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두개의 관점을 가진 사람의 비교
1. 사람은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떠올린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할지를 고민합니다. 그 평가를 내리는 사람은 이웃이 될 수도 있고 학교, 직장의 동료, 선생님, 상급관리자 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외부의 사람들이 당신의 생각에 대해서 ‘좋다’, 혹은 ‘나쁘다’ 라는 평가를 내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관점을 가지고 그것으로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2. 다른 관점의 예: 성실함의 관점, 특이함의 관점
여기 두 사람을 예를 들어서 시물레이션 해보도록 합시다.
A씨는 현재 50대이며 어떤 일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성실한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을 보면 그는 인구비중이 높은 베이비 붐 세대의 일원입니다. 그 세대들은 마라톤과 같은 반복적이고 물량위주의 노동집약적인 일에 종사했습니다. 그는 어떤 일을 할 때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지속해 나가면 어느 시점부터는 동료들이 자신을 이해해주고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예상을 합니다. A씨 입장에서 젊은 세대들은 재능은 있지만 열심히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B씨는 20대이며 특이함 이라는 평가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B씨가 볼 때 성공적인 일은 그 일에 창조적인 부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조적인 일은 반복적인 일보다 더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성과물보다 다른 점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일합니다. B씨가 볼 때 기성새대는 진부하고 반복적인 일에 안주하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3. 한가지 사물을 평가할 때 다르게 해석한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창립자 빌 게이츠를 A씨와 B씨가 각자 평가한다고 합시다.
빌 게이츠의 사업적인 성공에 대해 A씨는 무엇보다 빌이 꾸준히 소프트웨어 개발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반해 B씨는 빌 게이츠의 성공이 당시에는 새로운 개인 컴퓨터소프트 산업이라는 블루오션에 투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B씨가 볼 때 그 것이 빌의 창조성이라는 것이죠.
만약 A씨와 B씨가 대화를 했을 때 서로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누가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A씨는 특별한 감성을 가진 예술가에 대해서도 여전히 ‘성실함’을 근거로 평가합니다. 예를 들자면 매우 특별한 감각을 강점으로 성공한 예술가에 대해서도 ‘그 능력을 발달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하고 평가하는 것이죠. 그의 의견이 전적으로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A씨가 직장에서 젊은 동료들에게 하는 말은 판에박힌 진부한 소리로 받아들여질 떄가 많습니다. A씨는 변화하는 세계에서 뒤쳐지지 않고 젊은 세대의 성공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싶지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반면에 B씨는 과거 세대의 자수성가한 사람을 평가할 때도 ‘특이함’을 근거로 삼습니다. 이를테면 그 사람은 그 시대에 남들이 하지 않는 새로운 시도를 했기 떄문에 성공했다 하고 말이죠. 역시 틀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B씨에게도 고민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 만큼 ‘특이함’, ‘색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B씨가 하는 말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고작 튀는 발언으로 평가 될 뿐이죠. B씨는 기성세대가 만든 사회에 벽을 느끼고 고립됩니다.
이런 각각의 관점에 대해서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라는 평가를 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각자가 그동안 살면서 형성한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속한 영역이 있기 때문이죠. 그 영역을 이해하지 않고는 두개의 관점은 결코 만나서 소통할 수 없습니다.
4. 어떻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만약 이런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발전적인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STEP1, 이런 서로 다른 영역에서 관점을 가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합니다. 받아들이되 겉으로 보이는 사실만을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그 관점이 속해있는 가상의 영역(공간)과 그것이 작동하는 과정(원리)을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STEP2, 각자의 관점에서 판단을 내리는 기준이 되는 포인트를 추출합니다. 추상화, 단순화 기법을 사용하도록 합니다.
STEP3, 대화의 주제가 위치할 새로운 공간(새로운 목표, 프로젝트, 사업 등)을 설정하고 그 곳에 추상화 된 판정기준을 이식해서 서로의 기준을 반영하는 새로운 메커니즘을 가진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A씨와 B씨가 공동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A씨가 자신이 삶의 경험으로 만든 관점을 주의깊게 성찰해서 이전에 무조건적으로 적용되던 관점을 상대적인 기준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업무시간을 엄수하고 열심히 일한다’로 표현되던 성실함을 ‘업무시간 중 좋은 컨디션을 가진 시간을 늘린다’로 B씨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공동영역에 맞는 상대적인 규칙으로 추상화 해 내는 것입니다.
B씨라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방식은 진부하다’를 ‘기존의 방법은 반복되면서 낭비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줄일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상대적인 기준으로 발전시켜서 동료들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인이 가진 가치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도 새로운 체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고 이 이야기가 너무 이상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한다면 먼저 위로를 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아마 문제를 해결하려는 도전을 해보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타인의 관점에 평가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실제상황에서 A씨가 권한을 가진 관리자라면 성실함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강요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성실함의 관점으로 가장한 통제력의 관점으로 구성원을 괴롭히는 조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조직은 다양한 관점을 포용하는데 실패하고 나아가서 조직전체의 경쟁력을 떨어뜨립니다.
5. 자신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가지게 되었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대화로 타인과 생각을 교류하면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을 자기 스스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타인에게 고집스럽게 강요하는 데에 그치고 맙니다.
거기에다 현대에 들어서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많은 관점에 평가당하고 동의하기를 강요받으면서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의 복잡함이 사람을 정신적으로 지치게 합니다.
거기서 필요한 것은 자신 스스로가 관점의 주인 이라는 사실입니다. 본인 관점을 스스로 이해하고 제어하지 못하면 타인과 그것을 공유하고 발전시켜나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던 스텝1의 ‘받아들이기’를 눈여겨 보길 바랍니다. 자신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하나의 관점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면 그만큼 문제를 이해하는 사고의 폭도 넓어질 것입니다.
이유는, 미국이라는 촌뜨기 나라가, 2차대전을 통해서 완연히 다른 사회로 진입했기때문이고,
캔자스 와이오밍 시골 촌놈들이 사병으로 들어가고,
뉴저지, 샌프란시스코 대학출신들이 장교로 유럽, 태평양전선에서 함께 럭키 스트라이크 태우면서
전혀 다른 조직체계와 문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돌아와 우리 조직.
연고와 정실에 기반한 분야는, 검경, 공무원, 학계, 대기업으로 볼수 있겠군요. 연고 정실이 강할수록,
일의 강도도 높지만 (계급화에 따른 밑으로 일내려보내기), 보호막도 강합니다. (실은
폭탄주 마실 정도로 안이한 조직이 미국의 일반 기업에서는 찾기 힘듭니다.)
그 보호막은 '라인'을 탈때에만 용인되며, 아무리 기업이 조직이 '글로벌'을 외쳐도,
실제 기술 (대부분은 창의성에서 나오는)은 외국에서 들여와야하는 현실에서는
선박 껍데기만 국산이고, 엔진은 독일제, 일본제 해야하는 현실입니다.
극복의 대안은,
연고와 정실이 주는 '보호막'이 실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합니다.
그것이 나와 소위 '윗선'을 연결해주는 라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첫째로, 동료들과 소외시키고
둘째로, 그 라인 위의 더 넓은 세계와 차단시키는 장벽임을
깨달아야합니다.
창의성이 막연한 상상력이라고 보면 오산입니다.
확실히, '역사나 문명적 기회'라는 측면이 존재합니다만,
빌게이츠나 테슬라가 무언가를 개발하고 창안하던 시절에,
운영체제에 대한 논의나 무전통신에 대한 연구 있었습니다.
다만, 그부분이 소수에 의해 독점될정도로 '첨단'을 달렸다는 것입니다.
바라는 바 있다면, 젊고 유능한 한국의 인재들이 그 첨단에 노출될수 있도록 이끌어야합니다.
인내력 창의력 운운하지만, 5가지로 능력을 추출할수 있습니다.
영력-지력-'생산력'-경제력-인력
다섯가지 능력에 대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죠.
물론 키는 '생산력'에 있습니다.
어떤 블로그에서 읽은 글인데
미국기업은(예컨대 금융업종이라 치고)
처음부터 장교로 선발된 직원과 사병으로 선발된 직원을 따로 뽑는답니다.(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물론 한국계는 대부분 사병으로 뽑히지요.
그들은 자신이 원천적으로 일정한 한도 이상은 승진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보직이 더 많은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없는 단순보직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안에서 승진하는건 의미없고
외부로 돌면서 경험을 쌓고 인맥을 닦아야 이사급으로 출세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자기분야에서는 고도의 전문가가 되지만 그건 안쳐주거든요.
그래봤자 우수한 하급기술자가 될 뿐.
진짜 인재에게 필요한 능력은 전문적인 기술보다는 변방으로 돌면서 축적한 다양한 경험과 폭넓은 인맥이거든요.
(구조론에 따라 변화는 외부에서. 그러므로 진짜 인재는 외부로 떠돌며 경험을 쌓게 한다.)
즉 특이함의 기준과 성실함의 기준을 정해놓고
전자는 백인 위주로 창의적인 인재를 별도로 선발하고
후자는 한국계라도 좋다 일만 열심히 해다오로 선발하지요.
결국 창의적인 관점과 성실함의 관점이 있는게 아니라 장교와 사병이 있을 뿐이지요.
사병으로 선발된 직원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사가 되기는 불능입니다.
인종차별없이 공정하게 승진시킨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기계적인 승진이지요.
백인만 가지는 어떤 정서의 공감대 속으로 진입할 수 없다는 원천적인 장벽이 있다는 거지요.
언어로는 백인을 이기고 재능으로도 이기는데 정서로는 거대한 장벽이 있지요.
결국 관점의 차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 국가수준이 원초적으로 사병국가라는 거지요.(그것도 하나의 관점은 되나)
일본거 베끼면 되는데 창의적인 인재가 무슨 소용이야?
그러나 인터넷에서 조중동이 맥을 못쓰는 것을 보면 사정이 다르지요.
그 사람들은 창의적인 인재가 필요없다고 믿고 있다가
신문사가 망하게 되니까 미디어법인지 뭔지 한다고 지롱을 떨어요.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면 누가 말 안해도 창의적인 인재가 나라를 먹여살린다는 사실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문제는 아직 우리나라가 그 문턱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