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정에 벼슬을 하지 않았으니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매천이 말하는 의리는 요즘으로 말하면 의무라 하겠다. 어원으로 보면 의무duty는 짐을 지듯이 부담을 지는 것이다. 빚을 지듯이 개인은 집단에 의무를 진다. 동료와 함께 할 때는 의리를 진다. 역할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권리에 대해서는 의무를 지고, 동료에 대해서는 의리를 진다. 집단으로부터 역할을 얻고, 권리를 얻고, 동료를 얻은데 따른 댓가다. 집단을 이용하는 만큼 집단에 빚을 진다. 의리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고 우리가 처한 물리적 환경이다. 여러 사람이 함께 물건을 운반한다. 내가 손을 놓으면 그 부담이 다른 사람에게 간다. 다른 사람이 손을 놓으면 그 부담이 내게로 온다. 내가 하지 않으면 남이 해야 하고 남이 하지 않으면 내가 해야 한다.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구하는 이가 없으면 내가 나서야 한다. 목봉체조를 하는데 요령을 부리면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는다. 떠넘긴 폭탄은 돌고 돌아 다시 내게로 온다. 책임을 회피하면 반드시 청구서가 날아온다. 확률은 속일 수 없다. 이런 것을 머리로 아는 것으로 부족하고 특별히 훈련되어야 하므로 지성이 존재한다. 글자 배운 사람은 달라야 한다. 의리를 알고 의무를 다해야 한다. 내가 힘을 쓰지 않으면 조국이 죽는다. 나 대신 누군가 죽는다. 일반인이 못하므로 훈련된 지성인이 해야 한다. 나만 살짝 빠지면 되지 않을까? 일반인이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나서야 한다. 우리는 어떤 고정된 목표나 그럴듯한 이상을 버려야 한다. 관념을 버리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관념은 미래에 주어질 것으로 기대되는 보상이고 현실은 지금 들고 있는 목봉이다. 목봉을 놓을 수 없다. 누군가 다치기 때문이다. 관념은 대중을 동원하는 기술이다. 사람을 낚는 언술이다. 우리는 노동자를 위해서도 아니고, 농민을 위해서도 아니고, 자유를 위해서도 아니고, 평등을 위해서도 아니고, 평화를 위해서도 아니고, 행복을 위해서도 아니고, 쾌락을 위해서도 아니라야 한다. 우리는 그 무엇도 위하지 말아야 한다. 위하여 - 행복, 사랑, 평등, 정의, 쾌락 따위 미래의 보상으로 기대되는 관념 의하여 -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강을 건너는 부담, 우리가 처한 물리적 형편 무언가를 위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위한다는 것은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즉각적이지 않다. 의하여는 현재다. 즉각적이다. 무거운 통나무를 어깨에 매고 함께 징검다리를 건너간다면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무겁다고 놓아버리면 모두가 쓰러지고 만다. 우리가 함께 짊어진 부담에 의하여다. 우리는 큰 일을 함께 하고 있다. 큰 길을 함께 가는 것이다. 지성인은 앞에서 길을 여는 사람이다. 깃발 들고 앞서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맡은 일을 해내야 한다. 왜인가? 우리는 알게 모르게 게임 속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축구 선수는 분별하여 상대방 골대에 슛을 해야 한다. 골대를 잘못 보고 자살골을 넣으면 시합에 진다. 게임 속에 있다. 무사는 칼을 이겨야 하고 운전수는 핸들을 쥐어야 한다. 역시 게임 속에 있다. 지성인은 집단을 대표하는 부담을 진다. 지성이 맡은 포지션이다. 글자 읽은 사람은 인간 내부의 가능성을 끌어내는 역할을 맡았다. 시인은 영혼을 끌어내고, 음악가는 흥을 끌어내고, 화가는 센스를 끌어낸다. 인간 내부에 잠재한 가능성을 낱낱이 드러내어 인간에 대한 오해를 풀게 한다. 그렇게 보조를 맞추고 함께 강을 건너간다. 자동차에 첨단 옵션이 있어도 사용하지 않으면 의미없다. 인간의 우수한 본성을 모르고 가면 실패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고 흥이 있고 센스가 있는데 그 좋은 옵션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실패한다. 우리는 게임 속에 들어와 있고 옵션을 사용하여 게임을 이겨야 한다. 인간의 잘난 자원을 끌어내는 것이 지성인의 임무다. 인간의 못난 부분은 무당세력이 전시하고 있다. 인간의 잘난 요소와 못난 요소가 대결하되 결말은 잘난 요소의 승리다. 히어로와 빌런이 대결하되 결말은 히어로의 승리다. 그것이 지식인의 존재하는 이유이다. 막연히 사랑하라거니 용서하라거니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행복도, 쾌락도, 성공도, 명성도, 장수도, 출세도 의미없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거는 기술에 불과하다. 낯선 사람 앞에서는 당황하게 된다. 행복이니 쾌락이니 천국이니 하며 말을 걸면 자연스럽다. 인간은 사랑과 평화와 행복과 쾌락과 성공을 주워섬기며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타인에게 말을 걸어가지만 실제로는 물리적으로 부담이 걸려서 행동하게 된다. 기득권은 누가 바람을 잡지 않아도 똘똘 뭉친다. 부자는 광주에 살아도 국힘당 찍는다. 그들은 막대한 돈과 권력을 함께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행복이나 쾌락이나 미래의 어떤 보상을 바라고 그러는게 아니라 당장의 어깨에 짊어진 돈과 권력의 무게에 짓눌려서 기계적으로 반응한다. 내가 윤석열을 찍지 않으면 같이 강물에 빠질 것 같아서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짐꾼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조심스럽게 걷는다. 부자들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아는데 빈자들은 모른다. 우리가 함께 부담을 짊어지고 물을 건너간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도록 해야 한다. 짐승의 길을 버리고 인간의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글자 배운 사람이 짊어진 부담이다. 매천은 악한 사람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했으며, 오만스러운 기백이 있어 남에게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글자 아는 사람이 두 어깨 위에 올려진 부담을 느끼면 자연히 그렇게 된다. 황희 정승이 뭔가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 네 똥도 굵다. 소인배와 대화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에둘러 표현한다. 바퀴가 걱정되어 살살 도는 엔진은 소용없다. 엔진은 바퀴를 무시한다. 바퀴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최대한의 마력과 토크를 끌어낸다. 엔진이 가는 속도에 맞추어 바퀴가 따라와야 한다. 지성은 엔진이다. 짐승은 바퀴 역할을 한다. 그들은 구르는게 역할이다. 우리는 이미 게임 속에 들어와 있고 그라운드 위에서 선수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함께 강물에 빠진다. |
고대그리스의 전쟁영화를 보면
군인들이 허허벌판에 사각형으로 줄을 맞추어 창을 들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적이 공격권안에 들어오면 동시에 같이 찌른다.
동양인인 나는 영화에서 그렇게 싸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형을 이용하여 매복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동양전쟁에 없는
허허발판에서 병사들의 존재를 다 들어내놓고 힘으로 싸우는 전쟁은 참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전쟁이라고 생각했다가 요새는 그런 생각 안 한다.
중무장한 군인들이 사각형의 대열을 유지하는 것은
자연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 생각할 때가 있었다.
왜냐하면 사각형의 대열에서 한쪽의 힘이 약하여 그 약한 쪽이 뚫리면
그 사각형에 있는 동료들은 대열이 무너져서 다 죽는다.
그러니까 이 사각형 안에 있는 사람들은 힘이 같아야하고
동료와 보조를 맞추어 움직이는 것도 같아야하는 것이다.
누구 하나 힘이쎄서 동료와 보조를 맞추지 않고
튀어 나가면 그 사각형안에 있는 동료도 죽고 힘이 쎈 튀어 나간 사람도 죽고
그냥 다 죽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사각형안에 있는 중무장병사들한테
선거권을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중무장을 하려면 재력도 있어야 하지만.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동료와 보조를 맞추고
동료와 함께 가는 것이다.
당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당과 동료를 공격하는 것은
자신도 죽고 당도 죽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