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사건을 전달하는데 인간은 사물에 집착하므로 불통이다. 사냥꾼이 활을 쏘면 화살은 과녁에 맞는다. 사냥꾼도 움직이고, 활도 움직이고, 화살도 움직이는데 과녁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은 움직이는 화살을 보지 못하고 고정된 과녁만 쳐다본다. 총이 고장났는데 사람들은 표적지를 탓하고 있다. 언어는 전제로 진술을 쏜다. 전제가 활이면 진술은 화살이다. 언어의 실패는 전제를 망각하는 것이다. 활을 설명하는 언어는 상호작용, 권력, 의미, 기세, 의리다. 자유, 민주, 정의, 평화, 평등, 사랑, 선행, 윤리, 도덕 따위 관념어는 과녁을 설명한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므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활이 틀어졌는지는 활과 화살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활은 절대성이다. 과녁은 관측자의 위치에 따라 상대성을 보이므로 누구도 결과에 승복하지 않게 된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되는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전제를 숨긴다. 눙치고 들어간다. 사기꾼의 말에는 항상 숨은 전제가 있다. 정치판의 프레임 걸기가 그러하다. 경선에 불복하는 사람이 규정을 들어 말하지만 본뜻은 상대 당을 찍겠다는 위협이다. 이런 것이 숨은 전제다. '내가 국힘당 입당하면 니들이 어쩔 건데?' 뒤에 숨겨놓고 은연중에 내비치며 겁주는 말이다. 숨은 전제는 밸런스 형태로 존재한다. 강도가 '돈 내놔' 하는 말에는 '순순히 돈을 내놓지 않으면 내가 너를 죽일 것이며 나는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너는 알아야 한다.'는 전제가 숨어 있다. 피해자가 돈을 내놔야 서로 더 얻을게 없는 균형상태로 밸런스가 회복된다. 피해자는 목숨을 얻고 강도는 현찰을 얻는다.
동사 : 변화 언어는 대칭으로 조직된다. 대칭은 공이 네트 너머를 오가면서 랠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동사는 변화를 반영하고 명사는 변화에 대한 변화다. 정확히는 변화를 화자와 연결하는 지시다. 그냥 '새'라고 명사 하나를 뱉어도 그것이 '있고' 그것을 '봤다'는 두 가지 동작이 숨어 있다. 그것이 '날고' 내가 그것을 지시하여 '가리키며' 동사 둘이 합쳐서 명사 하나가 된다.
명사 : 동사와 동사의 대칭(변화와 그 변화에 대한 지시) 명사가 동사에 대한 동사라면 문장은 명사에 대한 명사다. 변화의 출발점을 주어로 삼고 도착점을 목적어로 삼는다. 주어나 목적어가 생략되어도 숨어 있다고 간주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패턴이 반복되어 명제와 담론을 이룬다. 사건의 원인측과 결과측을 반영하는 문장 두 개가 합쳐져서 하나의 명제가 되고, 명제 둘이 합쳐져서 하나의 담론을 이룬다. 모든 언어는 원자 단위로 쪼개면 변화를 나타내는 동사가 된다. 형용사나 조사, 부사도 동사에 포함된다. 동사는 변화를 나타내며 변화가 반복되면 명사다. 바람이 불면 부는 것이다. '부는 것'이 반복되면 바람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변화는 사건을 반영하며 사건은 원인과 결과가 있다. 명제는 인과율을 종속관계로 반영한다. 결과측은 원인측에 의해 제한된다. 진술은 전제에 의해 제한되므로 참과 거짓이 판별된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다.'라고 말하면 대한민국의 원인에 서울이라는 결과가 종속된다. 대한민국이 활이고 서울은 화살이다. 화살의 이동은 활에 의해 제한된다. 그러므로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다.'라는 명제는 '대한민국은 수도가 있다.' '수도의 이름은 서울이다.' 하는 두 개의 문장이 합쳐진 것이다. 앞문장이 전제어가 되고 뒷문장이 진술어가 된다. 언어는 담론으로 완성된다. 담론은 대화의 형태다. 질문자가 있고 대답자가 있다. 없어도 있다고 간주하고 자문자답 해야 한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언어는 사건을 반영하므로 어떤 둘을 연결해야 한다. 편지는 주소가 씌어져 있어야 한다. 말을 끌어내는 말을 덧붙여 대칭시키는게 담론이다. 불완전한 문장이라도 담론의 일부를 구성하며 나머지는 표현되지 못하고 숨어 있다고 간주해야 한다. '배가 고프다'고 말하면 '밥을 달라'는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콩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한다. 언어는 본래 대화다. 질문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갑자기' 바람이 분다'고 말하면 이상하다. '바람이 왜 안 불지?'하고 누가 질문해주면 '이제 바람이 살살 불어오는군. 저기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게나.' 하고 대꾸할 수 있다. 그냥 '일본팀이 잘못했다'고 하면 어색하고 '한국팀은 잘하고 있는데' 하고 앞에 깔아주는 사회자의 멘트가 있어야 한다. 언어는 두 사람이 공을 네트 너머로 날려보내는 주고받기 랠리다. 핑퐁과 같다. 혼자 독백을 해도 자문자답의 형태를 갖추는 것이 담론이다. 담론은 그냥 씨부리는게 아니고 예시를 든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데 과연 둘이 함께 상자를 옮기니까 편하구나.' 여기서 문장의 뒷부분에 오는 '둘이 함께 상자를 옮기니까 편하구나.' 하는 말이 반복문이고 앞에 내밀어지는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조건문이다. 조건문은 말을 끌어내는 말이다. 반복문은 랠리를 받아주는 말이다. 네트 너머로 날아온 공을 되돌려 보낸다. 누가 '산이 높다'고 선창하면 '물이 깊다'로 받아줘야 한다. 산은 높고 물은 깊다 하고 대칭을 이루면 의미가 산다. 그렇지 않고 일방적 선언이 되면 의미가 죽는다. 문장은 반드시 담론의 형태를 가져야 하며 담론의 형식이 아니라도 맥락 속에 담론이 숨어 있다. 연역으로 보면 언어는 사건을 복제하므로 사건이 숨어 있다. 언어는 사건을 반영하고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배구공을 네트 너머로 넘기듯이 주고받기로 의미를 도출한다. 랠리가 이어지면 의미의 성공이고 끊어지면 실패다. 하나의 사건이 또다른 사건을 무는 것이 담론이고, 하나의 사건 안에서 결과측이 원인측을 무는 것이 명제, 명제를 이루는 진술 안에서 다시 변화의 출발점과 도착점을 반영하는 것이 문장이다. 그 도착점 안에 다시 변화의 반복이 숨어 있다. 완전히 분해하면 동사가 남는다. 그냥 '가!'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러도 그 안에 담론이 숨어 있다.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다. 모든 언어는 담론이며 담론은 갖추어진 말이며 그렇지 않으면 듣는 사람이 맥락을 헤아려서 들어야 한다. 개떡같이 말해도 콩떡같이 알아먹어야 한다. 코끼리 뒷다리만 보여줘도 온전한 코끼리 한 마리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강도가 '돈 내놔' 하는데 하필 피해자가 도무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아스퍼거라면 곤란해진다. '저 말이에요?' 이러고 의뭉을 떤다. '돈 내놔.' '지금 말이에요?' '돈 내놔.' '여기서 말이에요?' '돈 내놔' '왜요?' 강도는 참지 못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말에는 귀가 있다. 말귀가 숨은 전제다. 대칭의 밸런스 형태로 그것은 잠복해 있다. 말귀를 찾아내면 언어는 이루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