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에게 바보임을 깨우쳐 주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바보가 바보짓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말한 바보가 닉슨이라지요.
잘못하고 있지만 바보임을 깨우쳐주고 싶어도 저에겐 그럴 힘이 없습니다. 뉘 있어서 아랍과의 ‘천년전쟁’을 도발한 부시의 바보를 깨우쳐 주겠습니까?
100년간 계속된 십자군전쟁도 처음부터 100년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지요.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 카오스이론으로 말하면 ‘초기 조건의 민감성’입니다. 처음엔 미세한 차이지만 점점 더 틈이 벌어지는 거에요.
결국은 100년을 가고 천년을 갑니다. 한은 쌓였고 감정은 깊었습니다. 부시는 천년 안에 이 전쟁 못 끝냅니다. 기어이 기독교문명과 회교문명의 천년전쟁으로 비화되어버린 거에요.
부시 혼자의 잘못이라면 말도 안해요. 모든 미국인이, 그리고 영국인들과 호주인들이, 거기에다 일부 어리석은 한국인들까지 가세하여.. 모두의 잘못이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셈이 되지요.
결론은 슬프게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원래 그런 존재라는 거.. 인간이라는 존재의 나약함.. 그 실존적 허무를 정면으로 직시하기.
서프라이즈에 보수열풍이 몰아치고 있군요. 말릴 수도 없어요. 저에겐 그럴 힘이 없습니다. 닉슨 말마따나 스스로 시행착오를 깨달을 때 까지 걍 내버려 둘 밖에요. 대선직후였던 지난해 봄에도 그랬지요.
그때도 서프에 보수열풍이 불어닥쳤습니다. ‘민주당 썩었지만 적당히 보수(補修)해서 쓰자’던 그때 그 보수들은 지금 남프라이즈로 독립해 나갔습니다. 그 보수들이 민주당을 잘 보수(?)해서 9석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그때도 실용주의 열풍이 불어닥쳤더랬습니다. 실용주의자 강준만은 어차피 한 세대 안에는 해결이 안되게 되어있는 지역주의도 ‘실용’해야 한다더니 지금은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사는 이런 식으로 반복됩니다. 늘 그렇듯이 큰 전투가 끝나면 기강이 해이해지는 거에요. 이라크전을 손쉽게 승리한 미군들이 보이고 있는 추태처럼..
포기합시다. 주제넘게 서프가 우리당을 컨트롤하려는 건방진 생각을 해서는 안되겠지요. 우리당이 망가지면 망가지는대로.. 깨지면 깨지는대로.. 그때 가서 흩어진 군대를 모아 다시 싸우는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승리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김혁규총리 지명논의와 같은 명백한 잘못을 보고도 침묵한다면 서프라이즈의 존재이유가 없겠지요. 남의 당 일에 주제넘게 나서는 셈이 되겠지만 굵고 짧게 한마디를 해줘야 합니다.
하긴 대통령 맘이지요. 인사권자는 대통령이니까. 그러나 맹목적인 대통령 만쉐이가 정작 대통령을 곤혹스럽게 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계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맹목적인 추종은 권력의 약화를 부른다
파병문제를 예로 들어보죠. 반대가 일정한 정도 있어줘야 대통령이 가부간에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맹목적으로 대통령의 결정을 지지한다면 결정적으로 대통령이 ‘결정권’을 상실해버리는 요상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파병을 누가 결정하지요? 부시입니까? 노무현입니까? 럼즈펠드입니까? 반기문입니까? 도대체 누구에게 결정권이 있나요?
국민에게 있습니다. 국민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결정권을 대통령에게 위임하는 과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절차가 민주주의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게 권력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거든요.
파병문제를 논함은 일차적으로 이 문제에 관한 결정권이 미국에 있느냐 아니면 한국에 있느냐를 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단 파병에 반대해야 적어도 우리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의회에서 여당과 야당 사이에 찬반이 50 대 50으로 팽팽해야 국회의장도 힘을 한번 써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탄핵 때 말입니다. 다들 박관용이 얼굴을 쳐다봤죠.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자 우쭐한 나머지 전례없이 경위권도 발동해보는 등 닭짓하고 말았지만 그 순간에 국회의장의 권력이 드러난 것은 사실입니다.
찬반이 50 대 50으로 팽팽해조야 최종 결정권자인 대통령의 권력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어차피 국회의원도 한표, 국회의장도 한표인데, 50 대 50 상황에서 국회의장의 한표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요?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입니다.
권력이라는 것이 별거 아닙니다. 가장 늦게 판단할 권리가 곧 권력입니다. 양쪽의 입장을 다 들어보고, 최후에 판단하는 자가 가장 바르게 판단할 확률이 높습니다.
논쟁이 벌어지면 보통 50 대 50으로 갑니다. 권력자가 최후에 판단합니다. 그 최후의 판단이 바른 판단이 될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여야동수일 때 국회의장의 한표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국회의장이 최후에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숨은 프리미엄이 있는 거에요. 그거 굉장한 겁니다.
도박이라면 나중에 배팅하는 사람이 유리한 것과 같지요. 먼저 배팅한 사람의 호흡이 흐트러졌는지를 보고 블러핑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겁니다. 고스톱판이라면 하수 바로 다음자리에 앉는 사람이 돈을 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노무현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 이런 식이라면 최후에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대통령이, 최초에 판단하는 사람이 되는 본말의 전도현상이 일어납니다. 이 경우 오판으로 갈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어떤 회의에서든 최후에 발언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남의 당 일에 감놔라 배놔라 할 입장은 아니지만 김혁규는 아닙니다. 제가 대통령의 결정을 반대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옳지 않다는 거에요. 원내대표도 그렇습니다. 이해찬은 아닙니다. 천정배입니다.
유시민이 이해찬을 지지한다는 설이 있던데 설마 그럴 사람으로 안보지만 만약에 그렇다면 잘못이죠.
우리 그냥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합시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좋은 세상 한번 만들어 보려고 총선때 열나게 선거운동 한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