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가지 마음 마음은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여 이를 내부에서 처리하고 그 결과를 다시 외부로 나타낸다. 마음이 처리되어 외부로 나타난 것은 행동이고, 처리되지 않고 남은 것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은 욕망이다. 마음이 외부의 자극을 처리하는 수준에 따라 다섯 층위가 있다.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이 그것이다. 다섯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이다. 다섯가지 마음은 인간의 진화하며 환경과 교감하는 과정에서 얻어졌다. 진화의 뿌리를 더듬어 마음이 탄생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마음의 실체를 알 수 있다. 마음은 처음 지구에 출현한 원시 생명체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신경은 빛이나 소리의 자극을 전기신호로 바꾸어 복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복제된 정보를 뇌에 저장하면서 마음이 탄생한 것이다. 마음의 본질은 외부 자극에 대한 대응이다. 하등동물은 외부의 자극에 대해 단순히 반응할 뿐이지만 진화하면서 그 대응의 수준을 점차 높여간다. 대응의 수준을 높인다는 것은 자극을 가하는 원인측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소리에 놀라 반응하다가 나중에는 소리를 보내오는 음원에 대응하는 식이다. 호랑이 울음소리를 듣고 처음에는 호랑이 울음소리에 반응하지만 나중에는 호랑이 그 자체에 대응한다. 소리에 놀라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를 물리치는 것이다. 생명의 진화에 따라 마음이 외부의 자극에 대응하는 수준이 점차 진화해 왔다. 그 진화의 순서는 마음이 전개하는 순서인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순서와 완전히 반대된다. 이 작용 반작용의 순서를 바로 알아야 한다. 중국 속담에 ‘늦게 팬 장작이 위로 올라간다’는 말이 있다. 마음의 진화는 가장 낮은 단계인 감정에서 먼저 시작된다. 감정은 외부의 신체자극에 대한 직접적인 신경반응이다. 때리면 아픈 것이 감정이다. 아픔은 물리적 반응이다. 기쁨이나 슬픔도 본질은 이와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외부에서 몽둥이로 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호르몬으로 때린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모든 감정은 물리적인 직접자극과 그에 대한 신경반응 형태로 존재한다. 외부에서 전해지는 소리나 빛이나 냄새나, 반대로 내부에서 전해지는 기쁨이나 슬픔이나 ‘때리면 아프다’는 자극에 대한 반응공식은 정확하게 같다. 생명체가 진화하면서 외부자극에 대한 대응수위를 높여 자기 스스로 자극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 감정 다음의 생각이다. 시각으로 받아들인 빛 자극과 청각으로 받아들인 소리 자극을 신경이 복제하여 뇌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필요한 때 다시 떠올리는 방법으로 동물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자극의 복제는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른 구조원리로 설명된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여 외부자극에 대한 대응수준을 한 차원 더 높여내는데 성공한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던 자극을 인간이 자기 입으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자극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위상이 변경된 것이다. 소극적으로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극을 창조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감정, 생각 다음에 오는 의도이다. 감정과 생각과 의도는 구체적인 자극의 대상이 존재한다. 거꾸로 그 자극의 대상에 맞서는 자기 자신까지 마음의 통제대상에 포함시킨 것이 의식이다. 인간이 의도를 가지게 되어 스스로 자극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자극을 가해오는 외부의 대상 뿐 아니라 자극을 생산하는 자기 자신까지 통제하게 된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자극을 촉발하는 외부환경까지 총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 정신이다. 감정과 생각과 의도는 구체적인 자극의 대상이 존재하는데 비해 의식과 정신은 그 대상이 없으므로 무의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짧은 소견이고 인간의 깨달음에 의해 의식과 정신도 마음의 통제권 안으로 들어온다.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은 자극의 구체적인 대상이 있느냐 없느냐다. 자극하는 대상이 소리라면 소리에 직접 반응하는 것이 감정, 그 소리를 복제하여 뇌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꺼내 쓰는 것이 생각, 인간이 스스로 소리를 생산하는 것이 의도, 그 소리를 생산하는 자기 자신까지 통제하는 것이 의식, 인간이 그 소리를 주고받는 외부의 환경까지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정신이다. ◎ 감정 - 단순 반응한다. ◎ 생각 - 조직적으로 대응한다. ◎ 의도 - 반대로 인간이 대상에 작용한다. ◎ 의식 - 환경을 지배하는 인간 자신을 통제한다. ◎ 정신 - 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바꾼다.
인간은 진화하면서 감정≫생각≫의도≫의식≫정신으로 점차 외부의 자극에 대한 대응의 수위를 높여왔다. 적이 쳐들어 왔을 때 비명을 지르고 달아나는 것은 감정, 적이 침략하여 온다는 사실을 알고 미리 피하는 것은 생각, 거꾸로 선제 공격하여 적을 물리치는 것은 의도, 아군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통제함으로써 적의 칩입의도를 분쇄하는 것이 의식, 적과 외교하여 평화공존하는 길을 택함으로써 원초적으로 전쟁을 방지하는 것은 정신이다.
감정은 대응의 수준이 낮다. 이미 적이 침투해 왔다면 재빨리 도망친다 해도 상당한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생각은 사전에 대비함으로써 피해를 줄일 수 있지만 적은 언젠가 또다시 침투할 것이므로 완벽한 방법은 아니다. 의도는 적을 무찌르지만 그 과정에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아군의 힘도 소모된다. 의식은 힘을 길러 적의 침략의도를 분쇄하는 좋은 방법이지만 역시 긴장상태는 존재한다. 정신은 터놓고 친구가 되어 적이 사라진다. 완전한 해결이다. ◎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 무의식 <- -> 의식 마음은 다섯이 존재하지만 흔히 무의식과 의식 둘로 구분한다. 여기에 용어의 혼선이 있다. 중요한건 포지션이다. 정확히 어디까지가 의식인지는 고착되지 않는다. 깨달음은 무의식을 의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자아가 미성숙한 사람은 의도와 생각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다. 부지런한 학습에 의해 자아가 성숙하여 의식화 해야 비로소 의식되는 것이다. 의식이 두 번째 자리에 오는 것은 교양있는 사람 기준으로 그러할 뿐이며, 만약 인간에게 언어가 없다면 생각도 의식적으로는 하지 못한다. 동물도 생각을 하지만 거의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에 솥뚜껑만 봐도 자라가 연상되는 식으로 저절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이 경우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도 모르기 때문에 무의식이다. 동물은 대개 감정만 겨우 의식한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문제의 난이도에 따라 다르다. 사소한 문제라면 동물도 정신과 의식과 의도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이는 상대적이다. 깨달음을 얻어 정신의 단계까지 의식하는 경지에 오른 고도로 훈련된 사람도 넋이 나가 있을 때가 있고, 동물들도 작은 사건에서는 고도의 지적의 행동을 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방향성은 분명하다. 정신쪽은 항상 무의식이고 감정쪽은 항상 의식이다. 의식은 마음이 쓰이는 대상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인간을 자극하는 무엇이 있다. 의도와 생각과 감정이 있어서 지속적으로 마음을 쓰이게 한다. 신경쓰이는 거다. 무의식은 그 마음이 쓰이는 대상이 없는 것이다. 불가에서 무아니 무상이니 무소유니 하고 무(無)자를 즐겨 쓰는 것은 그 의식되는 구체적인 대상, 신경쓰이는 자극의 대상을 비우라는 것이다. 이는 적과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찾으라는 말과 같다. 감정의 도망치기, 생각의 피하기, 의도의 선제타격 대응은 주도권이 상대에게 있기 때문에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의식의 자주국방, 정신의 평화공존은 주도권이 내게 있기 때문에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 ‘마음을 비우라’는 것이 말이 쉬울 뿐 실제로는 실천하기 어렵다. 누군가 앞에서 계속 깐죽거리면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깊은 산 속에서 홀로 은거하며 마음을 비우고 평화롭게 살 수 있지만 구차한 도피에 불과하다. 적극적으로 상황을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의 첫 번째 적은 외부의 자극이고 두 번째 적은 욕망이다. 추위와 더위, 모기의 공격, 시끄러운 소음과 같은 외부자극은 도력이 높은 큰스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라는 말은 주로 두 번째 적인 욕망을 잘 다스리라는 말이다. 욕망과 싸우다 힘빼지 말고 욕망을 잘 사귀어 아군으로 만들라는 말이다. 욕망은 자기 내부에서 만들어진 자극이다. 외부의 자극을 마음이 처리하면 행동으로 연결된다. 이때 처리가 충분하지 않으면 욕망의 형태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 관찰이고 본질로 보면 욕망 역시 외부에서 온다. 추위나 더위 같은 외부자극과 기쁨이나 슬픔같은 내부자극은 본질에서 같다. 인간이 성공하고자 욕망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며 죽음은 외부에서 찾아오는 소식이다. 내 마음이 스스로 죽음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외부와의 관계설정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마음 비우기, 마음 버리기, 마음 내려놓기는 실패할 뿐이다. 소극적인 방법이 아닌 적극적인 방법이어야 한다. 수동적인 방법이 아닌 능동적인 방법이어야 한다. 무아니, 무상이니, 무소유니, 평상심이니 하는 불가의 방법은 수동적이고 퇴행적인 방법이며 분명한 한계가 있다. 적극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의식을 가지고, 의도를 가지고, 생각을 해야 한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잘못이 쌓여서가 아니라, 그다지 잘한게 없기 때문이다. 무아니, 무상이니, 무소유니 하는 소극적인 방법은 개인의 잘못을 줄이려고 하는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방법으로 불행을 줄이려는 거다. 그러나 지금은 21세기다. 잘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창의하고 혁신하여 인류의 위대한 진보와 함께 나아갈 때 잘한 것이 쌓이는 것이며, 그럴 때 인류 모두가 힘을 모아 큰 세력을 형성함에 따라 개인의 잘못은 그 안에서 용해되어 이슬처럼 사라져 버린다. 우일신하여 인류의 진보와 함께 보조를 맞추고 그 안에서 확고한 자기 포지션을 차지할 때 두려움도 없고, 슬픔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다. 불행도 없다. 눈물도 없다. 특히 종교의 기능이 그러하다. 종교에서 욕망을 줄이라, 근심을 버려라, 마음을 비우라 하고 주로 마이너스적 가치를 강조하지만, 인간이 실제로 종교에서 위안을 얻는 것은 종교 공동체와 더불어 크게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얻는 플러스 가치 덕분이다. 욕망이 줄어서 마음이 편안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더불어 세력을 형성하고 진보하여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은 것이다. 항해하는 배가 빠르게 속도를 낸다면 큰 파도라도 거뜬히 타고넘을 수 있다. 반면 그 배가 항해를 멈춘다면 작은 파도에도 크게 흔들리게 된다. 그 차이다. 그 종교도 한계는 있다. 교세가 날로 늘어나고 신앙생활에 흥미가 붙고 더 많은 교우를 사귀게 될 때는 마음의 안정을 얻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위태롭다. 근원의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나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가? 힘을 모아 크게 세력을 이룬 공동체의 위대한 항해 안에서 그 답은 얻어진다. 그 참다운 답을 얻을 때 위태롭지 않다. 진보하는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역할과 의미를 정확히 알게될 때 그것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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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뭔가 꽉 차오르는 것 같네요.
이런 걸 쾌감이라고 하나 보오.
한 두번 들었을때는 우선 전체맥락을 이해하기 바쁘느라 그냥저냥 넘어갔는데
거듭 들어보니 지금까지 살면서 별로 잘한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들 나름대로는 잘한다고 하고 살았을 것이고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겠지만
돌아보면 자기한 몸을 또는 내가족 위한 것이 전부였던게 아닐런지요.
그러나 그것 또한 결과적으로 볼때 별로 좋아진게 없고 남들 따라가기 급급했지요.
그러면 왜 그렇게 됐을까.. 왜 잘한게 없을까??
그 모든 것이 몰라서 그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모르니까 잘 할수가 없지요.
뭐를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알면 열심히 하겠는데 모르기 때문에... 이런 핑계로 위안을 삼습니다.
무의식을 의식의 상태로 이끌어 내는 것.
무의식을 의식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무의식이란 말에 거부반응이 있었는데...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을듯...
나누어 주신 '언어'의 중요성과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문화에 따라 어떤 특정 단어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것에 대한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언어가 우리의 생각을 얼마나 지배하고 있는 지요.
물론 개념이 없어 언어가 발달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언어가 창조되는가, 발견되는가는 또 다른 문제일것 같습니다.
한편, 의식과 무의식을 자극의 구체적 대상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나누어 주신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접근방법인 것 같습니다.
행동주의 이론에서 '학습'을 설명하면서,
단지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그것이 자발적인지
비자발적인지를 구분하고 있는 수준이지요.
기존에 제가 알고 있던 (심리학에서 소위 말하고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개념이나 정의와는 많이 상이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구체적인 설명에도 다소 혼란스럽네요.
제가 이해를 한 것은,
우선 감정과 생각은 극히 비자발적인 반응(involuntary reacting:내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고),
의도는 자발적인 반응 (voluntary reacting or responding:통제 할수도 있고 때로 할수 없기도 하고?),
그리고 의식은 작용(responding: controlling?)으로..
예를 들어, 감정과 생각이 일방적으로 편지를 받는 것이라면,
의도는 그 편지에 대한 답장을 보내는 것이고,
의식은 내가 먼저 편지를 띄우는 것이고,
정신은 .....
구체적으로 제 자신과 일상에 적용을 해보니,
아직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제시하신 '다섯가지 마음'은 심리학에서는 성격구조(Personality structure)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론마다 각기 다른 성격구조의 개념과 단계, 정의, 그리고
당연히 인간에 대한 가정이 많이 다르지요.
아직 구조론 책이나 선생님의 글을 많이 읽지 못해서,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인간에 대한 가정(assumption)'을 제가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려주신 글 어딘가에 적어 좋으셨을 것이고,
아니면 선생님의 글속에 자연스럽게 묻어 있을 텐데..
추가적인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그리고 한가지 더 부탁드리면,
'공감(empathy)'에 대해서 입니다.
내담자를 만나면서, 아니 만나기전부터 상담에서
어떤 상담이론을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배웠고,
상담세션중에 또한 얼마나 파워플하고 중요한지 깨닫고 있습니다.
공감이라는 개념과 다섯가지 마음과는 어떤 연관이 있을 런지요.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여러가지 정리되지 않은 질문을 드렸는데..
미리 감사드립니다.~
인식론적인 방향을 존재론적인 방향으로 바꾸어야 얘기가 풀릴듯 합니다.
하부구조는 결과이고 상부구조가 원인인데 생각과 감정은 하부구조이므로 어떤 것의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의식이 대상(내외부세계= 통털어 정신, 내외부와 접촉을 하는 수단은 눈,코,귀,입,몸이지만 그것을 전체적으로 관장하는 것은 뇌, 그래서 정신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 의식이고 이 의식의 활동에서 의도,생각, 감정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봄)을 접하고 활동을 하면 그 결과로서 감정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기에 ... 이렇게 다섯단계가 맞물리면서 일어나지만, 역으로 통제와 제어는 감정은 생각으로 생각은 의도로 통제가 가능하고 의도는 의식으로 의식은 정신으로 통제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정신으로서 모든 통제가 가능한 것이 가장 고차원적이기에 의식화를 이루는 것이고, 이 의식은 대상이 있는 것, 명확한 것을 접하면 우리가 금방 알지만, 무의식적으로 반복적으로 접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식 자체는 의식을 하지만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지나가기에(의식을 하기에 행위가 일어나는 것이므로) 무의식이라 하고,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라고 하는 것이라고 보며,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것들에 대해서 인지하여 의식하는 것이 무의식을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보며... 무의식도 의식이 의식하지만, 그것이 워낙에 습관적,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기에 의식하지 못하고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되기에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의식이란 것이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의식하고 있지만 우리가 결과적으로 그것에 대해 느끼지 못하고 지나가므로 무의식이라 이름 붙여준 것이기에 원래 무의식이란 없는 것이지만, 인간의 인식론적인 관점에 의해서는 어쨌든 알지 못하고 넘어가므로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거의 자동적으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을 관찰하면 무의식을 볼 수 있다라는 말이 생긴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습관을 고치기가 힘든 것은 무의식적으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습관이란 이미 굳어져서 의식을 억지로 하지 않으면 고치기 힘듭니다. 아침에 늦잠자는데 , 그것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동반사적인 행위와 가깝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일이 있으면 의식적으로 억지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부분들을 관찰해보면 어떻게 무의적으로 진행되고 있는가를 알게되고, 이러한 것을 아는 것이 무의식을 의식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혹은 대중문화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서 영향을 받아서 행위에 대해서도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은대로 할 때도 있습니다.무의식이 거의 사고활동과 행위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무의식적인 부분을 의식적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을 충족 시키기 위해서 하는 행위들도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모두 하부구조의 영향아래 놓이게 되어서 문제가 많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여 무의식적인 부분들을 상부구조인 의식의 영역에서 접하고 ,또는 통제하도록 하는 것이 의식화라고 생각되며, 그것이 무의식으로 방치하는 것이 아닌 의식의 영역에서 의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식의 영역아래 두면 무의식적 상향에서 주는 불필요한 부분들은 폐기처분할 수도 있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행했던 것이 어떤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다면 그것을 의식으로서 더 유익하게 발전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현재 서양에서 관찰하는 부분들이 모두 하부구조에 집중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그 이유는 인식론적인 부분에서 접근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방향을 바꾸어 존재론적인 접근을 하여야 정확한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의식으로 되는 이유는 지능이 낮아서 그렇습니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지능이 낮으면 정신 의식 의도 생각 감정 다 무의식이고
깨달으면 전부 의식입니다.
이건 상대적입니다.
생각이나 감정을 무의식으로 하는 이유는
과거에 정신 의식 의도를 설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갓난 아기는 뱀을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
자라면 뱀을 무서워 하는데 이는 의식과 의도에서 설정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구조론은 존재론과 인식론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데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끝나고 다시 무의식으로 가지 않으며
다시 무의식을 가는듯 보이는 이유는 두 개 이상의 사건이 겹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론과 인식론을 구분하면 이런 오류는 사라집니다.
가만 있었는데 그냥 화가 난다면 반드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의도를 자기가 의식하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그 이유는 그 의도가 오래 묵은 의도라서 그렇습니다.
의도는 그 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판단이 중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의식적으로 하는 자동적 사고나 감정도 내막을 들여다보면
분명한 의식과 의도가 작동하고 있으며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지능이 떨어지기 때문이며
지능이 낮으면 전부 무의식입니다.
예컨대 죽음이 무섭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그런 말은 죽어본 사람이나 할 수 있지요.
죽어본 적 없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을 말할 수 있을까요?
결국 살고자 하는 의도가 작동한 것이며 지능이 있는 사람은 자기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을 할 때도 자기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자기가 모릅니다.
그러나 컨셉이 있어요.
의도가 있다는 거지요.
즉 인간이 말을 쏼라쏼라 잘 하는 이유는 그 단어를 과거에 조립해 놓았기 때문이지요.
생각도 마찬가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게 아니고 과거에 해둔 생각을 불러다 쓰는 것입니다.
뇌구조로 보면 전부 의식적으로 진행됩니다.
자기 입에서 어떤 단어가 나올지 모른다고 해서 무의식적으로 말하는게 아니고
의식이 감시하고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말을 하면 잠꼬대겠지요.
잠꼬대도 꿈에서는 의식합니다.
결론은 정신 의식 의도 생각 감정을 하나의 맥락에서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잘못된 결론이 나올 수 밖에요.
의도와 생각을 구분하지 말고
정신 안의 의식, 의식 안의 의도, 의도 안의 생각, 생각 안의 감정으로 봐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의 정신 의식 의도는 한번 세팅해놓고 재활용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문에 정신 의식 의도를 거치지 안고 생각이나 감정이 그냥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옛날에 다 설정해 놓았습니다.
고소공포증 같은 물리적 충격도
의도를 바꾸면 고칠 수 있습니다.
그 의도가 옛날에 설정된 것이라 관습으로 굳어져서 어려울 뿐입니다.
정신차려 하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이유는
한번 설정해 놓은 정신을 재활용하다가 오판하므로
다시 환경을 점검하고 정신차리라는 말이지요.
우일신 하라는 말은 정신 의식 의도를 재활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는 쥐를 무서워해 .. 나는 뭐를 싫어해... 다 의도가 있습니다.
자기는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원래 그런게 아니고 그렇게 의도를 설정해 놓은 것이며
그걸 바꿔조야 합니다.
의도는 개별적으로 쥐 바퀴벌레 뱀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방향설정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래한글이나 익스프롤러 자기에게 맞게 설정하듯이 설정하기 때문에
그 설정을 바꾸면 세상에 무서운건 없어지는 거죠.
정리하면 새로운 생각이나 감정은 의식적으로
재활용 생각이나 감정은 무의식적으로 진행되지만
재활용 생각도 옛날에 의도를 설정해놓고 의식이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의식과 의도의 바운더리를 벗어나지 않으며 현명한 사람들은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말실수를 하는 이유는 옛날에 했던 기억을 불러쓰기 때문인데
예컨대 저는 길을 묻는 사람에게 무심코 엉뚱한 길을 가르쳐준 적이 있는데
여기서 무심코.. 이게 무의식이죠.. 정신차리지 않고 긴장하지 않고
딴생각해서 그런 겁니다.
긴장 타면 무심코 실수 안합니다.
군대서 피티체조 할때 무심코 끝번호 대다가 혼나지요.
유격 받으면 어떤 병사도 무심코.. 안 합니다.
유능한 유격조교는 모든 병사의 무의식을 의식으로 바꿔줍니다.
난폭운전 하는 사람은 항상 난폭운전 하고
안전운전 하는 사람은 항상 안전운전 하는데
난폭운전을 할 때마다 난 난폭운전을 할거야 캬캬캬 하고
의식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뇌에서는 다 점검을 하기 때문에
항상 난폭운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안전운전으로 바꾸면
가슴에 찡하고 자극이 옵니다.
그 순간에 압니다.
"무의식을 의식으로".. 모든 교육이나 학문, 학습이 지향하는 방향인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깨달음 지능'이 필요하겠네요.
배움의 즐거움이, 깨달음의 기쁨이니..
이곳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10년 안으로 사람들은 구조론에 기초한 심리학을 보게 될 것이오.
내 생애 이런 노다지를 만날 줄이야.
역시, 구조론을 처음 본 순간 내 마음 속의 외침 "심봤다!"는 틀리지 않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