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의 본질문제는 어떻게 둘을 하나 속에 집어넣는가이다. 밀레의 만종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숨은 메시지를 잘 숨겨서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하나 속에 둘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는 그림이요 하나는 메시지다. 만종의 메시지는 숨겨져 있다. 만종을 보는 순간 메시지는 전달되었지만 그림을 보는 관객은 그러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그림이 잘 잊어지지 않는다. 그때 쯤 가서야 관객은 '아하 밀레가 나 모르게 그림 속에 무언가를 집어넣었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이걸 기술이라고 한다.
'art'란 '잇는다'는 뜻이 있는데 잘 이어붙이는 기술이다. 즉 예술의 원래 의미는 기술인 것이다. 그 기술은 숨겨서 집어넣는 기술이다.
숨기지 않으면? 거부감을 유발한다. 분리된다. 그림은 그림대로 메시지는 메시지대로 떨어져 나간다. 하나 속에 숨은 둘이 서로 마찰을 일으켜 튀어나간다.
어떻게 둘이 서로 마찰하지 않게 하나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가이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장르를 막론하고 음악이든 소설이든 문학이든 모든 미학분야에 공통되는 점이다.
이렇게 잘 숨겨진 것을 조화(調和)라고도 하고 어울린다고도 하고 앙상블이라고도 하고 아름다움이라고도 한다.
즉 미는 둘 이상의 개체가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는 데서 서로 마찰하지 않고 조화하고, 어울리고, 앙상블이 되고,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말은 그대로 안는다는 뜻이다. 즉 둘을 포용한 하나의 그릇이 그 둘을 감싸안는다는 뜻이다.
미인이 아름답다는 것은 미인이 무언가를 감싸안고 있다는 것이다. 추녀는 보는 사람의 얼굴을 돌리게 만든다. 미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다섯명이 있다. 그 중에 한명의 미인이 있으면 이 다섯이 감싸안아진다. 즉 그룹이 분열되지 않는 것이다.
다섯명이 있다. 그 중에 한명의 미인도 없으면 이 다섯은 뿔뿔이 흩어진다. 곧 그룹이 분열되는 것이다.
미란 단순하게 말하면 사람을 한 곳으로 끌어모으는 힘이다. 이것을 매력이라고 한다. 이러한 점은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것이다.
미를 주관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미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밀레의 만종은 숨겨져 있다. 열번 쯤 보지 않으면 만종에 교회의 종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만종이란 저녁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웬만해서는 그 그림이 왜 저녁종인지 알 수 없다. 이렇듯 미는 숨겨져 있는 것이다.
만약 숨겨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 커다란 교회의 종탑을 그려놓았다면?
(원래 밀레에게 그림을 주문한 사람은 종탑을 크게 그려달라고 주문했다. 밀레가 종탑을 작게 그리자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화를 내고 그림값을 지불하지 않았다. 밀레는 그림을 친구에게 그저 줘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커다란 교회의 종탑을 본 관객들은 '아 또 지긋지긋한 목사의 설교를 들어야 하는구나'하고 짜증을 냈을 것이다. 이건 하나 안에 둘이 들어가지 못하고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다.
의자는 하나인데 두 사람이 그 의자를 같이 사용해야 한다고 치자. 분명히 마찰이 일어난다. 초등학생이라면 가운데 금을 쫙 그어놓고 "넘어오면 죽어"하고 위협할 것이다.
어떻게 그러한 마찰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가이다. 그 의자의 한쪽에 미인이 앉는다면 서로 그 옆자리에 앉으려고 덤빌 것이다.
미인이 악취를 풍긴다면 도망갈 것이다. 향기를 풍긴다면 다가올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다. 미라는 것은 다가갈 수 있게 접근할 수 있게 공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간단하다. 둘이 있다. 그 둘을 하나의 그릇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가이다.
두 사람이 한 집에 산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미다. 이런 식이다.
두 사람이 한 집에 오래도록 산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정이다. 그러므로 정은 미다. 이런 식이다.
사랑이나 정이라는 접착제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미는 이런 식으로 숨겨진다. 만약 수갑을 채우거나 개처럼 목줄로 묶는 방법으로 두 사람을 한 집에 가둬둔다면 그 수갑을 절단하고 그 목줄을 풀고 달아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혹은 정이라는 접착제는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그 수갑과 족쇄를 풀고 달아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인 것이다.
콜라와 햄버거는 앙상블이다. 햄버거의 텁텁한 맛과 콜라의 청량한 맛이 서로의 단점을 없애고 장점을 돋보이게 한다. 둘은 붙이지 않아도 달라붙는다. 이렇듯 하나의 점심상 안에 콜라와 햄버거라는 별개의 두 개가 공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미다.
미는 주관이 아니라 객관이다. 그 접착제가 되는 사랑이나 정은 숨겨져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나타내고 표현하고 전달하기 어려워서 주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 속에 둘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는 그림이요 하나는 메시지다. 만종의 메시지는 숨겨져 있다. 만종을 보는 순간 메시지는 전달되었지만 그림을 보는 관객은 그러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그림이 잘 잊어지지 않는다. 그때 쯤 가서야 관객은 '아하 밀레가 나 모르게 그림 속에 무언가를 집어넣었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이걸 기술이라고 한다.
'art'란 '잇는다'는 뜻이 있는데 잘 이어붙이는 기술이다. 즉 예술의 원래 의미는 기술인 것이다. 그 기술은 숨겨서 집어넣는 기술이다.
숨기지 않으면? 거부감을 유발한다. 분리된다. 그림은 그림대로 메시지는 메시지대로 떨어져 나간다. 하나 속에 숨은 둘이 서로 마찰을 일으켜 튀어나간다.
어떻게 둘이 서로 마찰하지 않게 하나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가이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장르를 막론하고 음악이든 소설이든 문학이든 모든 미학분야에 공통되는 점이다.
이렇게 잘 숨겨진 것을 조화(調和)라고도 하고 어울린다고도 하고 앙상블이라고도 하고 아름다움이라고도 한다.
즉 미는 둘 이상의 개체가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는 데서 서로 마찰하지 않고 조화하고, 어울리고, 앙상블이 되고,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말은 그대로 안는다는 뜻이다. 즉 둘을 포용한 하나의 그릇이 그 둘을 감싸안는다는 뜻이다.
미인이 아름답다는 것은 미인이 무언가를 감싸안고 있다는 것이다. 추녀는 보는 사람의 얼굴을 돌리게 만든다. 미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다섯명이 있다. 그 중에 한명의 미인이 있으면 이 다섯이 감싸안아진다. 즉 그룹이 분열되지 않는 것이다.
다섯명이 있다. 그 중에 한명의 미인도 없으면 이 다섯은 뿔뿔이 흩어진다. 곧 그룹이 분열되는 것이다.
미란 단순하게 말하면 사람을 한 곳으로 끌어모으는 힘이다. 이것을 매력이라고 한다. 이러한 점은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것이다.
미를 주관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미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밀레의 만종은 숨겨져 있다. 열번 쯤 보지 않으면 만종에 교회의 종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만종이란 저녁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웬만해서는 그 그림이 왜 저녁종인지 알 수 없다. 이렇듯 미는 숨겨져 있는 것이다.
만약 숨겨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 커다란 교회의 종탑을 그려놓았다면?
(원래 밀레에게 그림을 주문한 사람은 종탑을 크게 그려달라고 주문했다. 밀레가 종탑을 작게 그리자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화를 내고 그림값을 지불하지 않았다. 밀레는 그림을 친구에게 그저 줘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커다란 교회의 종탑을 본 관객들은 '아 또 지긋지긋한 목사의 설교를 들어야 하는구나'하고 짜증을 냈을 것이다. 이건 하나 안에 둘이 들어가지 못하고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다.
의자는 하나인데 두 사람이 그 의자를 같이 사용해야 한다고 치자. 분명히 마찰이 일어난다. 초등학생이라면 가운데 금을 쫙 그어놓고 "넘어오면 죽어"하고 위협할 것이다.
어떻게 그러한 마찰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가이다. 그 의자의 한쪽에 미인이 앉는다면 서로 그 옆자리에 앉으려고 덤빌 것이다.
미인이 악취를 풍긴다면 도망갈 것이다. 향기를 풍긴다면 다가올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다. 미라는 것은 다가갈 수 있게 접근할 수 있게 공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간단하다. 둘이 있다. 그 둘을 하나의 그릇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가이다.
두 사람이 한 집에 산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미다. 이런 식이다.
두 사람이 한 집에 오래도록 산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정이다. 그러므로 정은 미다. 이런 식이다.
사랑이나 정이라는 접착제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미는 이런 식으로 숨겨진다. 만약 수갑을 채우거나 개처럼 목줄로 묶는 방법으로 두 사람을 한 집에 가둬둔다면 그 수갑을 절단하고 그 목줄을 풀고 달아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혹은 정이라는 접착제는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그 수갑과 족쇄를 풀고 달아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인 것이다.
콜라와 햄버거는 앙상블이다. 햄버거의 텁텁한 맛과 콜라의 청량한 맛이 서로의 단점을 없애고 장점을 돋보이게 한다. 둘은 붙이지 않아도 달라붙는다. 이렇듯 하나의 점심상 안에 콜라와 햄버거라는 별개의 두 개가 공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미다.
미는 주관이 아니라 객관이다. 그 접착제가 되는 사랑이나 정은 숨겨져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나타내고 표현하고 전달하기 어려워서 주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