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과 유심론 일본인들은 서로 등을 돌리고 대화를 한다. 일본영화에 자주 나온다. 일본문학에는 로맨티시즘이 있을 뿐 사랑이 없다고 말한 사람은 박경리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한국에 한 명의 왕이 있다면 일본에는 300명의 다이묘가 있다. 한국인은 한 곳을 바라보는데 일본인은 삼백 곳을 보고 있다. 대화를 하려면 마주보아야 한다. 등을 돌리고 대화를 하니 대화가 겉돌게 된다. 일본영화에 로맨스도 있고 섹스도 있는데 사랑이 없는 이유다. 어떻게 사람을 마주보게 할 수 있을까? 각자 역할을 나눠주면 된다. 그런데 우리의 역할이 뭐지?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한마디로 주체냐 타자냐다. 타자는 마주보지 않는다. 눈을 맞추지 않는다. 동물원에서는 동물과 시선을 마주치면 안 된다. 정면으로 쳐다보면 공격신호다. 눈 깔아! 양아치 말투다. 사람도 가족이나 동료가 아니면 시선을 외면한다. 철학은 유물론과 유심론, 관념론 등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 어쩌라고? 대개 쓸데없는 소리다. 신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 신의 문제는 신이 어련히 알아서 조치하겠느냐고. 문제는 당신이다. 당신은 나와 눈을 마주칠 것인가 아니면 나의 시선을 피할 것인가? 시선을 마주치면 가족이고 시선을 피하면 남남이다. 남남이면 각자 갈 길 가는 거다. 내게 말 걸지 마라. 꺼져! 내 글 읽지 마. 남이야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게 아니라면? 무슨 상관이 있다면 근거를 대야 한다.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의미론이냐 허무론이냐가 중요하다. 과연 의미가 있을까? 당신이 내게 말을 걸어올 빌미가 있을까? 어떤 의미를 말하는게 아니다. 우주 안에 의미 그 자체가 있느냐다. 신이 있으면 그걸로 신의 역할을 다하는 거다. 신이 내게 우쭈쭈 해줘야 하는건 아니다. 깨달음이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모든 사람이 깨달아야 하는건 아니다. 우주 안에 그런게 존재하여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 방향판단이다. 북극성은 그저 거기에 있기만 하면 된다. 북극성이 내게 뭔가 베풀어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주 안에 하나의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의미론이나 허무론이라는 말은 없다. 허무주의나 회의주의가 있을 뿐이다. 반대편에 합리주의가 있다. 합리란 무엇인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다. 세상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느냐 아니면 그냥 제멋대로 각개약진이냐다. 거기에 따라가는 길이 달라진다. 톱니가 맞물려 돌아간다면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봐야 한다. 일본인처럼 등을 돌리고 시선을 피하며 이야기하면 안 된다. 톱니가 맞물리지 않으면 헤어진다. 각자 제 갈 길 간다. 주체냐 타자냐. 주체면 서로 얼굴을 보고 타자면 시선을 외면한다. 유물론, 무신론, 허무주의, 염세주의, 회의주의, 무정부주의, 반지성주의, 노자사상은 세상을 타자로 보는 시선이며, 낯선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이며, 말을 걸지 못하는 것이다. 뭉쳐서 작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테러를 저지른다. 합리주의, 지성주의는 얼굴을 쳐다본다. 작당한다. 대승이다. 크게 세력을 이룬다. 얼굴 안 보려고 시골로 숨은 퇴계와 얼굴 보려고 서울로 올라간 율곡의 차이다. 소승은 얼굴 보기 싫어서 토굴에서 수행한다. 달마대사의 면벽구년이다. 고려가 망했다. 신라귀족이 고려귀족으로 이어졌다. 고려가 망하고 귀족들이 경주로 돌아가다가 소백산 고개 넘어 주저앉은 곳이 순흥, 영주, 안동이다. 조선왕조에 등을 돌렸다. 참여할 것인가 은둔할 것인가? 문빠와 진중권서민의 차이다. 구조론으로 보자. 세상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다. 맞물리는 톱니가 다섯이다. 질과 입자와 힘과 운동과 량이다. 각각 질대칭, 입자대칭, 힘대칭, 운동대칭, 량대칭이다. 대칭은 서로 마주본다. 그럴 때 서로는 평등하다. 비로소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도덕수양은 필요 없다. 왜? 평등하니까. 평등한데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있겠는가? 퇴계무리의 도덕타령은 사람을 차별하는 기술에 불과하다. 얼굴 마주보면 그걸로 충분하다. 거기에 양반상놈 없고 여자남자성소수자 없다. 흑인백인 없고 엘리트비엘리트 없다. 얼굴을 외면하니까 차별이 일어나고 세상에 말이 많은 것이다. 무슨주의 무슨주의 필요 없고 서로 얼굴 마주보면 된다. 합리주의, 지성주의, 긍정주의다. 대승이자 율곡에 공자다. 반대편에 소승과 퇴계와 노자가 있다. 그들은 반지성주의, 허무주의, 염세주의, 회의주의, 아나키즘, 유물론, 무신론, 실용주의, 부정주의, 차별주의다. 근데 이들이 더 많다. 왜 이들은 숫자가 많을까? 사지선다라도 정답은 하나고 오답은 셋이다. 태양은 하나고 행성은 여럿이다. 북극성은 하나고 별들은 많다. 정답은 하나고 가짜는 많다. 정품은 하나고 짝퉁은 많다. 이들은 책을 팔아먹을 요량으로 독자들에게 아부한다. 독자가 다양하므로 아부가 다양하다. 주체의 관점 - 합리주의, 지성주의, 긍정주의 - 세상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간다. 모두 내 가족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본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간다. 대승이다. 크게 세력을 이룬다. 집단지성을 추구한다. 권력에 참여한다. 앞장서서 주도하고 결과에 책임진다. 평등하다. 개인의 도덕보다 집단의 의리가 중요하다.
타자의 관점 - 반지성주의, 허무주의, 염세주의, 회의주의, 유물론, 무신론, 무정부주의, 실용주의 - 세상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지 않고 서로 상관하지 않으며 각자 존재한다. 세상은 생존경쟁이다. 모두 남이다. 얼굴을 마주보지 않는다.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소승이다. 개인의 인격수양에 골몰한다. 집단지성을 반대한다. 권력에 가담하지 않는다. 뒤에서 조롱하고 야유하다가 시들해지면 시골에 은둔한다. 남을 차별한다. 개인의 품성을 강조하고 의리가 없다.
무엇이 다른가? 주체의 관점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므로 함께 할 수 있다. 타자의 관점은 톱니가 맞물리지 않으므로 서로 비웃고 힐난하고 조롱하고 핀잔주고 폄훼하고 진중권서민한다. 결국 서로 싸운다. 의리가 없다. 이들과는 함께 손잡고 무슨 일을 할 수 없다. 세상에 무슨주의 무슨주의 하는게 많지만 죄다 개소리다. 일고의 가치도 없다. 책 팔아먹으려고 독자들에게 아부하는 거다. 독자들은 대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므로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말해준다. 문제가 있으면 시스템을 고치지 않고 개인을 씹는다. 무슨주의는 헛소리고 결국 톱니가 맞물리는 거다. 그것이 의미다. 인생에 의미가 있는가? 세상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가? 사회는 남이 아니고 우리편인가? 함께 손잡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가? 의리를 지켜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예스라고 답하는 것이 구조론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마주본다. 대칭을 이루기 때문이다. 질은 안과 밖이 마주보고, 입자는 중심과 변방이 마주보고, 힘은 좌우가 마주보고, 운동은 앞뒤가 마주보고, 량은 위치와 관측자가 마주본다. 질은 한국과 해외가 마주보고, 입자는 서울과 지방이 마주보고, 힘은 전라도와 경상도가 마주보고, 운동은 선발과 후보가 마주보고, 언론과 시청자가 마주본다. 무슨 의사결정을 할 때는 서로 마주본다. 그 순간은 평등하다. 그리고 차별이 일어난다. 그리고 다시 마주앉아야 한다. 그 패턴이 반복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대략 윤곽이 나온 것이다. 마침내 번호를 딴 것이다. 나침반과 지도를 손에 넣은 것이다. 시동을 걸고 내비를 켰다. 그대 출발할 수 있다. 톱니를 물고 계속 가는 것이다. 유물론이니 유심론이니 하는 소리는 잘못 만들어진 말이다. 초딩스럽잖아. 물질타령이라니. 마음타령이라니. 유치하긴. 어른스럽게 가자. 주체냐 타자냐다. 이건 고급언어다. 주체면 가담하고 타자면 외면한다. 그뿐이다. 외면하면 외면해준다. 가담하는 자는 손잡아준다. 노무현이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이제부터 감시하겠다는 자는 타자다. 그들은 게임에 초대받지 못했다. 노무현이 1년 안에 거기서 죽어 나올 수 있다고 호소하는데도. 초대받지 못한 자들은 발언권이 없다. 내밀어진 손을 잡을 자격이 없다. 진짜는 참여한다. 함께 노무현이 되어준다. |
그래서 업데이트가 필요하고 닳아서 없어진 만큼,
외부의 것을 동화시켜서 벌충을 해야 한다
그렇게 동화시키는 과정이 톱니의 맞물림이다
사물들은 층위가 맞을 때에 톱니의 맞물림이 일어나고
사건의 상호작용이 생기므로
서로의 층위에 대한 기꺼운 인식과 조율이 필요해진다
상호작용한다는 것은 층위의 차이로 인해서
눈을 내리깔게 되거나 치켜뜨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별을 방어하기 위한 시선의 회피가 없고,
대등한 입장에서 눈 맞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