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장자의 호접몽을 보자.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莊周)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조금 전에는)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지금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물화(物化)라 한다.”
장자가 이미 말했고 아인슈타인이 장단에 추임새다.
상대성. 상대적인데 완벽히 상대의 무게가 같다. 시간조차.
나비의 무게와 장자의 무게가 같다.
과거로 돌아간 것과 미래로 나아간 것의 무게가 같다?
이거 사실 골치 아픈 것이다. 골치 아프다면 무궁한 이야기가 나온다.
요즘 영화의 추세는 <시간>를 가지고 논다. 어쩌면 <인과>를 비틀어 보는 것.
거기서 무수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온다. 공간은 좁다.그러나 시간은 무궁무진하다.
어느 날 갑자기..알 수없는 격발에 의해서..전혀 다른 세계를 만나는..
뭐 이런 것들의 설정이다. 요즘은 여기에 <시간>을 이용하는 패턴이 유행이다.
<파이널 카운트> 1980년의 영화다.역시 시간의 장난.
영화를 다 보지 않아서 왜 "파이널"이라는 건방진 단어를 사용했는 지는 모른다.
내가 본 포인트는 다른 곳에 있다.
우주가 미지이듯, 바다는 현실적인 미지이다.
그 바다에 일엽편주라면 막막하다. 바다는 사실 속세가 아니다.
요즘 바다 영화가 많이 나오고 우주 영화가 많이 나오는 것은 심리적 엑소더스다.
하지만 한계가 있는 것이 엑소더스는 필연적으로 대양의 일엽편주가 된다.
고립되고 고독하고..조빠지게 고생하는 것이다.왜?
그것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특별한 사건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위안이 있다.
그것이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 <상대성 이론>, 혹은 <호접지몽>이다.
그리고 오늘의 영화 <파이널 카운트>.
대략 시간여행의 영화는 <기억>의 심리학을 이용한 고전 시대의 쑥스러움에서
<데쟈뷰>로 살짝 객관화 시키고는 요즘은 아예 엉터리 과학으로 노골적 시간여행을 해버린다.
그러나 민망함을 피할 수는 없다. 한 개인이나 그 친구..그 정도만 시간여행이 가능하다. 비지니스석 땅콩 수준이다.
그러나 항공모함이라면 어떨까.
하나의 나라가 시간여행을 했다면 어떨까.
개인이 과거의 어느 한 시점, 혹은 미래의 어느 한 상황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입,사,행이 있는 국가 단위의 집단이 시간여행(?)을 해버리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까.
대략 시간여행은 한 사람이 역사와 대면하여 고민하지만..그게 집단이라면, 조직적인 한 사회라면..
예를 들면, 대한민국의 항공모함(참..우리는 없지.)이 우연히 명량 대전의 바다에 출현했다면?
뭘 어째야 하지? 선장은 뭘 결정해야 하지? 선조와 통신을 해서 그 명령을 받아야 하나?
이순신 몰래 적을 섬멸해야 하나? 아니..전투가 가능하나..흠~ 걸리버 여행기가 생각나누만..
문제는 전투가 아니라.
가치 판단과 의미 부여다.
상대성 이론이라는 골치 아픈 상황, 호접몽이라는 당황스러움.
사실은 그런 이상한 바다에 우리가 떠 있다.
아니, 바다는 원시의 그 바다인데
우리는 최첨단 레이다와 핵폭탄 미사일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1560년대 조국의 명령을 기다려야 하는가.
그래서 나비에게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가.
비록 시간의 장난에 의했더라도 이 공간을 공유해야 한다.
그러나 공간을 공유한다고 그 역사가 같지는 않다.
인간은 다른 역사를 가지고 같은 공간을 산다.
이미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2015년은 고독하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파이널 카운트는 항상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