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에 대해서
역설은 간단한 원리다. 그런데 어렵게 여기는 분이 많더라. 왜 그럴까? 왜 역설이 어렵게 여겨질까? 역설은 한 마디로 어떤 대상에 작용하여 통제하려면 그 대상이 가진 힘보다 커야한다는 거다.
당연한 거다. 주먹으로 벽을 때리면 제 손만 아프다. 야구공을 받아치려면 투수가 던진 힘보다 세게 방망이를 휘둘러야 한다. 당연한데 왜 문제일까? 역설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문제다.
인간은 원래 연역적 사고를 못한다. 인간의 뇌기능 자체에 원초적으로 문제가 있다. 그래서 깨달음이 필요하다. 원래 인간의 뇌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역설이 이해된다.
중학생 수준의 물리학 공부하신 분은 다 알거다. ‘f=ma’ 이딴거 학교에서 다들 배웠잖은가? 힘이라는 것은 대상에 작용하는 것이며 물리적으로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당연히.
거기에는 시간의 길이, 공간의 너비, 가속도, 상대성, 지렛대의 원리 등등 여러 조건이 있다. 보통 이들 중에 하나를 충족시켜놓고 조건을 충족시켰다고 착각하는게 인간이다. 왜? 멍청하니까.
자동차에 기름만 넣어놓고 차가 간다고 믿거나, 혹은 시동만 걸어놓고 차가 간다고 믿거나, 혹은 엑셀만 밟아놓고 차가 간다고 믿는 착각한다. ‘왜 차가 안 가느냐?’며 골 내는게 역설이다.
근데 때로는 기름만 넣어도 가고(이미 시동이 걸려있으므로), 때로는 시동만 걸어도 가고(이미 미션이 D에 가 있었으므로), 때로는 액셀만 밟아도 잘만 간다.(실은 이미 운전중이었음.)
그러므로 ‘아 뭐만 해도 되더라’ 하고 착각하는 거다. 즉 경험을 믿더라는 거다. 전기만 해도 전압이라는게 있고 또 전류라는게 있고 전극도 있고 기타등등 여러가지 조건이 복잡하게 있다.
그 중 하나만 들이대면 된다고 믿는 바보들이 숱하게 있으니까 세상에 역설이 있는 거다. 근데 보통 인간들은 대충 하나만 들이대는 식으로 잘 살고 있다. 인생 자체가 그렇더라는 말이다.
학생은 성적만 들이대면 되고, 선수는 메달만 들이대면 되고, 구직은 스펙만 들이대면 되고, 짐승남은 복근만 들이대면 되고, 송일국은 살만 빼면 되고, 명박은 삽질만 하면 다 되고?
소는 밭만 잘 갈면 되고, 돼지는 살만 찌면 되고, 닭은 알만 잘 낳으면 되고, 아사다마오는 트리플 악셀만 하면 다 되고? 이건 인간들의 착각이다. 그들은 시스템 안에 갇혀 길들여진 존재다.
시스템 밖으로 나오다 역설의 찬공기를 만나 기겁을 한다. 사회에 길들여져 있으니까 역설을 모른다. 밑바닥에서부터 박박 기어본 사람은 구태여 말 안해도 역설을 안다. 산전수전 겪어보고 안다.
물리적으로 힘을 구성하는 조건은 다양하며,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야 대상의 중심을 칠 수 있으며, 대상의 중심을 쳐야 힘이 옳게 전달된다.
선빵에 실패하면 뒈지게 맞는다. 이게 역설이 아닌가? 뭐 이 정도는 가리봉동 양아치도 안다.
역설이란 간단히 힘의 작용이 대상의 무게중심을 치지 못하면 힘이 반사되어 되돌아 오는 것이다. 반사되는 이유는 작용의 순간에 계가 만들어지는 데 힘의 크기에 따라 계의 위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예상과 다른 장소에서 계가 만들어져 힘의 진행이 꺾이면 그걸 역설이라고 하는 거다. 타점이 A라고 여겼는데 B라면 그게 역설이다. 단순히 예상이 빗나간 거다. 과녁을 못맞힌 거.
1킬로그램의 물체를 움직이려면 그 물체가 가진 마찰력 이상의 힘을 가해야 하는 거다. 근데 어떤 조건에서(예컨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든가, 물에 떠 있었다든가) 더 작은 힘으로도 움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착각하는 거다. 인간이 사회에서 부딪히는 대부분의 일은 하나만 하면 된다. 여러 조건들 중 나머지는 충족시켜놓고 빠진 하나만 채우라는 거다. 그게 포지션 원리다.
대장은 판단하고, 간부는 전달하고, 다 준비된 상태에서 병사는 총만 쏘라는 식이다. 포드시스템에 길들여진다.
대상을 통제하려면 그 이상의 힘을 가해야 한다는 당연한 지식이 역설이며 그 이상의 힘이라는 것은 시간, 공간, 가속도, 지렛대의 원리 등등 여러 물리학적 조건에 의해 성립된다.
인간들이 귀찮으니까 그 중 하나만 보고 통밥때린다. 이런걸 원론에서 정치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역설이라는 단어에만 집착한다면 곤란하다. 모든 힘의 작용은 대상의 무게중심을 친다.
치지 못하면 되치기 된다. 채찍으로 팽이를 치면 그 힘은 팽이에 흡수되어버린다. 당연한 거다. 중심을 치지 못했으니까. 달리는 자동차를 뒤에서 밀어주면 자동차는 더 잘달린다. 당연한 거다.
팽이를 치면 팽이가 넘어진다고 믿거나, 자동차를 밀어주면 자동차가 자빠진다고 착각한 사람이 문제다. 역설은 간단히 1+1=2다. 어떤 멍청이가 1-1을 해놓고 왜 2가 아니냐고 따진다면 그게 역설.
그때는 ‘멍청아’ 하고 혼내주는게 맞다. 역설은 거꾸로가 아니고 거꾸로 보여진다는 거다. 그건 작용하는 인간이 하부구조, 종속된 낮은 포지션에 있기 때문이다. 누가 밑으로 들어가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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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역을 못하는 이유는 이미 뇌에 길이 나버렸기 때문이오. 연역을 하려면 이미 '뇌에 길이 나버렸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해야 하오. 자신이 연역이 아닌 귀납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아야 하오.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답이 없소. 연역할 능력이 없는게 아니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오.
전기는 스위치만 켜면 불이 들어오는데, 활은 쏘기만 하면 과녁에 맞는가? 그건 아니오. 그러나 인간은 스위치를 켜니까 불이 들어오더라 그러므로 쏘기만 하면 맞는다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오. 쐈는데 왜 안맞지? 하고 화를 내는게 역설이오. 스위치 안 켜본 사람은 역설하는데 스위치 켜본 사람은 못하오. 이미 길이 들어버려서.
그래도 안 되면, 공식을 외거나 아니면 도표를 만들어놓고 인용하는 방법이 있소. 지도를 보는 것과 같소. 나는 머리 속에 구조의 그림을 띄우는 방법을 쓰오.
나는 어떤 위화감을 느끼면 그림(정확하게 말하면 그림 비슷한 어떤 메커니즘적인 느낌임.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대칭구조.)을 띄워서 비교해 보고 판단하오. 대칭구조가 하나의 축에 꿰어져 작동하는 모습이 그려지면 무조건 맞고 아니면 무조건 틀렸소.
초딩이 일기 쓰는 요령을 배우는 순간 모든 연역적 사고는 날아가고, 초딩이 그림 그리는 요령을 터득하는 순간 모든 연역적 사고는 날아가오. 더 이상 연역할 수 없게 되오.
두 가지 유형이 있소. 하나는 원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데(연역할 수 있었는데) 초딩때 그리는 요령을 배워서 망한 케이스. 저는 만화보고 베껴그리다가 망했소.(만화가 그림이 아니라 알고보니 텍스트-약속-의 집합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소.
하나는 그리는 요령을 가르쳐줘도 그것도 못하는 케이스. 이 경우는 좋은 선생이 열심히 가르치면 조금 하지만 역시 갇혀져 버리오. TV에 30분만에 그리는 요령을 가르치는 무슨 프로가 있다던데 그런걸 깨뜨려 가는 것이 그림의 진보이오.
하여간 원래 그림이 되는데 요령 배우다 망한 어린이와 원래 그림이 안 되는 어린이가 있었소. 원래 되는데 요령 때문에 망한 어린이는 각성하면(자신이 귀납적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훈련하여 연역능력을 회복할 수 있소. 원래부터 안 되는 사람은? 나도 모르오.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여전히 어렵네요
저는 요즘 동렬님의 여러 용어중
그래도 가장 친숙한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에
관심이 두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그것에 비추어 보는 식이지요
역설도 내부의 축인 "제어"부분에 힘을 가하지 못한 상태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모든 존재는 외부에서 에너지를 조달하여 고유의 일을 한다"고 이해하고 있는데
문제는 존재고유의 일과 에너지가 매치가 되고 있지 않습니다
예컨대 자동차의 에너지는 가솔린이지만 자동차 고유의 일은 이동수단이지 가솔린을 태우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구조론 책을 보면 "모든 구조를 작동하는 힘은 잉여에서 얻어지며 그 힘은 심1에 날1로 대체되어 나머지 1을 얻은 형태로 창출된다고" 써져있는데 여기서 힘은 에너지와 틀리나요? 존재 고유의 일과 에너지의 관계는 무엇인가요?
구조는 닫힌계를 중심으로
논의를 하는 건데 닫힌계가 무엇이냐는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반복되는 일을 주로 하다보니까
그게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착각하고 자기가 아는 범위 안에서
답을 찾으려 하는데서 실패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역설이지요.
자동차가 무엇이냐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요.
자동차 자신은 휘발유를 태워 바퀴를 굴렸을 뿐이고
이동수단으로 봄은 인간의 관점이겠지요.
말은 단지 궁뎅이가 아파서 '아 짜증나' 하고 조낸 달렸는데
타고가는 인간은 말을 이동수단으로 여기겠지만
말 자신은 이동수단이 아니지요.
** 모든 구조를 작동하는 힘은 잉여에서 얻어지며 그 힘은 심1에 날1로 대체되어 나머지 1을 얻은 형태로 창출된다고" 써져있는데 여기서 힘은 에너지와 틀리나요? 존재 고유의 일과 에너지의 관계는 무엇인가요?
-- 정확히 질문요지가 와닿지 않네요.
에너지는 여러 의미로 쓰이는데 구조론의 용어들은 맥락에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
그냥 에너지와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다르지요.
여기서 힘은 운동의 원인 개념이고 유효한 에너지를 말합니다.
존재란 에너지 개념을 배제하고 추상적인 의미로도 쓰입니다.
존재에 에너지를 대입하면 물질이 유도되는 식이지요.
앨런그린스펀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느낀 생각.
미국이라는 대륙에도, 앨런같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것.
앨런 같은 사람을 보호할 시스템과 안목가진 자들이 약간 있다는것.
기라성같다고 헛소리하는 경제학 경영학교수들의 수작은
르페님 주장대로 '시장'의 본질을 모르는 소리.
앨런이 '중앙은행의 이자율'이라는 툴로 시장의 자본흐름의 속도를
'제어'했다는것이 중요.
어떤 시공간에서도 상위단계로의 도약. 그도약으로 인한 잉여가
다시 사회로 재투자되는 구조. 나무가 풍성하게 씨앗을 잉태하고
온 대지에 꽃가루를 뿌려대고 긴 겨울을 맞듯.
그 낭비와 갈급의 순환을 잡아챈다면.
우쭐해지지 않고, 조로하지도 않으며, 주춤거리지 않는
도약.
대략
맞는 컨셉 같소.
장비가 있는 자의 포지션과
그것이 없는 자의 포지션은 확연히 다르오.
장비가 있는 자는 보통
좌와 우, 형과 아우의 대립에서 양자를 동시에 통제하려고 하며
이를 위해 딱 중앙에 버티고 서되
혹 가운데 끼어죽는 불상사가 생겨나지 않도록
기어코 높은 데를 기어올라가서 아래를 한 눈에 내려다보오.
전체의 움직임에 따라 자기 포지션을 지속적으로 반걸음씩 미시조정하오.
유연하게 변화의 흐름을 타는데
파도타기하듯 위태롭지만 의연함이 있소.
장비가 없는 자는 보통
벽을 등지고 귀퉁이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적을 미리 파놓은 해자로 유인하기 위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악을 쓰되 소리를 매우 지르오.
적이 다가오면 발목을 잡아 함정에 빠뜨리려 하는데
안 되면 될때까지 이를 반복하오.
절대 포지션을 바꾸지 않소.
만약 포지션을 바꾸면 반드시 변절의 형태가 되오.
조금의 변화도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스레 자기 포지션을 지키지만
어느날 봄볕에 눈녹듯 포지션이 소멸하여 없어지게 되오.
최고의 글입니다.
이상한 질문 같겠지만,
인간의 뇌구조가 원래 연역이 안 된다면, 대체 동렬옹은 어떻게 연역을 하게 된 것이오?
동렬옹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 글들을 보면 아무래도 '난 원래부터 연역형 인간이었지' 필이 나더이다.
인간의 뇌기능 자체가, 뇌구조 자체가 연역을 못하게 되어있다는 이야기는 동렬옹이 이전에 아기는 누구나 연역을 한다고 한 말과 어긋나지 않소? 인간의 뇌기능 자체가 구조적으로 연역을 못하게 되어 있다면, 대체 동렬옹은 어떻게 그것을 하는 것이오?
내 생각은 이렇소. 인간은 누구나 연역이 가능하다. 단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선 뇌기능 상의 선천적인 '장애'가 없어야 하고, 부모의 양육, 사회의 교육 시스템에 의해 타고난 연역 능력이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 즉, 개인적 차원과 집단적 차원의 조건이 맞아 떨어질 때, 연역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소. 즉 뇌의 선천적인 장애가 없는 이들은 '이상적'인 환경 내에선 누구나 연역이 가능하다고보오.
암튼 이 질문은 딴지 걸자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던지는 질문이오.
위의 글만 읽으면 '깨달음'이란 어떤 이벤트가 '원래'는 불가능한 연역적 사고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처럼 들리오.
하지만, '원래'는 가능한 연역적 사고가 잘못된 양육과 사회화 과정 속에서 퇴화해 있다가 '깨달음'이란 계기로 활짝 피어난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