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서프는 연휴도 아랑곳없이 많은 글들이 올라오고 있군요. 한가위에 고향에도 못내려가고 만화책이나 비디오 테잎을 탑처럼 쌓아놓고 방바닥에 뒹굴뒹굴 하시던 분들께는 서프가 대안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휴식의 의미로 영화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홈페이지만 둘러봐도 본전은 건지는 김기덕감독의 신작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입니다. 아직 개봉은 안했습니다.

『고립된.. 시공간 어디로도 탈출구가 없는..그곳에서 인간성의 본래면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법. 』

김기덕 하면 ‘자궁 속에서 도 닦는 사람’이니 틀림없이 구도(求道)영화를 찍었을 것입니다. 도(道)는 곧 ‘길’이죠. ‘길’은 무엇일까요? 다모에 나오는 화적두목 장성백의 대사입니다.

“길이 아닌 것이 어찌 처음부터 있단 말이오. 한 사람이 다니고 두 사람이 다니고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 그곳이 곧 길이 되는 법. 이 썩은 세상에 나 또한 새로운 길을 내고자 달려 왔을 뿐이오.”

이 대사는 루쉰의 단편 ‘고향’에서 빌려온 말입니다. 원문을 참고하면..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검색을 하다가 루쉰의 또 다른 명구를 발견했네요.

“그대들에게는 넘치는 활력이 있다. 밀림을 만나면 밀림을 개척하고 광야를 만나면 광야를 개간하고, 사막을 만나면 사막에 우물을 파라. 이미 가시덤불로 막혀 있는 낡은 길을 찾아 무엇할 것이며 너절한 스승을 찾아 무엇할 것인가!“

지금 시국과 맞아떨어집니다. 다시 김기덕의 영화.. 도(道)는 ‘깨닫는’ 것입니다. ‘깨닫는다’는 말은 안다(知)에 대한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그 주어진 길을 ‘잘 간다’는 거죠. 허나 그 길도 먼저온 누군가가 만들어낸 길이겠지요.

‘밀림을 만나면 밀림을 개척하고 사막을 만나면 우물을 파라.’ 했습니다. ‘남이 만들어놓은 길 뒤에 가서 줄서지 말고 자신의 길을 뚫으라’는 말이지요. ‘깨닫는다’는 것이 곧 ‘길 없는 곳에 새로이 길을 내는 것’이겠습니다.

룰을 깨기 그리고 룰을 만들기
한국의 영화평론가들은 주성치가 황당한 영화를 만들면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김기덕이 새로운 영화를 만들면 화를 내곤 합니다. 새로이 길을 내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말이죠. 민주당의 편한 길이 있는데 왜 신당의 새길을 만들어서 혼란을 초래하느냐 이거죠.

김기덕의 영화는 ‘룰을 깨기와 룰을 만들기’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깊은 산중에 작은 연못이 있고 그 못 가운데 수상암자가 있습니다. 즉 ‘고립된 어떤 공간을 상정해보기’지요.

‘이케다 가요코’라는 사람이 썼다는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을 연상케 합니다. 100명도 많죠. 세상에 만일 너와 나 단 둘 뿐이라면?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 뜨거운 물을 찬물이라고 속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장님들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 세상에 너와 나 단 두 사람이 산다면 그래도 우리 거짓말을 할까요? 그 즈음에서 ‘네가 내고 내가 네’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속일 수 없지요.

왜? 우리는 서로 불완전하니까. 네와 내가 손을 잡으므로서 우리 비로소 완전해 질 수 있으니까. 요는 그러한 ‘불완전함의 노출 또는 발견’에 관한 것입니다. 즉 어떤 고립된 공간을 상정하고 그 하나의 ‘닫힌 계’에 등장하는 인원의 숫자를 지극히 제한해 볼 때,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완전함이 극적으로 노출된다는 점입니다.

세상에는 60억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너와 나의 잘못은 누군가에게 떠넘겨집니다. 정부 탓이다.. 영샘이 탓이다.. 박통이 탓이다... 그러나 세상에 너와 나 단 둘 밖에 없다면.. ‘모든 게 내탓’임이 드러난다는 점이지요.

왜? 너와 나 둘 밖에 없으니까.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가 없으니까.

김기덕의 영화는 그러한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완전성을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위악으로, 혹은 폭력으로 묘사되곤 합니다만 본질에서 악(惡)이란 없습니다. 그것은 부자연스러움, 혹은 불완전성입니다.

사슴을 잡아먹는 사자는 악(惡)한 존재일까요? 아니죠. 단지 불완전한 존재일 뿐입니다. 영화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어색함, 부자연스러움, 수줍음..들이며 이는 역으로 완전함에 대한 희구, 혹은 자연스러움과 완전성에 대한 갈구 또는 그러한 사정의 노출 또는 발견입니다.

우리가 아는 숫사자의 위엄은 살아남은 10프로에 해당될 뿐, 90프로의 숫사자는 다른 사자에 물려죽고, 사냥을 못해서 굶어죽고 심지어는 하이에나들에게 몰매맞아 죽기도 한다. 세상을 이해함에 있어 선과 악의 도식이 아니라 완전함과 불완전함으로 그리고 양자 사이에서의 점진적인 접근으로 바꿔줄 필요가 있다. 』

김기덕의 놀이는 재미가 있다
‘룰을 깨기’는 재미가 있습니다. 룰을 만들기는 더욱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재미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기왕의 룰을 지키지 않았다며 화를 내곤 합니다.

사실은 룰을 깨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되돌아가기입니다. 세상의 룰이 복잡해진 것은 인간의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공간을 제한해 보므로서, 룰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회의 룰이라는 것이 도무지 어떤 원리에 의해 생성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연못 가운데 벽이 없는 문이 있고 등장인물들은 그 문으로만 드나듭니다. 굳이 그 문으로 드나들 이유는 없지요.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그 문으로만 드나든다는데 동의하므로서 비로소 영화는 시작됩니다. 그것이 ‘작가의 룰’이지요.

깨닫는다는 의미는 곧 세상의 룰, 역사의 룰, 신의 룰을 깨닫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룰이 누군가가 만들어낸 것임을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임의로 그 룰을 만들수도 없다는 사실을, 누군가에 의해 임의로 만들어진 룰은 결코 지켜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드디어는 강제하지 않아도, 명령하지 않아도, 지시하지 않아도, 조직하지 않아도, 통제하지 않아도, 저절로 지켜지는 룰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신의 룰’입니다.

박통이씨의 어떤 룰
대빡공화국을 다스렸던 박통이씨는 젊은이들의 장발머리가 못마땅하게 여겨졌습니다. 장발하고 다니면 여름에 덥거든요. 그래서 위생에도 좋으니 ‘머리를 자르라’고 명령했습니다. 가위를 든 순경들이 거리에 나섰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하나의 ‘논리’가 배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끔찍한 거지요.

논리.. 혹은 논리라는 이름의 '쐐기 박아넣기'.. 그 논리의 연장선에서 머리 자르는 김에 미니스커트도 잘라, 컬러티브이도 안돼, 교복자율화도 안돼, 야간통행은 금지시켜, 정치인들은 구금시켜.. 싸그리 삼청교육대로 보내버려..

알아야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박통씨의 ‘머리를 자르라’는 단 한마디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역으로 뒤집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노무현의 ‘자율과 방임’은 그 머리길이의 제한을 없앤 것과 같습니다. 민주당의 추미애와 조순형들은 말하곤 합니다.

“도대체 머리를 몇센티로 기르란 거야. 대통령이 분명히 의사를 표현해줘.”

참 생각하면 민주주의란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신당의 진로? 니들이 알아서 해! 두발과 복장? 또한 니들 맘대로 해.

그러나 추미애와 조순형은 자유가 두렵습니다. '이제 곧 노랑머리와 장발과 미니스커트와 배꼽티가 거리를 활보할 텐데 그 꼴을 어떻게 봐.'

북한 응원단은 남쪽의 자유스러운 공기가 두렵습니다. 차라리 공화국의 따뜻한 품(?)에 안기는만 못합니다. 생각하면 노무현의 개혁은 고작 ‘두발 길이를 몇센티로 할건지는 니들이 알아서 해’ 이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 파급효과는 실로 엄청납니다.

아직도 자유가 두렵습니까?

왜 깨달음이어야 하는가?
‘초기조건의 민감성’입니다. 박통의 모든 독(毒)이 ‘머리는 3센티로 단정히’ 이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거대한 판구조의 이동도 처음에는 아주 작은 균열로부터 시작됩니다. 거기에 ‘논리’라는 이름의 쐐기가 박혀지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김기덕의 영화는 악(惡)으로, 깡으로, 폭력으로 표현되곤 하지만 이는 한국평론가들의 몰이해입니다. 그것은 부조리이며, 부자연스러움이며, 부조화이며, 어색함이며, 수줍음이며, 부끄러움이며 역으로 완전함과 조화와 미학적 자기일관성과 완결성에 대한 희구입니다.  

그것은 ‘룰을 깨기’와 ‘룰을 만들기’이며 그 방법은 공간과 시간의 제한, 고립된 상황, 탈출구가 없는 어떤 갇힌 상태, 곧 한계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우리 자신의 숨겨진 모습들을 폭로하기와 관찰하기입니다.  

왜 이러한 관찰이 필요한가? 박통이의 모든 독이 ‘장발 저거 맘에 안드네. 깎아!’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역으로 노무현의 모든 성과가 ‘탈권위주의’ 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자유가 두려운 사람, 파파걸 추미애와 조순형, 한화갑들은 죽었다 깨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서론이고 본론은 영화가 개봉하면 보고나서 쓰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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