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깨달음 인간들에게 실망한지 오래다. 아는척 하는 사람이야 몇 있지만 그들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문제를 그들이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 피가 끓어오르는 이야기, 가슴이 뛰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다들 시시한 이야기나 하고 있더라. 70억이나 있는데. 어디에 한 명쯤 있을 것도 같은데, 내가 찾는 진짜는 없더라. 깨달음의 관점에서 처음 포착한 것은 ‘나와 타자의 경계’에 대한 것이었다. 나와 나 아닌 것이 만나는 접점이 있다. 그 접점이 명확하지 않으니 다들 어색하게 겉돌고 있다. 불안하다. 타격받았다. 내게는 이 문제가 중요했다. 방아쇠처럼 딱 걸려줘야 한다. 클릭하면 페이지가 척척 떠줘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처럼 미끄덩이었다. 자연스럽지가 않다. 억지 미소를 짓거나 괜히 친한 척 하거나 그러면서 빠져나간다. 혹은 공연히 화를 내기도 한다. 괴상한 물타기 장면들이다. 다들 나름대로 어떻게 해보려고 노력하고는 있더라. 슬프다. 왜 세상 바깥으로 성큼 걸어나가버리지 못하는가? 어수선하게 돌아가는 지구에서 냉큼 하차해 버리지 못하는가? 그런 이상한 게임에 마지 못해서 끌려들어가고 있는 꼬라지들 하고는. 결국 사람들과 친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세상이 어떻게든 돌아간다는게 신기하긴 하다. 나와 타자가 만나는 어설프고 위태로운 접점이 있으니 본능, 사랑, 의리, 신뢰, 예의 따위로 얼버무린다. 그렇게 얼버무려도 되느냐는 말이다. 예수는 사랑하라고 했다. 우습지 않나? 할말이 있는데, 진짜배기 할 말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한다. 예수가 그 말을 하려고 했나? 그런 것인가? 아니잖아. 소크라테스의 데뷔도 우습고 석가의 장기자랑도 우습다. 지혜고 열반이고 나발이고 국 끓여 드시라. 그게 뭐 10원짜리 구슬 자랑하는 꼬마가 하는 짓이 아니던가? 할 말이 있는데 끝내 말하지 못하네. 타인은 적이다. 여기서부터 진짜가 시작되는 거다. 이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남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치자. 나는 그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다.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느냐? 네가 남을 사랑하기에 앞서 너 자신은 사랑하느냐? 아마 YES라고 답할 거다. 그런데 왜 굴복했느냐 말이다. 그건 진 거다. 남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너의 승리가 된다. 그 전에 나를 사랑하는 순간 너는 굴복한 것이다. 자신의 본능에 굴복한 것이다. 기왕에 태어났으니 일단 살아는 봐야 되겠다고? 너 패배! 배가 고프니 먹겠다고 말하는 순간에 너는 굴복한 것이다. 생존본능에 굴복한 것이다. 왜 굴복하느냐 말이다. 타인은 지옥이다. 여기서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너 자신도 타인이다. 나는 나의 타인이다. 내가 왜 내게 복종하느냐 말이다. 고프다고 먹고 졸리다고 자고 꼴리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굴복한 것이다. 사랑하기 앞서 사랑할 자격을 묻는다. 노예에게는 사랑할 자격이 없다. 예수 너는? 지혜하기 앞서 지혜할 자격을 묻는다. 소크라테스 너는? 노예인 이솝은 비굴하게 말한다. 노예가 감히 임금 앞에서 말하면 죽음이니까 돌려서 말하는 것이다. 이솝의 승리다. 열반에 앞서 열반할 자격을 묻는다. 석가 너는? 개가 깨달아봤자 깨달은 개다. 돼지가 깨달아봤자 깨달은 돼지다. 인간이 깨달아봤자 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이기 때문에 자격이 없다. 70억 분의 1이기 때문에 자격이 없다. 예수는 사랑할 자격이 없고, 소크라테스는 지혜로울 자격이 없고, 석가는 깨달을 자격이 없다. 타인은 적이다. 타인은 지옥이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대화하면 이미 진 거다. 말 걸면 이미 패배다. 세상에 말 걸면 이미 진 것이다. 의사결정권을 획득하는 문제다. 어떤 것을 결정하기 전에 권한을 획득해야 한다. 파종하기 전에 농부가 되어야 한다. 칼을 쓰기 전에 무사가 되어야 한다. 그리기 전에 화가가 되어야 한다. 노래하기 전에 가수가 되어야 한다. 보통은 세상과의 합일을 말한다. 흥? 누가 널 끼워주기나 한 대? 세상이 미쳤다고 널 끼워준대? 너는 노예잖아. 나와 타자가 만나는 접점에서 우주는 무너지고 만다. 의사결정권의 획득에 앞서 네가 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난 네가 아니거든. |
글쎄요. 엉뚱한 말씀인듯.
제 이야기는 그냥 제가 다섯살 때 느낀 것을 말하는 겁니다.
다섯살 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면 되게 뻘쭘할듯.
그래서 결국 저는 아예 말을 안 했죠.
그래서 한국말 발음이 서투른데.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면 저는
아 제자가 한 5천명 붙으면 저렇게 말해주는구나 하고 알아듣죠.
그런 걸 말하는 겁니다.
좋은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먹는 것은 아기곰이고
배가 고파도 안 먹는 것은 엄마곰입니다.
엄마곰에게는 새끼를 먹이려는 자기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리를 5천명 얻은 예수의 계획을 봐야 합니다.
사랑하라고 말했다고 사랑하면 초딩이고
그 예수의 계획에 동참하는게 진짜죠.
좋은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게
아기곰이 먹는 찌찌에 불과하므로 의미는 없습니다.
아기에게는 엄마가 타인이지만
엄마에게는 아기가 타인이 아닙니다.
엄마가 되려면 인류가 지혜를 합쳐 알파고를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팀이 작동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팀에 들어야 자격이 있는 거죠.
그 팀의 계획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가 사랑이 어떻고 해봤자 주어도 없는데 동사가 앞질러 간 겁니다.
그 말이 옳다고 해서 따라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여기서 논하는 것은 인간의 근본문제는 타자성의 극복에 있으며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는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 만큼의 간극이 있으며
어떤 사람이 옳은 말을 하면 침을 뱉어주고 반대로 가는게 정상이며
그 넘을 수 없는 벽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하는 문제
말하기 앞서 주어를 건설하는 문제
내 생각은 이렇다 하고 내 생각을 말하면 곤란하고
진리의 생각을 말해야 합니다.
거대한 계획을 얻은 사람이 발언권을 가지는 거.
그 계획을 먼저 말해야 한다는 거죠.
그 계획을 추진하는 주최측에 드는 문제가 인간의 근원적인 물음입니다.
가짜 이야기들. 너가 나고 타인이 자신의 거울이니 배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란 쓰레기 명상가들이 짖는 이야기들.
의사결정권을 획득하지 못한 노예들이 말하는 건 가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