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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3736 vote 0 2007.02.24 (21:44:36)

하지원의 기적
불길한 예언을 늘어놓는 늙은 무당들

한달 전.. ‘미녀는괴로워’의 흥행을 뻔한 신데렐라신드롬으로 치부하는 영화평들이 쏟아져 나왔다. 신데렐라신드롬이라니.. 초딩 수준의 무성의한 평론들. 상투적인, 진부하기 짝이 없는, 늘 반복되는 그 소리에 그 소리들.

지식인들이 ‘미녀는괴로워’를 폄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영화에서 배울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들은 영화에서 무언가 배울 것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인가? 그들의 직업이 ‘교사’이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항상 배워야 하고 자기네는 당연히 가르쳐야 한다고 여긴다. 주제넘게 관객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다. 수직적인 계몽의 시대는 지났고 수평적인 소통의 시대가 왔는데도 말이다. 세상이 바뀐 줄도 모르고.

그렇다. 미녀는 계몽하려는 영화가 아니라 소통하려는 영화다. 미녀는괴로워가 관객들에게 어필한 이유는 하나다. 여자들이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극중 강한나가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 말을 못하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말을 하게 될 때 관객들은 공감한다. 그 장면에서 눈물이 터져 나온다. 바로 그것이 소통이다. 소통이 즐겁다. 소통이 아름답다.

신데렐라신드롬이라니.. 이건 정말이지 소통의 실패다. 그 인간들은 정말이지 소통이 안 되는 자들이다. 지식인이 대중과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은 남자가 발기가 안 된다는 것과 같다. 대략 끝난 거다.

김용화감독은 관객과의 소통에 성공했는데.. 평론가들은 여전히 관객과의 소통에 실패하고 있다. 대중과의 소통에 실패하면 지식인의 역할이 끝났다고 봐야 한다. 더 이상 지식인이 아니다.

오늘날 지식의 문제는 대중과의 소통이 막힌데 있다. 지식의 실패다. 이거 인정해야 한다. 지식은 이제 그만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대통령께 쫑코먹은 최장집부터 순서대로 살살 기어내려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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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원이 ‘1번가의 기적’으로 떴다. 연기를 잘해서일까? 아니올시다. 나는 그가 연기를 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엽기적인 그녀’에서의 전지현과 비슷하다. 둘 다 중성적인 캐릭터다.

예전에는 ‘귀여운 왈가닥’이 떴는데 요즘은 왈가닥으로 부족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대놓고 남자에게 ‘거침없는 어퍼컷’을 먹일 수 있어야 한다. 왜인가? 시대가 그렇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트렌드다. 요즘 여자들은 할 말이 많다. ‘할 말 다하는 여자’가 뜬다. 전지현과 하지원이다. 남자와 겨루되 힘으로나 지혜로나 조금도 밀리지 않는 중성적인 캐릭터. 이거 먹힌다. 어지간하면 흥행.

문화는 무엇으로 소통하는가? 트렌드로 소통한다. 지식인이 트렌드를 알아야 한다. 현실과 밀착해야 트렌드를 알 수 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강단에 숨은 지식인들은 트렌드를 알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꾸지람을 듣고 최장집들은 항변한다. ‘학자들은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대안을 내놓지 않아도 된다. 학자들은 비판을 위한 비판만 해도 된다.’ 이건 정말 웃기는 소리다.

학자들 세계 자체가 고여있다는 생각을 왜 못하나? 영화는 다르다. 옥석이 구분된다. 흥행성적이라는 확실한 잣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흥행성적이 판단기준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하나의 기준은 된다.

반면 학계는 평가가 불능이다. 그 결과로 고였고 고인 결과 썩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정노릇을 하지 않았다. 학자의 역할은 예언이다. 日蝕(일식)이 오기 전에 일식을 예언하는 것이 학자의 존재이유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그들은 무수히 예언했지만 그들의 예언은 모조리 빗나갔다. 그 결과 권위를 잃었다. 대통령께 딴지거는 그들의 모습은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앞두고 불길한 예언을 늘어놓는 늙은 무당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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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한국은 홍콩영화가 주름잡았다. 평론가들은 평론할 가치도 없는 영화라 무시하고 아예 평론을 안했다. 타란티노를 위시한 유명감독들이 홍콩영화를 찬양하자 뒤늦게 평론을 쏟아냈지만 뒷북이었다.

왜 홍콩영화가 떴는가? 그때 그시절 한국인들은 ‘폼 나는 남자’를 추구했다. 때문에 주윤발의 폼이 어필한 거다. 그 시대엔 폼이 트렌드였다. 숨막히던 독재시대 ‘잘살아보세’의 압박에서 벗어난 90년대 한국인들에게는 폼이 간절했다.

특히 젊은이들이 그랬다. 70년대의 기성세대가 살아남기 위해 비굴한 처신을 보여주는데 신물이 났다. 노예근성으로 가득한 비굴한 아버지 세대의 모습을 지켜보고 ‘나는 저렇게 안살아야지’ 하고 결심한 것이다.

● 1990년대 공식 - 폼 나는 남자
● 2000년대 공식 - 할 말 다하는 여자

그때 흥행이 망한 한국영화의 공식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뻔할 뻔자다. 최인호의 겨울나그네에서 보여지듯.. 높은 신분이지만 갇혀 있는 남자(운동권 암시)와 낮은 신분이지만 자유로운 여자(호스티스 영자)의 썸씽.

새장에 갇혀 있는 높은 신분의 남자는 낮은 신분의 자유로운 여자에게 위로를 받는다. 이것은 지식인의 자위행위다. 그때 그시절 그랬다. 호스티스 문학에 호스티스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모든 지식인들이 영자를 필요로 했다.

독재정권의 철벽 앞에 좌절한 지식인을 위로해주는 영자 캐릭터. 한국의 지식인들은 영자를 소비했다. 아름답지가 않다. 문제는 21세기 한국의 지식인들이 여전히 이 저급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을 위로해줄 마돈나를 찾는다. 그렇지 않은가? 30년대 이상화가 마돈나를 찾은 것은 하도 답답해서 그런 거고. 한국의 신세대들은 더 이상 위로해주고 보듬어주고 눈물 닦아줄 마돈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세대들은 더 이상 어리광쟁이가 아니다. 그들은 ‘거침없는 하이킥’을 망설이지 않는다.

소통의 단절.. 나폴레옹 시대엔 말탄 기병장교들이 골칫덩이였다. 전쟁은 칼과 창이 아닌 대포 중심으로 바뀌었는데.. 명문 귀족들에게 폼 안 나는 포병을 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지금은 지식인이 한국사회의 골칫덩이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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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이 뜨고 하지원이 뜨고 김아중이 뜨는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들이 세상을 향해 할말이 있는데 전지현과 하지원과 김아중이 그 할말을 대신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소통이다.

흥행? 간단하다. 관객이 하고 싶은 말을 배우가 대신해주면 된다.

영화의 예를 드는 것은 하나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20세기가 계몽의 시대라면 21세기는 위대한 소통의 시대이다. 영화가 그러한 트렌드를 잘 반영한다. 영화계 뿐 아니다 세상이 모두 변했다.

20세기가 원하는 것과 21세기가 요구하는 것이 다르다. 세계는 20세기의 능률지향에서 21세기의 가치지향으로 변하고 있다. 20세기의 계몽지향에서 21세기의 소통지향으로 바뀌고 있다.

20세기는 지식인과 수구가 대결하는 시대였다. 지식의 힘과 돈의 힘이 테제와 안티테제를 이루었다. 21세기는 소통능력을 가진 정보화세력이 진테제를 이루어 이들의 교착을 해소하고 무대를 평정한다.

대한민국은 가치지향적 사회로 간다. 국민소득 몇 만불 따위로 국민을 선동하는 시대는 저 멀리 지나갔다. 그건 옛날 이야기다.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은 동기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20세기에는 동기가 뚜렷했다. 동기는 ‘잘살아보세’였다. 21세기에는 동기가 불분명하다. 막연한 잘살아보세가 아니라 웰빙살이를 할 것인지 참살이를 할 것인지 멋지게 살 것인지 폼나게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20세기에는 필요하지 않은 물음이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좋은 친구도, 좋은 건강도, 좋은 차도, 좋은 집도, 돈만 있으면 해결되었다. 그러나 21세기는 다르다.

떵떵거릴 수록 친구를 잃는다. 목에 힘 줄수록 고독해진다. 배 볼록 나온 사장이 존경받던 시대는 지나갔다. 돈이 많아도 자기 힘으로 다이어트를 해야한다. 돈이 많을수록 오히려 더 다이어트 해야한다.

부자일수록 세상 눈치를 봐야 한다. 부자일수록 담배 끊어야 하고 매너 지켜야 한다. 성희롱도 안되고 권위주의로 자식들 위에 군림해도 안되고 마누라 패도 안되고 안되는게 많아졌다. 부자에게만 그렇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조중동이나 쳐보는, 노예근성에 찌든, 친일 친미 친서구 사대주의에 찌든 바보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친구를 얻지 못하면 오지게 행복해질 수 없다.

심미안이 있어야 한다.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골동품이나 보석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으로 부족하고 인간의 진가를 알아보는 것이 진짜다. 그들 멋쟁이들이 인터넷에 둥지를 틀고 오순도순 산다.

비굴한 노예로 백년을 사느니 하루를 살아도 세상을 향해 할말 다 하고 멋지게 사는 시대다. 요즘은 시골에서 소박하게 농사짓고 살아도 인터넷으로 도시 친구들을 불러모아 왕처럼 사는 사람도 있다.

세상이 변했다. 뻐기고 살려니 봐줄 하인이 없고, 목에 힘 좀 주려니 봐줄 청지기가 없고, 떵떵거리며 살려니 봐줄 머슴이 없고, 위세부리며 살려니 봐줄 식모가 없고, 으스대며 살려니 봐줄 가정부가 없다.

돈으로 해결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돈으로 해결한다는건 하인도 있고 머슴도 있고 청지기도 있고 식모도 있고 가정부도 있을 때 이야기다. ‘아랫것들’이 없으니 ‘윗것’들의 ‘이로너라 게 아무도 없느냐’ 하며 행세하는 재미가 없어졌다.

● 최장집의 모든 어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 ‘이로너라 게 아무도 없느냐!’

예전에는 국가의 금제가 많았다. 카지노는 안 되고 경마는 나쁘고 해외여행은 사치고 스커트가 짧아도 안 되고 장발은 나쁘고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안 되고 안 되고 안 되며 다 안 되는 사회였다.

그럴 때도 부자에겐 다 되었다. 부자 좋다는게 그거였다. 남들에게는 안 되는 것이 내게는 된다는 거. 몰래 양담배 피워도 되고 몰래 시바스리갈 마셔도 되고 가난뱅이에게는 안 되고 부자에게는 다 되고.

지금은 다르다. 부자에게는 안 되는게 많아졌고 빈자들에게는 금제가 풀렸다. 이제는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가 선택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시골에서 유기농 채소에 황토집으로 참살이를 할건지 필리핀으로 가서 골프나 칠것인지 정선카지노에 가서 또라이짓을 할것인지 자기 선택에 달려있다. 아무도 안 말린다.

금제가 없다. 갑자기 선택지가 늘었다. 인간들은 선택의 두려움 앞에 선다. 예전에는 하지말라는 것이 많아서 어떻게든 돈벌어서 다 해보려고 했는데 이제는 해도 되는게 많아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수없다.

이러 시대에는 소통능력을 가진 자, 동기부여의 능력을 가진 자,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자가 판을 장악한다.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동기부여다. 동기는 곧 참여의 동기다. 참여는 소통에 의해 가능하다.

소통한다는 것은 적절하게 포지션을 나누어갖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목표를 향해 발걸음을 맞추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이제는 다르다. 골키퍼는 뒤로 물러나 골대를 지켜야 하고 공격수는 앞으로 나아가 패스를 받아야 하고 미드필더 역시 제 위치를 지켜야 한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흩어졌다 다시 모일 때 적절한 하모니가 이루어진다.  

크게 흩어질수록 크게 모일 수 있다. 흩어진 사람을 다시 모으려면 매력으로 유인해야 한다. 그것이 멋이다. 멋이 미(美)다. 강자가 힘으로 줄세우던 시대는 지나갔고 약자가 매력과 멋과 미로 유혹하는 시대로 간다.

집단의 힘을 강조하는 시대에서 개인의 멋을 강조하는 시대로 바뀐다. 권력지향에서 가치지향으로, 능률지향에서 소통지향으로 바뀐다. 부자의 문제해결능력이 대접받던 시대에서 멋쟁이의 동기부여능력이 대접받는 시대로 바뀐다.

조선시대의 선비문화도 그랬다. 서구의 귀족들이 농노를 착취하면서 완력으로 군림할 때 조선의 선비들은 가난했지만 멋있었기에 대접받았다. 물론 모든 선비들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다.

사라마구의 마술적 리얼리즘

리얼리즘은 과학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은 심리과학이다. 마술을 쓰지 않고는 파헤칠 수 없는, 최면을 걸지 않고는 들여다 볼 수 없는 세계가 있다. 마술적 리얼리즘은 거기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즐겨 최면에 걸리는 자가 그 과학에 도달할 수 있다. 환자가 최면에 걸리기를 거부하면 심리학자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다. 관객과 독자들은 작가의 마술에 걸리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를 읽는다. 보이는 것을 차단했을 때 보이지 않는 것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미녀는괴로워에서 강한나의 변신 역시 그러하다. 신데렐라의 허상을 심어준 것이 아니라 마술을 건 것이다.

김기덕은 현미경이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재능이 있다. 사람들은 그의 마술을 혐오하지만 나는 그의 심리과학을 좋아한다.(김기덕 영화를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설명한 사람은 정성일이다.)

보이지 않는 염색체를 염색하여 보이도록 위조함은 과학적 허구이지만 그 허구 덕분에 우리는 오히려 과학적 진실을 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마술.. 그것이 예술가의 소통능력이다. 예술가는 얼마간 마술사다.

미녀는괴로워.. 비만은 눈에 보인다. 그것을 제거했을 때 보이지 않던 진실이 드러난다. 소통의 문제다. 김기덕 영화의 주인공들이 말을 잘 하지 않는 이유도 그렇다. 소통의 단절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다.

쉽게 말로 아니하고 어렵게 행동으로, 그것도 크게 오버된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소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자신의 백퍼센트를 보여주는 진정한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사라마구가 포착한 지점이 그거다. ‘눈먼자들의 도시’에 사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그 지점을 놓치고 만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눈이 멀었다. 왜 눈이 멀었는가? 알고모름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 고로 나는 높고 너는 낮다.’ 지식인들은 이걸로 이야기를 끝내려 한다. 옛날에는 그게 먹혔다. ‘나는 안다. 고로 높다’고 선언만 하면 우르르 몰려들어 수업료 바치며 한 수 배우려 했다.

수직적 질서가 필요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식인의 그런 수법이 통하지 않는다. 골방의 지식인들은 이제 그만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대중과 눈높이를 일치시킬 때 진정 소통은 가능하다.

● 70년대 수구가 꿈 꾸는 세상 - 돈의 힘이 먹어주는 사회
● 90년대 지식이 꿈 꾸는 세상 - 지식의 힘이 먹어주는 사회
● 우리가 꿈 꾸는 가치지향 사회 - 동기부여에 의한 소통능력이 부각되는 사회

역사는 이미 3단계로 나아가고 있는데 지식인은 2단계에 머물러 있다. 세상이 먼저 변하고 있는데 변화의 트렌드를 읽지 못한다. 그들은 낙오되었다. 그들은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잃었다.

앞일을 예견하지 못하니 존경받지 못한다. 최장집들의 구시렁거림은 새 나라의 건국을 앞두고 불길한 예언을 늘어놓는 늙은 무당을 연상시킨다. 그래도 우리는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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