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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4818 vote 0 2010.10.28 (22:25:02)

 


 두려움의 극복


  생각을 바꿈으로써 감정을 바꿀 수 있다. 감정의 가장 큰 부분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극복하면 다른 모든 감정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필자는 여덟살, 아홉 살 무렵에 연습하여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커다란 자신감을 얻어 세상을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게 된 것이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두려움의 극복이야말로 모든 철학과 사상의 출발점이라 하겠다. 세상과 나의 갑을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세상 앞에서 나의 입지가 수세적인 자세에서 공세적인 자세로 바뀌었다. 인생살이가 험난한 고생이 아니라 즐거운 게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이 신의 가벼운 퀴즈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것처럼 여겨진 것이다. 이는 필자의 경험이다.

  두려운 이유는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 하는지 그 실체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을 두려워 하는지 정확히 알면 두려움은 빛을 만난 어둠처럼 순식간에 도망쳐 버린다. 문제는 두려움의 궁극적 실체가 없다는 점이다.


  모든 두려움은 궁극적으로 죽음의 두려움에서 파생된다. 호랑이가 무섭다면 호랑이 그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다. 호랑이에 의해 자신이 죽음을 당할까봐 무서운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죽음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죽음 그 다음이 문제다.


  죽어본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죽음은 삶 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의도적으로 죽음의 실체를 의식할 수 없고 그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연습하면 죽음의 실체를 의식할 수 있다.


  연로하여 기력이 쇠해지면 죽음의 두려움이 상당부분 줄어든다. 죽음의 간접체험 때문이다. 예전에는 말기암환자에게 암에 걸렸고 치료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감추어야 한다고 믿었으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연구결과 사실대로 전했을 때 대다수의 암환자들은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사전에 신변을 정리하고 죽음에 대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오히려 유익했다고 한다. 남은 재산을 자신을 위해 유익하게 쓸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환자가 큰 고통을 당하는 비율은 10퍼센트 미만의 의외로 적은 수치였다고 한다. 죽음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순간 두려움은 사라진다. 내 곁으로 다가온 죽음을 실감하기 때문에 막연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다.


  전쟁터라도 그렇다. 적군이 보이지 않을 때는 패닉에 빠질 수 있으나 막상 적군이 눈앞에 나타나서 교전이 벌어지면 의외로 침착해진다. 인간의 감정은 본래 인간으로 하여금 행동을 촉발하게 하기 위해, 에너지를 증폭시킬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이 해야할 행동을 분명히 알고, 실제로 행동에 옮길 준비가 되었을 때 감정의 과도한 개입은 사라진다. 


  두려움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두려움은 훈련으로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는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커다란 자신감을 얻게 되며 다른 모든 감정에 있어서도 자유로와진다. 인간과 감정본능의 대결에서 인간이 우위에 서게 되면 게임 끝이다.


  두려움은 어떤 상황에 직면하여 뇌가 그 상황에 대한 정보를 필요로 할 때, 뇌로 필요한 정보가 충분히 가지 않아서 뇌의 판단이 불가능한 경우, 비명을 질러서 다른 사람을 그 사건에 끌어들이고, 그 외부인에게 자기가 해야 할 판단을 위임하는 생존본능이다. 이 안에 정교한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돌발상황이 일어났을 때 어린이는 스스로 판단하기 보다 타인에게 판단을 위임하는 것이 더 생존에 유리하다. 그러나 부모를 잃고 홀로 된 소년이라면 다르다. 무섭다고 비명을 질러봤자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올 보호자가 없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잘 느끼지 않는 애어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안다면 의식적으로 뇌로 정보를 보내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누구라도 발밑이 저릿함을 느낀다. 눈동자의 원근조절 실패로 눈에서 뇌로 정보를 옳게 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때 눈동자는 가까운 발밑을 봐야 할지, 아니면 까마득한 먼 곳을 봐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둘을 동시에 보려 하면 어찔어찔 하다.


  이때 먼 곳에 신경쓰지 않고 가까운 곳에 초점을 고정시키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뇌에 필요한 정보를 공급하게 되기 때문이다. 훈련된 사람은 높은 곳에 있어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뇌로 필요한 정보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의도가 개입하여 복잡해진 경우다. 스스로 자신을 응석받이로 규정하고 자상한 할아버지의 관심을 끄는데는 겁쟁이 캐릭터가 더 유리하다는 계산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버릇을 들이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자신의 의도된 전략을 본인이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증세가 심해지면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어도 뇌가 극복을 거부하게 된다. 이성적 사고를 거부하고 감정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태도를 가진다. 심하면 감정중독이라 하겠다.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은 숫자만 봐도 짜증이 나고 답답해진다. 뇌가 거부하는 것이다. 감정의 극복도 뇌가 거부하는 수가 있다. 감정속에 빠져 그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이는 의식적으로 훈련해서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이 뇌의 의도된 전략이기 때문이다. 응석을 부려서 주위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심리다.


  의도는 일관성을 따지므로 여기서 물러서면 다른 모든 정신적 문제에 있어서도 물러서야 한다. 한번 이성을 회복하고 감정을 극복해 버리면 다른 모든 문제에 있어서도 감정을 극복해야 하며, 그 경우 애늙은이 캐릭터가 되어 매력을 잃어버리는 수가 있다.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려면 자기 캐릭터를 완성해야 하며 응석받이 캐릭터로 정해버렸다면 감정의 극복은 곤란해진다. 그 경우 주위에서 격려해주면 응석받이 노릇이 어색해져서 캐릭터를 바꿀 수 있다. 반대로 오냐오냐 해주면 계속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겁쟁이로 굳어져 버린다.


  필자가 여덟살, 아홉살 때의 일이다. 겨울이면 산에 땔감을 하러가야 했는데 돌아올 때는 겨울이라 해가 일찍 져서 날이 아주 깜깜해져 버리는 때가 많았다. 달도 없고 별도 없어 칠흙같이 어두운데 발밑도 보이지 않는다.


  두려움이 앞을 콱 막아서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왜 두려운지가 궁금해졌다. 도무지 내가 무엇을 두려워 하는 것일까 하고 골똘히 생각했다. 그 두려움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 깨달은 것은 어떤 두려움의 대상을 두려워 하는게 아니라 그 두려워 하는 대상의 부재를 두려워 한다는 사실이었다. 귀신은 무섭지만 정말 눈앞에 귀신이 나타나서 ‘나 귀신이야’ 하고 밝히면 무서울 것 같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흥미를 가지고 무슨 영문인지 그 귀신과 대화를 나누어 보는 것도 좋은 것이다. 귀신을 만나면 무슨 대화를 나눌지 미리 정해놓는 것도 좋다. 곰곰이 생각해보고 알게 되었다. 두려움은 뇌로 정보가 가지 않아서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발로 슬그머니 땅을 굴러보았다.


  내 발소리가 들리고 땅의 촉감이 느껴진다. 두려움은 사라졌다. 이후로 어둠이 두려울 때는 막대기로 솔가지를 툭툭 쳐서 소리가 나게 하는 방법을 썼다. 사방에 소리와 촉감이 가득차게 된다. 그 소리와 촉감들이 촛불처럼 환하게 길을 밝힌다. 그 순간 두려움은 사라져 버렸다.


  어둠을 즐길 수 있다. 고요한 밤이면 사방은 온갖 소리로 가득찬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 몇 키로 밖에서 들리는 아기울음 소리, 동네 개가 짖는 소리, 4키로 밖에 기차 지나가는 소리. 그 소리들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그려낸다.


  나의 존재는 그 소리들 속으로 스며들어 세상과 내가 하나가 된다. 세상이 나의 몸이고 팔이고 다리라고 느껴질 무렵이면 두려움은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두려움은 단지 뇌로 필요한 정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는 없는 정보를 만들어내면 된다. 노래를 부르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발로 땅을 굴러서 생산한 정보를 뇌로 보내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눈을 감고 걷는 연습을 해볼 수 있다. 눈을 감고 10미터 쯤 걸으면 앞에서 뭔가 가로막는다는 느낌이 든다. 처음엔 잘 가다가 어느 지점부터 더 이상 눈 감고 걸을 수 없다. 한 걸음 내디딜 때 마다 앞에서 강한 힘이 앞을 막아선다. 뇌가 정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10미터 까지는 사전에 보아둔 것이 있고, 그 다음은 뇌가 확신을 못한다. 뇌가 추가정보를 요구할 때 감정으로 나타난다. 발로 땅을 구르거나 하는 방법으로 정보를 생산해서 몇 미터를 더 걸을 수 있다.


  초보운전 시절의 일이다. 밤길에 가로등도 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백미러를 보면 뒤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앞은 헤드라이트가 비추고 있지만 뒤는 깜깜하다. 뭔가 불안하다. 뒤에 따라오는 자동차 불빛이라도 보이면 안도감이 든다.


  운전자는 전방을 주시해야 한다. 차선을 바꿀 일도 없는데 공연히 후방을 주시할 필요가 없다. 뒤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자꾸 백미러로 시선이 가면서 뒤에서 뭔가를 찾으려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뒤에도 뭔가 있어야 한다는 식이다. 이는 뇌가 본능적으로 정보를 요구하는 것이다. 훈련하면 극복할 수 있다.


  달걀귀신이 무서운 이유는 눈, 코, 입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을 볼 때 눈동자를 찾으려는 본능이 있다. 달걀귀신은 눈이 없기 때문에 무섭다. 뱀이나 쥐나 거미도 눈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섭다. 눈이 또렷하고 크면 귀엽다.


  대상이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되지 않을 때 무섭다. 모르기 때문에 무섭지 알면 무섭지 않다. 개가 무서운 이유는 개를 다루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단번에 제압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사나워 보이는 개가 접근할 때는 손에 뭔가를 쥔 척 하고 손을 들어올리면 개는 사람의 손을 쳐다본다. 혹시 먹이가 아닌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 정도만으로 대처할 여유를 얻어 개를 제압할 수 있다.


  누가 상황을 주도하느냐가 중요하다. 자신이 상황을 주도하지 못하므로 두려운 것이다. 개가 나의 행동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갑과 을이 역전된다. 그 순간부터 내가 주(主)고 개는 종(從)이다. 주종관계가 바뀌면 그때부터는 흥미가 유발된다. 개를 갖고 놀게 된다. 필자는 어지간히 사나운 개라도 간단한 손동작으로 개의 주의를 돌릴 수 있다. 개는 지능이 낮으므로 호기심을 유발시켜 주면 대개 고개를 갸웃하며 동작그만 상태가 된다.


  강도든 깡패든 도둑이든 호랑이든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하며, 그러한 훈련을 해두어야 한다. 그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지 상상으로 연습을 해 두는 것이다. 상황발발시 1단계, 2단계, 3단계 대응매뉴얼을 연습해 두어야 한다.


  두려움은 위험에 처했을 때 타인과의 협력을 요구하는 뇌의 현상이므로, 타인과 협력하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형이 옆에 있으면 깜깜한 밤길이라도 무섭지 않다. 위험이 나타나도 자신이 판단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기 시에는 자신이 의존할 대상을 미리 확보해 두어야 한다.


  가족과, 국가와, 민족과, 역사와, 진보와, 이념과, 자연이라는 형제를 사귀어 두어야 한다. 진리는 언제라도 믿음직한 친구가 된다. 최종적으로는 신에게 의지할 수 있다. 역시 아는 것이 중요하다. 가족의 의미, 국가의 의의, 민족과 역사와 진보와 이념의 분명한 실체, 자연의 본모습, 진리가 작동하는 방식, 신의 참다운 모습을 정확히 알게 될 때 두려움은 사라진다. 


  공동체와 국가와, 역사와, 이념과, 자연을 추상적으로 알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막연하게 국가와 이념과 자연을 대하여서는 곤란하다. 그것이 하나의 성장하고 발달하는 조직이자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거기에 그 작동하는 시스템의 운전사로 올려태울 수 있다.


  막연하게 자연을 사랑한다든가, 막연히 진리를 안다든가, 막연하게 신을 믿는다는 식은 곤란하다. 그 안에서 작동하는 에너지의 실체를 분명히 알고, 자신이 그 흐름 위에 올라타고 그 흐름과 호흡을 일치시킬 때 그 자연이, 그 진리가, 그 신이 나와 혼연일체가 되어 죽음을 극복할 수 있게 되고, 세상 앞에서 내가 갑이 되며 모든 두려움은 한낮의 안개처럼 문득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공동체가, 국가가, 자연이, 진리가, 세상과 신이,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승객이자 운전사인 내가 도무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지금 어디쯤 와 있으며, 그 흐름 안에서 당장 무엇을 해야할지 명확히 알고 연습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막내는 형을 의지할 수 있지만, 형은 의지할 대상이 없다. 자신이 리더가 되면 협력하고 의존할 타인이 없다. 리더가 되려면 의식적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리더는 그 조직의 성장에 의지한다. 부하는 상사에게 의지하고 CEO는 그 기업이 성장이 끌어내는 가속도와 그에 따른 관성의 법칙에 의지한다. 그 일관성에 신뢰가 있다. 아우는 형에게 의지하고, 형은 가족의 성장에 의존한다. 리더는 그 조직의 성장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반면 리더가 아니라도 스스로 리더의 마음을 얻을 필요가 있다. 자신이 대통령이 아니라도 대통령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 이 나라가 도무지 어디로 굴러가는지 정확히 알게 되고 그 가는 방향을 알게 되면 호연지기가 일어난다. 두려움에 가득찬 보수적인 마음은 상쾌하게 씻어져 버린다.


  이문열 등이 걸핏하면 ‘뭐가 우려된다’, ‘나라가 걱정된다.’ ‘북의 남침이 무섭다’고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은 겁쟁이라서 그렇다. 그들에게는 호연지기가 없다. 리더의 마음이 없다. 선장의 마음이 없다. 이 나라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이 항해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른다. 날로 성장해 가는 이 나라의 진보하는 방향성이 보이지 않는다. 내 눈에는 보이는 등대가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뇌를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뇌는 자신을 고립되었다고 여기고 의지할 무언가를 찾으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낸다. ‘형 무서워!’ 하고 매달리던 일곱 살 꼬마의 마음으로 말이다.


  신의 마음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면 두려움은 우습게 된다. 신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신의 계획에 동참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을 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신과 하나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모든 감정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며 타인과 협력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타인과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우울증이든 뇌가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왜 눈물이 날까? TV에 나온 장면이다. 부모와 떨어져 있는 꼬마 소녀는 혼자서 가장 역할을 하지만 결코 울지 않는다. 한 달에 한번 있는 어머니를 만나는 날이다. 외지에서 일하는 어머니가 선물을 가지고 찾아온다. 어머니를 만나는 그 기쁜날에 어머니 모습만 봐도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너무 울어서 어머니와 말을 나눠보지도 못할 정도가 된다.


  왜 서럽다고 눈물이 날까? 왜 기쁜 장면에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일까? 영화에서 감독은 관객이 눈물을 흘려야 할 포인트를 찍어준다. 오해가 풀리고 대중이 주인공을 받아들이는 시점이다. 눈물은 타인을 자기에게 개입시키는 장치이며 그것은 뇌가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뇌가 타인이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는 충분한 증거를 얻지 못하면 계속 눈물을 요구한다. 충분히 어리광을 피워야 눈물은 사라진다. 이때 눈물은 그 상황에서 연출된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부재한 30일간 뇌가 축적하여 둔 것이다. 저축해둔 눈물이 쏟아진 것이다. 그러므로 눈물을 극복하려면 어머니가 부재한 30일간 무언가로 뇌를 채워야 한다. 뇌에 필요한 정보를 공급해야 한다.


 

http://gujoron.com




[레벨:15]lpet

2010.10.28 (22:41:29)

<어리광>으로 책을 내도 되겠소.
프로필 이미지 [레벨:2]김미라

2010.10.28 (23:14:03)


"인간의 가장 큰 비극중에 하나는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Virginia Satir)
 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부터가
두려움 극복의 시작이겠네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6]지여

2010.10.29 (00:33:58)

 극복해야 할 감정의 두 얼굴이 두려움과 부러움이라 생각합니다
두려움의 대척점에 부러움이 있지 않을까요?   수구골통과  찌질이 진보 의 양대 무기이기도 하구요 
이문열류 사이비종교 먹사들이 공포(두려움)장사로 짭잘하게 재미본 또 다른 반대편에서 김수현류 조중동한경오류  가짜지성류 들은 부러움장사로 부당이익 많이 가져가지요.   영어부러움 부자부러움 간판부러움 등등 

상대방에 대한 부러움 극복 역시,  방법은 님이 설명한 공포극복과 같은 루트이겠지요.

부러움 실체를 확연하게 아는 것이 우선
  막연한 부러움....  모르면서 부러워하게 만드는 ..
. 김수현류의  재벌가  부자 미남미녀 찬양 과 
. 김정일에 대한 북한주민들의 부러움 
. 먹물진보들의 유럽타령, (내 유학시절때.. 어쩌구 저쩌구)으로 신문컬럼 도배
 비슷한 맥락.......... 아닐까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7]鄭敬和

2010.10.29 (01:13:51)

 여덟살, 아홉살 때의 일이다. 겨울이면 산에 땔감을 하러가야 했는데 돌아올 때는 겨울이라 해가 일찍 져서 날이 아주 깜깜해져 버리는 때가 많았다. 달도 없고 별도 없어 칠흙같이 어두운데 발밑도 보이지 않는다.



아, 요즘 이모의 친구조카(?) (9세 초딩2) 꼬마애를 알게됐는데,
나 소시적 저나이때 분명 뭔가를 알았지만 애매했던 것 같다.
녀석은 현재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할머니와 아빠사이에서 성장중인데
응석을 부리고 싶은마음이 크겠지싶다.
두번 함께 만났을뿐인데 엄마뻘 되 보이는 내 품이 아쉬운가보다.
계속 전화 해쌋는데 귀찮아죽겠다.
근데 무서운건 목소리가 완죤 애기다.
내가 저나이때 저랬나?
얘야... 난 그렇게 착하지가 못해ㅜㅜ
고딩때 생활기록부에 선생님마음데로 내 장래희망을
유치원선생님이라고 적어서 황당했던 적이 있는데
난 난 난
진짜 애들을 좋아할 줄 모르나보다. 아아악
미안해 ㅜㅜ
사랑한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김미라

2010.10.29 (02:06:16)


'두려움의 대상에 대해 아는것' 이란 결국,
아래 마음의 병리에서 제시하신,
관계의 양과 질을 확장하고 넓히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네요.

모든 마음의 병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조금 알것 같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8]아제

2010.10.29 (13:24:30)

빛이 어둠을 일시에 걷어가듯.

이 글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두려움의 종식을 선언했소.

이제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사전에서 지워도 좋소.

유쾌하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0.10.29 (18:25:15)

전에는 상대가 나는 이런 사람이야...등등 나는 왜 이럴까..그러면서도 은근하게 자기를 알리려는 얘기들을 들을 때면...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나중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것이 나에게 압박이 되는 것을 느꼈는데...아마도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 압박이 왜 일어나는지 상대의 그런 어리광을 제제할만한 힘이 나에겐 없다는 그것이 두려움이 되어 스트레스를 받게 했던 것 .

지금은 저 사람이 뭐가 문제군... 저 사람이 자신이 하는 말과 해동에 대해서 스스로 전혀 아는 것이 없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스스로 모르는 것에 말을 해주게 되는데.... 그러면 상대가 너무 당황하는 것 같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서 얘기가 끝나게 되는데...
특히나 자신의 그런 점들이 안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안주하여 자신이 착한사람, 마음이 약한 사람, 혹은 다른 사람을 많이 생각하는 사람, 체면을 아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포장을 해버리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리고 그것을 계속 반복해서 얘기를 하는데(다른 얘기인것 같지만, 상황만 다르고 레파토리는 똑같음)...결국 이것이 듣는 사람에게는 장기간 쌓이면 압박이 되어서 스트레스 받게 되는 것이구요. 주입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주입이 아니고 지겨운 것을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는 것. 아무 발전도 내용도 없는..그저 자신의 신세한탄, 혹은 자랑까지는 좋은데 결국 같은 내용의 반복들...


그래서 그러한 점이 왜 그런지, 그리고 왜 자신 스스로에게 안 좋은지 애기해주면....
ㅋㅋ..나중에는 가르치려 든다고 생각하거나 화를 내기도 하고...
특히 나이가 드신분들은 더 그러한 성향이 강하다고 생각도 되구요.
자기자신은 자신의 모습에서 일관성을 느끼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상대가 왜 그러한지를 내가 안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상대의 얘기를 들어주는 아량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반복이 상대를 지치게 하고 상대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자기자신 스스로 발전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한 것 같구요.

 에궁...그러고보니 저도 그랬던 적은 많았던 것 같고..아직도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변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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