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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040 vote 0 2022.05.05 (11:19:22)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말하는 3일치의 법칙이야말로 탁견이라 할 것이다. 시간과 장소의 일치는 무대설치의 어려움에 따른 것인데 편집술이 발달한 요즘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건의 일치가 중요하다. 거기에 우리를 진리에 이르게 하는 단서가 있다. 놀라운 힌트가 있다.


    뭔가 일치하면 기분이 좋고 불일치하면 괴롭다. 그것이 추론의 단서가 된다. 피타고라스는 대장간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화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망치 소리의 파장이 일치하면 유쾌하고 불일치하면 괴롭다. 가장 불쾌한 소리는 스치로폴로 유리창 문지르는 소리일 게다. 가슴을 후벼파는 느낌이 든다. 치과에서 스케일링 받을 때 다음으로 악질이다. 나만 그런가? 아니잖아. 다들 느끼잖아.


    깨달음은 직관이다. 느낌으로 밸런스의 일치와 불일치를 판별한다. 불일치가 나를 힘들게 한다. 멕시코인의 구두코가 1미터 넘는 신발이 나는 불쾌하다. 무르시족의 입술접시가 나는 불쾌하다. 카렌족의 목늘이기가 나를 불쾌하게 한다. 조폭의 문신이 나를 불쾌하게 한다. 부족민의 칼로 벤 상처문신이 나를 힘들게 한다. 일체의 신체변형이 끔찍하다. 일본인의 검은 치아가 보기 흉하다. 청나라의 변발이 흉하다. 백인들의 코르셋도 끔찍하다. 그것들이 나의 평온을 깨뜨린다.


    파키스탄의 괴상한 트럭장식이 유치하다. 인도인은 기차 지붕에 탑승한다. 누가 좀 말리지. 어휴. 그걸 뻔히 보면서 그냥 놔두는게 더 끔찍하다. 그게 고양이를 길에서 기르는 짓과 같다. 기차는 객실에 타는게 맞고 고양이는 집에서 키워야 한다. 거리에 사는 노숙자도 끔찍하다. 서울시가 잘못했다. 사람이 집에서 살게 해야지 왜 길에서 살게 하느냐 말이다. 유태인의 할례는 인간을 저주하는 악습이다. 무슬림의 떼절이 나를 비참하게 한다. 자이나교 극단적인 비건행동이 나를 슬프게 한다. 괴롭지 않은가? 그게 흉측한 짓거리다. 느끼지 못하는가?


    이런 인간 이하, 수준 이하의 저질들과 같이 어깨를 맞대고 좁은 지구동네에서 살아줘야 한다는 말인가? 왜 멀쩡한 남의 고추를 찢고 성기를 꿰매는가? 왜 조국을 사냥하는가? 인간은 끔찍한 짓을 해왔다. 끔찍한 것을 보고 끔찍하게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이 나는 더 끔찍하다.


    더 설명이 필요한가? 나는 서양의 고전명화를 보고 화가 났다. 괴로웠다. 인물들이 다들 몸을 뒤틀고 있잖아. 약 먹었니? 하나의 그림 안에 여러 가지 장면이 옴니버스를 이루었다. 큐피드는 쓸데없이 꼭 끼어든다. 분위기가 산만해져 있다. 인물들이 다들 다른 지점을 보고 있다. 이건 3일치의 법칙과 어긋나잖아.


    TV 예능프로 나오는 연예인들은 카메라에 등을 보이면 안 되므로 한 줄로 어색하게 늘어선다. 창피하지 않은가? 초이스 대기하냐? 레핀의 그림에서 코사크 아저씨는 지나치게 등을 뒤로 젖혔다. 술탄 편지에 답장 쓰는 인물 시야를 가리니까. 뒤에서 스케치하는 레핀을 위해 용을 쓰는 거다. 이 그림을 본지 30년은 지났을 텐데 아직도 나는 괴롭다. 몸을 뒤틀면 똥이 나오잖아. 누가 화장지나 좀 갖다줘라.


    사람 눈동자에 소실점이 있듯이 액션에도 소실점이 있다. 인물의 동선은 한 지점에 모여야 한다. 문학이라도 마찬가지. 근대문학은 다르다. 서유기나 아라비안나이트가 근대소설 축에 들지 못하는 이유는 나열식 구조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중심 주제로 모이지 않는다. 한 줄에 꿰어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어긋나는 불일치다. 천일야화는 1001개의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이어 붙인 것이다. 데카메론과 같은 나열식 서술구조다. 문학성이 떨어지는 이유다. 아라비안나이트는 어른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인데 동화가 되어버린 이유다. 영화도 에피소드 나열식으로 가면 긴장이 풀리고 관객이 집중하지 못한다. 그 경우는 작품성이 낮은 것이다.


    서양화는 사람을 놀래키려는 소인배의 얄팍한 의도를 들킨다. 장인이 가격을 올리려고 불필요한 장식을 마구 붙이면 짜증나잖아. 청소하기만 어렵잖아. 장식과잉의 중국풍 가구 말이다. 이태리 가구도 마찬가지다.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가 자기 집을 그런 식으로 꾸미겠냐? 센스가 없이 말이다. 근사하지 않다.


    보석과 황금으로 치장하면 가격은 올라가지만 그게 공예품이지 예술은 아니다. 분청사기는 대충 만들어도 그림이 시원시원하다. 고려청자가 지나치게 기교를 부려서 벼락출세한 무반귀족의 신분과시 의도를 들키는 것과 비교된다. 꼼꼼하게 그리면 답답하다. 장인이 몇 푼 벌겠다고 하루종일 맨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저거 그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우울해진다.


    서양예술은 통째로 공예품과 같다. 그럴 때 인상주의가 짠 하고 나타났다. 이거다. 내가 애타게 찾던 것이 바로 이거야. 속이 시원하다. 바로 반응한다. 쾌감을 느낀다. 답답증이 해소된다. 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다. 고전명화를 보면 괴롭지도 않은가? 인상주의가 오래 묵은 답답증을 해소시켜주지 않았다는 말인가?


    길거리에서 보는 혁필 아저씨 손재주가 신기하지만 솔직히 아닌건 아닌거다. 짜증 나잖아. 그런 귀신 나오는 것을 집에 가져와서 거실에 걸어놓겠냐? 쪽팔리게. 손님이 보면 비웃는다. 상놈의 집안이로구나 하고 오해한다. 고전명화를 보고도 괴롭지 않다는 사람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동양화는 음양의 조화가 있다. 산이 정이면 물은 동이다. 움직이는 것과 정지한 것의 대칭에 인간이 가세하여 천지인 삼재를 이룬다. 하늘은 변하고 땅은 불변하며 인간은 둘을 매개한다. 마음이 편안하다. 서양은 건축이든 그림이든 사람을 겁주려고 한다. 불쾌하다.


    깨달음은 어떤 일치를 포착한다. 거기서 밸런스의 축과 닫힌계와 치고 나가는 상호작용의 방향성을 포착하면 더욱 좋다. 어떤 둘이 일치하면 인간은 거기에 반응한다. 호르몬이 나와준다. 그럴 때 전율한다. 흥분한다. 설레인다. 에너지가 업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과 상호작용한다. 자신이 자연의 어디에 반응했는지 알아채고 그것을 복제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초콜렛의 단맛에 반응하여 그것을 한 번 더 먹으려고 하는 것은 어린이다. 자연의 멋진 풍경에 반응하여 그것을 즐기려고 하는 것은 어른의 취미생활이다.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에서 어떤 방향성을 포착하고 그것을 복제하고 재현하는 것은 시가 되고 음악이 되고 예술이 되고 문학이 된다.


    깨달음은 밸런스의 일치를 느끼는 것이다. 밸런스의 성립조건을 알아내고 복제하는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좋잖아. 소리의 파장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선은 불쾌하고 곧은 선은 유쾌하다. 너무 곧기만 하면 지루하고 곧음과 굽음이 균형을 이루어야 마음이 편안하다. 산의 곧음과 물의 굽음 사이에서 사람이 균형을 맞춘다. 산이 너무 곧지 않게, 물이 너무 굽지 않게. 직선과 곡선, 정과 동, 거리와 속도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때 인간은 전율한다. 찡 하고 느낌이 온다. 발바닥 밑에서부터 뻑적지근하게 차오르는 충일감이 있다. 안정감이 있다.


    나는 여덟 살, 아홉 살 때의 느낌에 50년간 매달려 있다. 깨달음은 느낌을 복제한다. 예술가는 복제능력이 있다. 그냥 통한다. 일치는 밸런스다. 설명이 필요 없다. 이정후 선수 타격자세만 봐도 좀 치겠네. 느낌이 오잖아. 마라도나 돌근육만 봐도 느낌이 오잖아. 쉽게 돌파하겠네. 배터박스에서 불쌍하게 서 있는 야구선수 많다. 신체적인 핸디캡을 극복하려고 얄궂은 자세로 서는 것이다.


    뭔가 아닌 것을 보면 답답하고 뭔가 옳은 것을 보면 즐겁다. 소실점이 안 맞으면 괴롭다. 건물을 못 그리는 조선시대 민화가 괴롭다. 비뚤어진 것은 바로잡아주고 싶다. 바지 지퍼가 열려있는 사람을 보면 말해주고 싶잖아. 선비들은 정원을 만들어도 곡선을 쓰지 않는다. 경회루는 사각형이다. 전국의 서원에 있는 연못은 모두 사각형이다. 거기에 이유가 있고 미학이 있다. 집에 괴목이나 담금주로 장식해 놓으면 쪽팔리지도 않은가? 자연인이냐? 그런 괴상한 짓을 하면 사람이 괴상해 보인다. 태극기는 또 왜 달아놓냐? 그게 자연인만 하는 행동이다.


    설명은 필요 없고 인간은 타인의 감정을 복제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인간의 복제능력에 주목하자. 그곳에 찾아야 할 진리의 단서가 있다. 놀라운 힌트가 있다. 찾아야 할 플러스알파가 있다. 상호작용의 랠리가 이어진다. 방아쇠가 격발된다. 손잡이가 있다. 통제가능성이 있다. 다룰 수 있다.


    구조론은 느낌의 해명이다. 인간은 원래 밸런스를 느끼는 동물인데 그것을 못 느끼는 자들과는 대화할 이유가 없다. 굳이 사람을 겁주려고 치아를 새까맣게 물들이는 일본인의 언밸런스, 굳이 사람을 겁주려고 고추를 자르는 유태인의 언밸런스, 굳이 사람을 겁주려고 입술접시를 하는 무르시족의 언밸런스, 굳이 사람을 놀래키려고 부자연스럽게 몸을 뒤트는 서양화의 언밸런스, 굳이 변발을 고집하는 청나라의 언밸런스. 굳이 사람 겁주려고 문신을 처바르는 조폭의 언밸런스. 그런 자들과 대화가 필요한가? 나를 겁주려는 자와 내가 대화해야 하는가? 조국을 때려잡는게 사람 겁주려는 짓이 아니고 무엇인가?


    멀쩡한 직선 놔두고 굳이 곡선으로 돌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좋은 화음 다 놔두고 굳이 불협화음으로 갈아탈 이유가 없잖아. 굳이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굳이 그렇게 하고야 마는 것은 사람이 못돼먹은 것이다. 사실이지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개인의 기호에 개입하지 않는다. 다만 거기에 단서가 있다는 말이다. 진리에 전율하려면 밸런스 감각을 키워야 한다.


[레벨:11]큰바위

2022.05.06 (07:10:57)

구조론이 느낌의 과학으로 더 들어가는군요. 

인간의 복제능력에 주목하자는 말은 좋은데 
그 인간이라고 하는 부류 중에 에먼 것들만 복제하는 놈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복제능력은 깨달음의 복제능력이어야 하는데, 그 깨달음이 없다는 게 문제. 


느낌으로 가되 깨달음의 느낌이어야 하는데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는 거. 


그리고 화음은 놔두고 불협화음으로 갈아탈 이유는 없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직선 놔두고 굳이 곡선으로 돌아갈 이유는 없다는 것은 이치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불협화음에서 화음을 찾아 가는 것이 예술이라면 

곡선에서 직선을 찾아가는 것도 예술이라고 말하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직선을 싫어하고 오히려 곡선으로 조화를 이뤄내고 예술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직선 곡선이 말하려는 핵심은 아닌 줄 알지만, 직선과 곡선은 예술에서 모두 필요한 부분이라서...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22.05.06 (08:41:05)

글을 읽을 때는 

쓰는 사람의 의도를 헤아려야 합니다.

피상적인 관찰은 곤란합니다.

짐짓 오해하겠다는 삐딱한 태도로 

니가 나를 감동적으로 설득시켜봐라 하는 

정치적 갑질은 정치판에서 유효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깊은 헤아림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직 말하지 못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이제 겨우 서론이 나왔는데 초장부터 초를 치면 곤란하지요.

물론 그럴 의도로 하신 말씀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모르는 제 3자를 의식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조론을 처음 방문한 눈팅이라면 당연히 오해합니다.

글을 쓸 때 이렇게 쓰면 오해할 사람이 많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진도를 못나가니까 별수 없는 거지요.

예술의 핵심은 대칭이고 대칭은 직선입니다.

관찰자와 피사체의 다이렉트라는 말씀.

소실점은 직선으로 만들어지는 것.

에너지는 지름길로 가므로 항상 직선일 수 밖에 없는 것.

작가는 그 에너지의 결을 드러내야 하는 것.

직진하는 빛의 각도를 본 사람이 인상주의를 발명한 것.

인상주의는 당연히 대칭입니다.

강렬한 대비가 있지요.

관찰자와 피사체의 격렬한 투쟁이 있는 것

몸을 비틀고 있는 고전회화가 곡선이지요.

모르는 분들도 있을 거 같아서 한 마디 더 부연한다면


직선.. 예술의 본령이 되는 핵심으로 바로가기.. 그것은 뇌에 임팩트를 주는 것

곡선.. 예술의 본령과 상관없는 걸로 가격 올리기.. 장인의 기술로 사람을 놀래키기


곡선예술은 당연히 망합니다.

디자인의 핵심도 대칭입니다.

막연히 예술은 곡선이다 하다가 망하는 겁니다.

조선왕조 선비들이 왜 연못을 사각형으로 만드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중심이 있고 주변이 있는 것이며

증심으로 쳐들어가지 않고 

주변에서 장식으로 변죽을 올리는 것이 예술이 망하는 원인입니다.

그림은 엉터리로 그리고 액자만 열심히 만들고 있는 거지요.

살 속에서 뼈를 보고

곡선 속에서 직선을 보는 사람이 진짜입니다.

살은 둥글고 뼈는 곧은데

보이는 살만 묘사하고 보이지 않는 뼈를 그리지 못하므로 망하는 것.

디자인의 뼈가 없이 살만 자꾸 갖다 붙이는 현다이 자동차가 절망

현다이를 보면 뭔가를 계속 붙이고 있어.

구조론은 마이너스고 마이너스는 제거하는 것인데

반드시 의사결정하는 코어가 있고

잡다한 것이 주변부를 둘러싸게 되는데 

코어는 직선이고 둘러싸는 주변부는 곡선입니다.

예전부터 말한 선이 굵은 디자인.

기아차 디자인의 힘은 직선의 단순함.

피터 슈라이어가 왜 이런 말을 할까요.

근데 공장에서 나오는 차를 보니까 직선이 아니던뎅?

직선으로 한대매?

이러면 대화가 안 되는 장면이재요.

직선은 에너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텔루라이드가 보여주는 내면의 힘.

그걸 직선이라고 말하는 거지요.

어쨌거나 신형 스포티지는 똥망.. 그게 직선이냐?

베토벤이 콰콰콰쾅 하는 것은 직선을 찾아낸 것이며

하수들이 둥글게 둥글게 하다가 망하는 것은 피상적인 관찰이지요.

이렇게 설명해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챌 분이 많지 않을 거 같다는 느낌.

디자인은 의사결정구조를 드러내야 합니다. 

자동차는 쇳덩이로 된 강체이고 내면에 힘을 숨기고 있으며

그것을 반영하는 디자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직선이니 곡선이니 하는 단어에 매몰되면 안 되고

하여간 한국에는 조금 그려놓고 여백의 미 어쩌고 하며 개소리로 때우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림은 조금 그리고 설명은 졸라 길어버려.

그럴 바에야 논문을 쓰지 왜 그리냐고.

임팩트가 아니면 예술이 아닙니다.

에술이란 그냥 망치로 뒤통수를 가격하는 것입니다.

그걸 직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고

관객에게 아부하는 것을 곡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레벨:30]스마일

2022.05.06 (09:27:22)

베토벤이전의 작곡가는 의뢰인(가톨릭교회, 왕, 봉건영주)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콰콰콰광이라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힘을 차마 음악으로 옮기지 못하고

의뢰인의 귀에 달콤하게 들리는 일정한 음안에서 반복되게하는 음을 작곡했다.

베토벤이후시대부터는 부르주아가 음악의 새로운 손님으로 들어오고

왕의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되는 베토벤은 음악에 자기 하고 싶은 거 다한다.

음악에 희노애락을 놓은 최초의 작곡가가 베토벤이 아닐가 싶다.


카리스마는 직선이다.

노무현에서 발견되는 되는 카리스마는 여러가지 사족 달지 말고

의사결정을 직선으로 보여주어서 대통령과 국민의 직선연결을 원하는 것이다.


지금 민주당비대위는 당과 지지자의 곡선연결을 해서 

의사결정 주체를 숨겨놓고 윤호중이 발표하는 형식으로

의사결정의 곡선으로 변죽을 올리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개혁은 평생직업이며 누구만 뽑아놓고 욕하는 것이 아니라 

법만 바꿔 놓고 지켜만 볼 것이 아니라

잘 시행되는 지 관찰해서 끊임없이 지지자의 의사전달을 해야한다.

그러나 곡선 의사결정은 이것을 거부한다.

[레벨:11]큰바위

2022.05.06 (18:53:04)

직선과 곡선에 대한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보이는 직선과 곡선이 아닌, 
본질과 핵심으로서의 직선에 대한 설명. 
그게 예술이고 논지의 핵심이라는 거. 
살 속의 뼈.
곡선 속의 직선.
잘 들여다 보겠습니다. 

이게 겨우 서론이라는 표현에 더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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