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을 만든다면
구조주의 그룹이 세력화 하려면 강령이 필요하다. 우리가 직접 정치에 나서지는 않아도 정치적 의미의 결사체는 필요하다고 본다. 그 이전에 ‘정치의 본질은 무엇일까’를 탐구해 봄이 또한 가당하겠다.
애초에 정치가 탄생하는 지점이 어디냐다. 무사는 칼이 있어야 무사다. 당원은 무엇으로 사는가? 당원의 기득권이 있어야 정당이 발생한다. 무사의 칼과 같은 뭔가 실체가 있어야 한다.
한국의 당원들은 당비를 내지 않는다. 실로 말하면 아직 당이 덜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가짜다. (민노당은 3만 5천 당원이 당비 낸다지만 나는 그것도 본질에서는 허당이라고 본다.)
진짜 정당은 한국에 없다. 우리가 진짜를 만들어 가자면 무엇이 필요한가? 자발적으로 당비를 내게 하자면 무언가 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당원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신나치가 발호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그들은 주로 약자를 공격한다. 만만한게 외국인 노동자다. 그들 위에 밟고 올라서려 한다. 그들의 악행이 내가 보기에는 가련한 몸부림으로 보인다. 왜?
지식인은 글을 무기로 삼는다. 지식인 집단은 본질에서 연대되어 있다. 지식이 무사의 칼이요 병사의 총이다. 그러므로 지식인은 굳이 정당에 들지 않아도 본질에서 정당원이나 매 한가지다.
실제로 당원 이상으로 활동한다. 당적은 없어도 선거 때 영향력을 행사한다. 일반 대중은? 지식이 없고,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사람들은? 그들도 무장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약자를 괴롭힌다.
기성질서가 그들을 바로잡지 못한다. “니들이 나빠. 틀렸어. 나치즘은 안돼!” 하는 훈계나 선언은 먹히지 않는다. 공허할 뿐. 그들은 뭔가 구체적인 수단을 손에 쥐어야 마음을 돌린다.
그렇다! 그들에게는 자존감이 필요하다. 그냥 ‘너 잘났어’하고 추켜세운다고 자존감이 얻어지지 않는다. 지식인은 연대되어 있다. 조직이 있다. 내부적인 서열이 있고 각자의 포지션이 있다.
그게 있어야 자존감을 회복한다. 세력을 이루어야 한다. 세력이 없기 때문에 억지 세력화를 위해 그들은 폭력을 동원한다. 폭력을 원하는게 아니라 폭력이 공동체에 조장하는 긴장을 원한다.
월드컵이 벌어지면 함께 응원한다. 그때 그들은 자존감을 느낀다. 뭔가 세력화 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게임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들은 공허감을 맛보고 추락한다.
폭력이 도시의 공기를 긴장시킨다. 그들은 원시의 본능을 따라 패거리를 이루고 소속감을 느끼며 자존감을 맛본다. 그래서 그들은 발호한다. 이것이 정치의 적나라한 본질과 닿아있다.
우리가 정치적 결사체를 성공시키려면 그러한 본질을 확보해야 한다. 첫째 개인에게 자존감을 주어야 하고, 둘째 연대하여 세력화 해야하고, 셋째 그 세력이 나아가는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민노당은 지식집단과 노조 조직으로 결사한 집단의 동거다. 그들은 자존감이 있고 세력화 되어 있다. 민노당은 이미 일정부분 정당의 본질을 확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완전하다. 수만 당원이 있다지만 다들 자발적인 당비납부자일까? 이미 존재하는 기성의 조직을 정당 안으로 끌여들인 것이다. 기성 조직이 있기 때문에 자발적 당비 납부가 가능하다.
이는 보편적이지 않은 것이다. 민노당의 방식은 일종의 편법이다. 기성 조직 바깥에 있는 광범위한 대중을 끌어들일 수 없다. 5프로 지지가 민노당 방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의 한계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진성당원 없는 사이비 집단이다. 그렇다. 우리도 대중들에게 무언가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보편성 있는 정치의 동인을 제공할 수 있는가?
원시의 본능을 따라간 신나치의 일탈을 막고, 틈새시장을 개척한 민노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사이비를 퇴치할 수 있는 우리의 본실력은? 보편성 있는 정치의 토대는?
무엇보다 우리는 자유주의를 지향한다. 왜냐하면 ‘자유’ 개념이야 말로 그러한 정치의 본질과 닿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민노당의 지식 결사체, 노조조직 결사체도 그러한 정치의 본질과 닿아있다.
그러나 지식집단과 노조조직은 특수성이 강하다. 대중적이지 않다. 국민 대다수가 지식인이 될 수도 없고 노조원이 될 수도 없다. 국민 일반을 그러한 짜여진 틀에 가두려고 한다면 위험하다.
민노당 틈새시장 말고 광장에서 말해야 진짜다. 지식인집단, 노조 따위 특수집단 말고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본질은 자유밖에 없다. 자유는 자존감을 줄 수 있고 세력화의 핵이 된다.
사회주의는 복지를 줄 수 있지만 그것은 공공시설 비슷한 것이어서 개인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정치의 본질과 닿아있지 않다.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한 단계 내려간 정책이다.
정책은 하부구조다. 상부구조의 건설이 필요하다. 애초에 정치 그 자체를 출범시키게 하는 본질 말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정책은, 정치가 출범해서 진도를 한참 나간 상태에서 나올 말이다.
우리가 확보해야 하는 것은 뿌리다. 정책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지금 정치의 뿌리가 없어서 말라죽을 판인데 복지정책이나 감세정책 따위로 화려한 꽃을 피워서 뭘하나 말이다.
무사에게 칼을 주고, 병사에게 총을 주듯이, 개인에게 구체적인 무언가를 손에 쥐어주어야 정당이 발생한다. 그래야 나치의 발호와 같은 반사회적 일탈을 막을 수 있다. 정치가 뿌리내릴 수 있다.
지역당인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지역이권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서울대는 공부를 시켜준다고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라이선스를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들춰보면 보이는 그런거 있다.
자유주의는 무언가 구체적인 것을 주는 것이다. 미국이라면 신대륙으로 건나간 사람에게 서부의 광활한 땅을 개척하든, 경작하든, 팔아먹든, 지지고 볶든 알아서 하도록 그 권리를 주는 것이다.
정치는 개인에게 무언가를 주어야 하며 그것으로 개인이 무장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유주의로 갈 수 밖에 없다. 자유는 그냥 ‘맘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개인이 무장하라는 것이다.
발명가는 특허권으로 무장하고, 작가는 저작권으로 무장하고, 장삿꾼은 소유권으로 무장하고, 대중은 인권으로 무장한다. 정치에 있어서의 자유는 투쟁의 무기다. 병사의 총이고 무사의 칼이다.
정치는 룰이다. 룰은 분배과정에서 생긴다. 분배하려면 생산이 있어야 한다. 낳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는 상태에서는 룰도 없다. 정치 필요없다. 낳음이 시발점이다. 낳게 하는 것은 에너지다.
에너지의 흐름이 중요하다. 자기 내부에 에너지가 가득찬 사람은 그것을 발휘할 무대를 세팅하려 하므로 필연 자유주의자가 된다. 그게 없는 사람은 기성질서에 편입되려 하니 보수가 된다.
좌파다 우파다 하지만, 실제로는 에너지가 없는 자가 편입되고자 하는 기성질서다. 지식의 질서에 편입되면 좌파가 되고 자본의 질서에 편입되면 우파로 불린다. 둘다 에너지 없는 껍데기들이다.
우리는 실제로 에너지가 있는 그룹이다. 생산이 있다. 낳음이 있다. 창조가 있다. 혁신이 있다. 우일신이 있다. 증폭이 있다. 공명이 있다. 구조론이 구조를 최적화 하여 에너지를 생산한다.
생산한 것을 분배하기 위하여 룰을 제정함이 정치다. 그러므로 룰은 마땅히 생산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 바로 그것이 자유다. 자유주의란 생산의 법칙, 에너지의 법칙, 가치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다.
물론 좌파가 주장하는 지식도 생산이 되고, 복지와 문화도 인간에 대한 재투자라는 점에서 놀랄만큼 높은 생산성이 있다. 막연히 지식의 우위를 주장하고 복지를 강조함이 아니어야 한다.
그것이 생산의 법칙을 따르고 에너지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즉 그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이어야 한다. 좌파가 주장하는 지식, 복지, 환경, 문화야 말로 모든 생산의 토대다.
자연의 본래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장하는 자유는 자연이다. 자연의 에너지 흐름이 인간의 자유로 나타난다. 그것은 지식과 교육과 의료와 복지와 문화를 포함 일체의 가치창출, 낳음이다.
우파는 늘 생산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진보의 토대 위에서 가공된 2차생성물을 뜯어먹으려는 수작이다. 우파가 주장하는 생산은 남이 생산한 것을 전여옥식으로 가로채는 것이기 쉽다.
부동산 투기가 대표적이다. 생산하지 않고 남이 생산한 가치를 중간에서 가로챈다. 실제로는 대한민국 전체의 가치가 상승했는데 뒤로 협잡하여 강남이란 좁은 구역에 몰아서 국자로 퍼먹는다.
자유주의는 자연주의다. 자유는 에너지 흐름을 존중한다. 자연이야말로 에너지 흐름에 의해 자연스럽다. 좌파는 자연의 유기적인 본질을 보지 않고 지식이 기능하는 특정 지점에만 방점을 찍는다.
우파는 자연스러운 생산의 토태를 훼손하면서 생산의 2차생성물을 두고 무리한 쟁투를 벌인다. 인간을 존중하고, 환경을 지키고, 지식의 까탈스러움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생산의 근본이다.
도요타 사태에서 보듯이 우파의 대충주의가 생산을 죽이는 리스크다. 미국쇠고기에 맞서는 까다로운 입맛이 생산을 살리고, 삶을 살리고, 자연을 살린다. 만유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전모를 보면 생산 하나로 전부 연결되어 있다. 겉으로는 생산을 표방하지만 우파의 무리는 그게 1층의 대들보 빼서 2층을 올리는 거다. 좌파는 생산 자체를 반대하는 무리를 저지른다.
노예가 자유를 구함은 자신이 생산하기 때문이다. 일체의 권리는 생산에서 비롯된다. 지식인이 강단에서 제자를 모아 세력을 꾸린다면, 작가가 저술활동을 한다면 역시 생산에 따른 권리가 발생한다.
좌파와 우파의 갈등이란 결국 지식생산자와 재화생산자 사이의 갈등에 다름 아니다. 어느 쪽이든 생산에서 비롯된다. 생산은 자연의 에너지 흐름에서 유도되고 그것이 인간에게 반영되면 자유다.
농민이 토지를 일구면 경작권이 발생한다. 상인이 시장에 물건을 유통하면 가격에 대한 조정권을 가진다. 모든 권리는 결국 가치의 생산에서 비롯된다. 생산에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생산자는 일체의 부당한 중간 가로채기 도둑들에 맞서 싸울 권리가 있다. 그것은 정당하고 자연스럽다. 자연의 이치에서 유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소리높여 주장해야 할 자유다.
진보가 강조하는 복지는?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정책이다. 토대가 아니라 하부구조다. 이차적인 것이다. 뿌리가 아니라 꽃이고 열매다. 꽃과 열매도 강조되어야 하지만 정치의 출발점은 따로 있다.
구조주의는 전체를 한 줄에 꿰어 하나의 논리로 일관되게 설명한다. 좌파는 생산의 근본 토대를 챙기는데 강점이 있고, 우파는 현장에 가까우니 현상에 대한 빠르고 유연한 대응에 강점이 있다.
생산이라는 근본을 잊은 좌파는 쓸모가 없다. 현장의 유연함을 잊고 경직된 우파는 최악이다. 이들은 그냥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것이 낫다. 구조주의는 이들 사이에서 교통정리를 해야 한다.
정책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아직 정당은 아니니까 관두기로 하자. 정책은 이차적인 것이고 토대가 중요하다. 세상을 어느 지점에서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 자유인과 노예가 있다. 노예를 반대한다.
자체엔진이 있고, 내부동력이 있고, 에너지가 있는 진짜배기 세력과 에너지가 없어서 기성질서에 편입되려하는 떨거지가 있다. 우리는 에너지가 없어서 본능적으로 줄 서는 떨거지에 반대한다.
● 일체의 노예주에 대항한다. - 노예주는 재벌, 기득권, 관료, 인간을 억압하는 권위적인 기성질서다.
● 일체의 자발적 노예를 반대한다. - 자발적 노예들은 친일, 친미, 조중동, 지역주의, 가스통 할아버지들이다.
● 일체의 인신에 대한 통제를 반대한다. -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학교의 두발단속부터 여성에 대한 순결강요까지.
● 인위적인 조직과 통제보다 이심전심에 의한 무위의 소통을 추구한다. - 선거, 투표, 제도, 규범 등 인위적 의사결정기구가 만능은 아니다.
● 자연스런 에너지의 흐름을 따라간다. - 집단지성, 이상주의, 미학적 실천에 의해 우리의 꿈은 이루어진다.
∑ |
질 - 에너지를 주는 것(자연, 환경, 신, 역사, 진보, 문명, 과학)
입자 - 통일성을 주는 것(국가, 가문, 성별, 인종)
힘 - 선택할 수 있는 것.(직장, 연인, 거주지, 취미 등등)
운동 - 뒤따라 오는 것.(친구, 형제, 후배, 동기)
양 - 증가하는 것.(나이, 주름살, 뱃살, 야동)
뭐 꼭 공동체를 분류한건 아니지만
분류기준은 에너지, 통일성, 선택지, 뒤따름, 증가함으로 보면 됩니다.
인류>> 국가를 초월한 인류 전체의 과학기술의 진보가 에너지를 주니 인류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민족(국가)>> 민족이나 국가 따위가 통일성을 주지만 지식인들과 부자들은 자신을 초국가적 존재로 여길 터
부족(단체)>> 부족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에겐 부족이 국가겠고. 어떤 사람에게는 부족이 세계일수도.
회사처럼 자신이 선택할 수 있어야. 서울로 지방으로 이사할 수 있으니 지역은 선택가능하고.
가족(식구/팀)>>가족은 결혼하면 저절로 따라오니. 팀원, 조직원, 동료는 입사하면 저절로 따라오니.
짝'>>> 부부 뿐 아니라 친구나 동료나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도 그 상황에서는 짝이겠고.
공동체를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이라 하면,
발생경로를 따른 다면, "인류"에서 "짝"까지겠군요.
"인류>> 민족(국가)>> 부족(단체)>> 가족(식구/팀)>> 짝' 정도로 정리하면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