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밀도 인간은 불완전하다. 고로 완전하고자 한다. 왜 불완전한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가득 채움으로써 완전해질 수 있다. 존재의 밀도가 있다. 밀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채워넣을 수 있다. 인격의 밀도를 채우는 것은 자유다. 인생의 밀도를 채우는 것은 사랑이다. 정신의 밀도를 채우는 것은 지식, 사회의 밀도를 높이는 것은 복지, 존재의 밀도를 높이는 것은 소통. 존재는 소통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건물의 완성은 얽어진 기둥 사이에 벽체를 채워넣음으로써 가능하다. 사회의 완성은 규범적 질서의 뼈대에 공동체적 가치의 살을 채워넣음으로써 가능하다. 미래의 완성된 모습에 대한 밑그림을 지금 그려놓아야 한다. 그것이 이상주의다. 꿈으로 닦은 터의 넓이 만큼, 희망으로 그린 설계도 만큼 채워넣을 수 있다. 철학은 질문하고 미학은 응답한다. 완성된 경지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고 묻는 것이 철학이라면 완성의 경지는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응답함이 미학이다. 완성의 경지를 알아보는 눈이 심미안이다. 완성의 마음에 도달함이 깨달음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심미안의 눈을 뜰 때 완성의 마음에 도달한다. 일찍이 서구는 인간 사회의 완성된 모습을 유토피아에서 찾았고 동양은 내면적 인격의 완성된 모습을 군자상에서 찾았다. 공자의 유가는 하늘의 완성된 모습에서 규범적 질서를 빌어 인간 사회의 완성된 모습이 어떠하여야 하는지를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실존 그 자체에 대한 이해 없이 참된 완성의 경지를 찾을 수 없다. 먼저 인간이라는 불가해한 존재에 대한 탐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질서에서 답을 구하려는 유가적 태도로는 소통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뼈대를 얽을 수 있을 뿐 거기에 살을 채워넣을 수 없다. 노자의 도가는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도리어 진정한 완성의 비전을 얻었다. 적나라한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데서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일찍이 존재의 완성된 모습을 신(神)의 이름으로 그려내곤 했다. 신이 100프로라면 인간은 99프로다. 소통이 그 마지막 1프로를 채워넣는다.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라 했으니. 결핍의 의미를 알 때 진정한 완성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소통이 결여된 그것은 오히려 완전하지 않다. 하늘의 완성된 경지를 클래식에 담은 것이 서구의 고전주의다. 반면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가는 갈망의 몸짓을 담아낸 것이 낭만주의의 생동함이다. 불완전을 거쳐간 완전이 진짜다. 소통이 그곳에 있다. 처음부터 완전하다는 것은 오히려 완전하지 않다. 협력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카톨릭의 우주관에 반영된 기독교 세계의 질서 개념과 그리이스의 이상주의가 완성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 고전주의와 계몽주의로 전개되었다. 그 반대쪽에서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진솔한 이해를 구한 것이 니체의 대들기다. 소통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서고 있다. 하늘의 본래 그러함에서 인간을 규율하는 논리가 유도된 것이 아폴론의 힘과 질서라면 인간의 발랄한 몸짓에서 동기부여된 것이 디오니소스의 미와 가치다. 인류의 진보는 힘의 뼈에 미의 살을 채우는 과정이다. 완전한 하늘의 질서가 뼈대를 드러내면 불완전한 인간의 가치가 그 빈 공간을 채운다. 그것이 소통의 진정한 의미다. 인간이라는 존재.. 통속적인, 너무나 통속적인 그리고 어리석은.. 모든 슬픔이 한 곳에 어우러져 나타나는 신비함과 성스러움. 자유라는 뼈대에 사랑이라는 살을 채워가는 것이 삶의 완성이다. 민주주의 룰이라는 뼈대에 공동체적 가치의 살을 채우는 것이 사회의 완성이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질서로 규범하여 뼈대를 얽고 가치로 살을 채워 존재 그 자체를 완성해 가는 부단한 과정이 소통이다. 존재는 위태로우나 소통의 밀도만큼 완전에 가깝다. 인간은 위태로우나 사랑의 밀도만큼 그리고 자유의 밀도만큼 완전에 가깝다. 존재의 밀도가 존재한다. 직류 마인드와 교류 마인드 직류는 불완전하고 교류가 완전하다. 시스템 구조의 최종적인 완성은 직류의 시스템을 교류의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한 인간의 마음에도 교류와 직류가 있고 한 사회의 질서에도 교류와 직류가 있다. 어떤 조직이든 어떤 공동체든 어떤 시스템이든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 전기를 움직이는 것은 밸런스의 원리다. 교류는 그 밸런스를 이루는 평형계가 1헤르쯔의 사이클 안에서 위상변화로 있고 직류는 그 평형계가 회로 안에 있다. 직류는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회로를 완성하려 한다. 교류는 도리어 장애물을 이용함으로써 고압의 낙차를 얻고 전압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방해자를 역이용하는 역설의 논리다. 직류의 마인드를 버리고 교류의 마인드를 얻을 때 진정한 소통은 가능하다. 최종적인 완성은 가능하다. 그것은 음(陰)과 양(陽)의 위상이 임금과 신하, 지휘관과 병사,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에 공존하게 하는 것이다. ● 직류의 회로 - 분별하여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나눈다.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 역할을 분담한다. ● 교류의 밀도 - 한 인간의 내면에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공존시킨다. 긍정과 부정, 포지티브와 네거티브가 공존한다. 버스는 운전자와 승객의 역할이 구분되지만 승용차는 운전자가 동시에 승객이 된다. 이렇듯 평형계를 구성소 내부에 집어넣는 것이 교류 마인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역할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병사가 동시에 간부의 역할을 하는 것이 교류 마인드다. 멀티 플레이어가 되는 것이다. 모든 직원이 CEO의 고민을 이해해야 한다. CEO를 대리하여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국민이 대통령의 관점에서 사고해야 한다. 교류는 흐르는 것이 아니라 진동하는 것이다.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계 내부의 밀도를 높여 장애물을 타고 넘는 것이다. 직류는 문제를 제거하거나 우회하지만 교류는 고압을 발생시켜 그대로 안고 넘어간다. 문제가 있어도 구태여 그것을 문제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긴장시키는 것이다. 사소한 문제로 다투던 사람이 게오르규의 25시적 상황에서는 강한 긴장으로 인해 다툼의 소지를 껴안은 채 넘어가는 것과 같다. 한국식 노는 좌우로 움직여도 나룻배는 앞으로 간다. 서양의 카누와 다르다. 노 젓는 방법이 다르다. 노가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범선은 뒷바람이 아니라 옆바람이 순풍이다. 맞바람을 받아도 앞으로 나아간다.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든지 돛단배는 항상 앞으로 나아간다. 진보적으로 대응해도 진보하고 보수적으로 대응해도 진보한다. 다만 역사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대응하지 않으면 반드시 퇴보한다. 보수적인 대응은 밸런스를 잃어 실패하게 되며 실패하지 않기 위해 결점을 보완하면 결국 진보적인 결과로 변하고 마는 역설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정책이 밸런스를 잃어 실패하게 될 때 실패하지 않기 위해 단점을 보완하면 역시 진보하게 된다. 역사는 항상 진보한다. 반면 역사의 도전에 대응하지 않고 방관하면 반드시 퇴보한다. 진보적으로 방관해도 퇴보하고 보수적으로 방관해도 역시 퇴보한다. FTA가 옳은가 그른가를 논함은 무의미하다. 다만 EU와 아세안과 메르코수르의 경제블록으로 재편되고 있는 시장환경에 적극 대응하는가가 중요하다. 교류의 마인드를 획득함은 진보와 보수가 갈등하고 논쟁하되 그 갈등과 논쟁이 치열할수록 대한민국호는 오히려 빠르게 앞으로 나아간다는 이치다. 논쟁하지 않고 갈등하지 않고 대응하지 않고 방관하고 침묵한다면 대한민국호는 여기서 주저앉고 만다. 논쟁은 우리의 몫이고 답은 시장이 결정한다. 직류는 회로의 정교함에 의존하고 교류는 고압으로 충전된 밀도에 의존한다.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와 관점이 다르다. 기업가의 마인드는 직류와 같아서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지만 하나의 문제를 해결할 때 마다 동시에 두 가지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그러므로 허약하다. CEO 대통령론은 위험하다. 정치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노무현 대통령도 정치를 아는 사람이 차기를 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한 분야의 전문가들은 직류의 마인드를 가진다. 지식인이나 학자나 기업의 CEO들은 플러스에서 마이너스로 가는 일방통행식 사고를 가진다. 반면 자영업자나 상인들은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공존시키면서 밸런스를 추구하는 교류의 마인드를 가진다.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소한다. 이명박의 방법은 청계천 노점상을 비워둔 동대문 운동장으로 옮기는 식의 정교한 회로구성의 방법이다. 이것이 직류의 마인드다. 노무현의 방법은 공동체에 긴장을 유발하여 문제를 문제삼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우회하는 것이 아니라 안고 가는 것이다. DJ는 FTA의 타결은 국운이 걸린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공동체에 강한 긴장을 유발하여 문제의 소지를 안은채 타고 넘는 교류의 마인드다. 이 도리를 모르면 정치할 수 없다. 핵문제나 파병문제 FTA 등은 손학규류 찌질이가 회로구성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이장과 군수’라는 영화가 있다. 초등학교 반장 출신이 반장 마인드를 유지할 때 이장 밖에 못 된다. 군수가 군수 마인드 유지한 채로는 장관도 어렵다. 기업가가 기업가 마인드 유지한 채로 서울시장 정도는 할 수 있어도 대통령은 될 수 없다. 정치는 원초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이다. 직류는 회로를 구성하여 폐쇄적으로 통제하고 교류는 긴장을 높여 개방적으로 제어한다. 일방향적 통제인가 쌍방향적 제어인가다. 가상적을 만들어 상황을 교착시키기. 동기를 유발하고 긴장을 조성하기. 신속한 의사결정과 쌍방향적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여 타개함은 교류의 제어다. 교류가 직류보다 더 상위의 개념이며 더 복잡한 구조를 이용한다. 더 완성된 구조다. 직류는 교류시스템의 일부를 발췌하여 이용하는 것이다. 교류가 안전하다. 직류는 위험하다. 번개와 정전기는 직류다. 일방향으로 진행하고 소멸할 뿐 되돌아오지 않는다. 직류는 일회용이다. 공격과 수비로 역할을 분담할 때 위험하다. 멀티플레이어의 역할공유가 안전하다. 정해진 포지션을 떠나 폭넓게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위험은 힘을 전달하는 관절 부분에서 일어난다. 직류는 관절이 있고 급소가 있고 회로가 드러나 있다. 급소를 공격하여 단번에 무력화시킬 수 있다. 교류는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을 때 플러스와 마이너스에 신경쓰지 않고 어느 쪽으로 연결해도 무방함과 같다. 평형계가 내부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안전하다. 모든 움직이는 것에는 내부에 평형계가 있다. 평형계가 외부로 노출되면 직류이고 내부로 감추면 교류다. 회로가 드러나면 직류고 감추면 교류다. 갑각류처럼 뼈가 밖으로 노출되면 역린을 찔린다. 말벌이 꿀벌 죽이든 단번에 섬멸한다. 포유류처럼 살이 뼈를 감출 때 안전하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발상이 직류 마인드라면 물은 바다에서 하늘로 올랐다가 다시 바다로 순환한다는 사고방식이 교류다. 모든 운동은 밸런스의 붕괴를 수반한다. 무너진 평형을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시스템 내부에 감출 것인가 아니면 겉으로 드러낼 것인가다. 피드백에 의한 가역과정, 쌍방향 의사소통과 공동체의 의사결정, 작용에 대한 반작용을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을 안으로 오므리는 것이 교류다. 물고기는 꼬리를 좌우로 흔들어 나아간다. 결코 앞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꼬리가 왼쪽으로 가도 진보하고 오른쪽으로 가도 진보한다. 직류로 젓는 서양식 배의 노잡이는 배가 움직이는 속도보다 빠르게 팔을 움직여야 한다. 느리면 엔진브레이크가 걸려 도리어 속도가 저하된다. 교류로 젓는 한국식 노는 천천히 저어도 빠르게 나아간다. 범선은 바람의 속도보다 빠르게 나아간다. 그것이 힘을 비축하여 두는 교류의 원리다.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가 발을 내미는 속도는 얼음을 지치는 속도보다 느리지만 빠르게 나아간다. 그러나 스케이트 보드는 직류이므로 속도를 축적할 수 없다. 돌고래는 꼬리를 슬슬 움직여도 시속 40키로로 나아간다. 그러나 서양식 노를 사용하는 조정경기의 선수는 언제나 배의 속도보다 빠르게 노를 저어야 한다. 직류를 해야할 시점이 있다. 직류는 일정한 범위 안에서만 작동한다. 군대의 조직체계는 직류여야 한다. 병사의 개인적 의견은 무시되어야 한다. 기업의 조직도 직류다. 지자체의 행정조직도 직류다. 직류의 회로구성으로 꼴찌를 2등까지 끌어올릴 수는 있어도 1등은 할 수 없다. 1등기업이 되려면 교류의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예술가와 정치가는 교류의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모든 창조적인 직업이 그러하다. 자전거가 먼저 균형을 잡아야 전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직류의 마인드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반대다. 전진해야만 균형이 잡혀진다. 물에 뜨는 방법을 알아야 헤엄칠 수 있고 공중에 뜨는 방법을 알아야 비행할 수 있다는 착각이 직류의 마인드다.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자전거의 운동을 통제하는 평형계가 운전자와 차체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지와 바퀴 사이에 감추어져 있다는 교류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직류는 한 방향으로 흐르므로 간부가 결재하기 전에 실무선은 움직이지 않는다. 교류는 쌍방향으로 흐르므로 실무진의 움직임을 보고 간부가 결재한다. 임금과 신하와 백성으로 구성된 봉건사회는 직류회로와 같다. 그러나 잘못이다. 개인이 그 인간의 마음 안에 완성된 회로를 가진다는 것이 민주주의다. 불완전한 세포들이 모여 완전한 하나의 인간을 이룬다. 그러나 그 세포 하나하나는 이미 내적으로 완전하다. 세포가 각각 독립적인 단위를 이루고 있다. 기계의 부품은 불완전하다. 전체가 조직되어야 비로소 완전해진다. 기계는 직류를 따른다. 반면 생명체는 각각의 세포가 완전하다. 생명은 교류다. 완전한 개인이 모여 또다른 완전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먼저 강해야 한다. ‘전체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전체를 위해’.. 이 공산주의 슬로건이야 말로 지극히 위험한 직류의 마인드다. 이러한 조직은 반드시 붕괴한다. ‘여왕벌은 꿀벌을 위해 꿀벌은 여왕벌을 위해.’ 이 수준으로는 벌떼의 군집을 벗어날 수 없다. 하나의 관절을 파괴하는 방법으로 전체를 무력화 시킬 수 있다. 인터넷 망은 과거의 PC통신과 달리 전체가 하나의 메인서버에 접속하지 않고 하나가 전체를 통제하지 않는다. 인터넷 망은 무력화시킬 수 없다. 개인은 약하지만 팀은 강하다는 일본인들의 사고가 직류 마인드다. 만능플레이어들이 모여서 최고의 팀을 만드는 것이 교류 마인드다. 모든 개인이 대통령 수준에서 고민해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그러하다. 4륜구동 차량처럼 네바퀴가 제각기 따로 구동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류의 원리를 알면 진보적인 정책을 써도 진보하고 보수적인 정책을 써도 역시 진보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역사의 진보는 진보적 혹은 보수적 정책 때문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대결에서 언제나 인간이 우위에 섰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중동과 수구떼의 발상법은 미국을 머리로 한국을 손발로 지정해서 전 세계를 하나의 전기회로로 구성하려 드는 직류의 마인드다. 좌파들의 발상법도 비슷하다. 공산주의의 수도인 구소련을 중심으로, 혹은 사민주의의 수도라 할 북유럽을 중심으로 세계를 단일회로로 구성하고자 한다. 세계는 하나의 단일회로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제각기 내부에 평형계를 감춘 독립회로인 채로 서로 소통한다. 문명은 기계가 아니라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기계는 불완전하고 생명이 완전에 가깝다.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세상을 기계로 보면 반드시 망하고 생명으로 보면 크게 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