담도 없고 대문도 없다는 말이다.
신라인은 가家 단위로 생활하지 않았다는 거다.
담장과 대문으로 이루어진 그런 시골집은 신라시대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키가 작아진다. 신라불상은 4등신이다.
보통 신라인의 키는 155 정도?
4등신 신라불상.
신라인은 키가 작다. 왜 이렇게 키가 작을까? 방 단위로 생활했기 때문이다.
왜구들이 키가 작은 것도 이유가 있다. 공산당식 단체급식을 해서 키가 안 큰 것이다.
필자가 유심히 살펴본 내용으로 말하면 우물 숫자가 생각보다 적었다.
지금 고향동네는 집집마다 우물이 있는데 당시에는 우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무엇인가? 방 단위로 생활하므로 1방 1우물로 충분한 것이다.
개인의 가정이라는 것은 당시에 없었다.
사무라이들도 못 먹어서 키가 안 큰 것이다.
이건 굉장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당연히 고대인들도 각자 가족들끼리 살았을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정글의 부족민들은 정부에서 지어준 롱하우스에서 생활한다. 자기집은 당연히 없다.
가.. 식구.. 부부개념이 없거나 약하다.
아빠라는 단어는 원래 남자라는 뜻이다.
인간이 친아버지 친어머니를 챙긴 것은 근래의 일이다.
일본만 해도 남자그룹 여자그룹이 있다.
가에 소속되는게 아니라 남자부족 여자부족에 소속된다.
공동노동을 하고 공동분배를 하는 공산주의다.
개인 소유의 토지가 없고 마을 공동토지를 경작하여 나눠갖는다.
어차피 토지는 전부 봉건영주의 것인데 내 땅이 어딨어?
자기 땅이 없으므로 자기 집이 없고 자기 집이 없으므로 자기 가족이 없다.
물론 전혀 없는건 아니고 비슷한게 있으나 현대의 가족과 다르다.
공산주의식 공동생활을 했던 것이다.
멍청이 마르크스는 인류를 그 생산력이 낮았던 공동생활시대로
되돌리려한 점에서 슈퍼 보수꼴통임이 확인된다.
마르크스를 비난하려는게 아니다. 공자도 주나라 때로 되돌리려한 보수꼴통이다.
그런데 둘 다 똑같은 보수꼴통인데 왜 마르크스 꼴통은 진보로 쳐주고
공자 꼴통은 보수로 치느냐 말이다. 이러한 자의적인 역사왜곡을 비판하는 것이다.
공자든 마르크스든 무식해서 그렇다.
의도한 본질은 진보다. 의도를 보고 말해야 한다.
당시는 친아들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며
자식은 마을사람이 공동으로 키운다.
물론 귀족들은 당연히 친아들이 있다.
택에서 생활하는 귀족들은 가가 있기 때문이다. 사유재산이 있다.
일본은 '애미 애비도 없다는 니이가타 출신.'.. 이런 말이 영화에 버젓이 나온다.
왜 애미, 애비가 없을까? 가 단위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이가타는 일본 하고도 북쪽지역이라 낙후된 지역이다.
그러므로 고대인의 생활방식을 현대까지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인은 왜 기와집에 살았을까?
방 단위로 생활했기 때문에 집을 각자가 짓는게 아니라
방주가 공동주택을 짓고 공동생활을 하므로 기와집을 짓게 된다.
신라가 망하고 방이 해체되자 각자 자기집을 지어야 하는데
그러자 기와를 구할 수 없게 되어 초가집을 지은 것이다.
방주는 방원.. 500명 정도를 지배한다고 봐야 한다.
500명을 동원하여 공동주택을 지으면 당연히 기와집을 짓게 된다.
중국의 객가족이 토루를 초가집으로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원시 공산주의 사회였다고 보면 된다.
장단점이 있다. 원시 공산주의 장점도 상당히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뜻은
이런 식의 실제 사람들의 생활 위주로 역사를 재구성해야 하는데
개판으로 하기 때문에 식민사관에 오염된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고증해 보면 환빠들의 중국 판타지는 다 깨지는 것이다.
방에서 살던 신라인이 철기를 소유하자 가로 바뀌었으며
가에서 살면 가장이 사촌까지 동원해도 20여명의 노동력을 동원할 뿐이다.
화폐경제가 없던 시절에 20명의 노동력으로 기와집 못 짓는다.
조선시대의 집은 집장사가 짓는게 아니라 마을 사람이 공동으로 짓는다.
어차피 씨족촌이므로 씨족원 중에 누가 장가들었다면
마을사람이 몰려가서 공짜로 집을 지어준다. 다 사촌들인데.
화폐경제가 발달하자 목수에게 돈을 주고 집을 지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선 중기까지는 부자나 양반을 제외하고 집을 개인이 건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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