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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2597 vote 1 2010.10.24 (21:31:25)

 

 

  공감 혹은 리액션

 

  의도는 구조 안에서 자기 포지션을 읽는 것이다. 의도에서 중요한 것은 일관성이다. 마음의 작동원리 중 큰 부분은 상부구조를 한번 설정해놓고 반복해서 이를 하부구조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매번 새롭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큰 줄거리를 판단해놓고 이를 반복하여 써먹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 때문에 인간은 판단에 드는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고, 공동체 안에서 동료와 쉽게 협력할 수 있다.

 

  만약 상황이 발생할 때 마다 매번 새롭게 판단하고 결정한다면 그만큼 일관성을 잃게 되고, 변덕을 부리게 되며, 동료의 의도를 알 수 없게 되고, 따라서 협력생활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 지점에서 공동체는 파괴되고 마는 것이다.

 

  마음이 작동하는 이러한 원리 때문에 습관과 타성과 편견과 차별과 고정관념이 생겨난다. 이는 옳지 못한 것이지만 동료에게는 신뢰를 주는 행동이 된다. 그 때문에 집단의 결속을 유지하려는 목적에 의해서 편견과 고정관념와 타성과 차별은 더욱 심해진다. 그 때문에 공동체의 진보는 오히려 방해받게 된다.

 

  의도에는 일정한 방향성이 있다. 이로 인하여 더 효율적인 판단을 하게 되며 공동체 안에서 신뢰를 얻게 된다. 이 때문에 되도록 새로운 판단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생기게 되는 것이 진부한 타성에 젖은 것이다. 이는 우경화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점점 보수화 된다.

 

  차별과 편견, 고정관념, 습관, 타성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분명히 하여 공동체 안에서 포지션을 분명하게 드러내게 되고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굳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의 원리를 알고 자신의 잘못된 의도에 따른 퇴행적 일관성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감은 명백히 의도가 개입해 있기 때문에 역시 포지션 구조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성들의 공감능력이나 어린이의 공감능력, 시인들의 표현능력은 이와 다른 점이 있지만 본질은 같다. 그들은 타인의 말에 잘 공감할 뿐 아니라 리액션도 상당히 뛰어나다.

 

  동물을 죽이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도 부엌에서 생선을 토막내어 요리하는 데는 추호의 주저함이 없다. 문제는 이 두 가지 행동이 모순된다는 점이다. 동물을 죽이지 않으려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안전한 후방에 위치시키려는 의도가 개입한 것이다.

 

  극장에서 학대받는 주인공 소녀를 위해 눈물짓던 귀부인이 극장문을 나오기가 무섭게 하녀가 추위를 방지하기 위해 마차에 실려있는 자신의 장갑을 잠시 끼고 있었다는 이유로 사납게 매질하는 이율배반과, 표리부동은 흔히 있는 일이다. 명백히 의도가 작동한 것이다.

 

  거미를 무서워 하여 뒷걸음질 치다가 잔인하게 밟아죽이는 행동도 그러하다. 공동체 안에서 자기 캐릭터를 ‘거미를 무서워 하는 약자’로 설정 하였다가 상황이 바뀌면 언제 그랬느냐는듯이 태도를 바꾼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모순된 행동에도 일관성이 있다. 일관되게 거미를 무서워하고 일관되게 벌레를 잔인하게밟아죽인다. 각기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동물보호 운동에 진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잔인하게 동물을 학대하여 키워지는 푸아그라를 탐식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일관되게 동물보호운동을 하고 한편으로는 일관되게 끔찍한 동물학대 방조행위를 자행하는 것이다. 모피코트를 입고 동물보호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어리광도 원리는 같다.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이 상대방을 갑으로 설정하고 자신을 을로 설정하여, 당연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 하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주문하고, 자신은 거기에 편승하여 쉽게 따라가려는 태도가 있다. 집단 안에서 자기 캐릭터를 그렇게 가져가는 것이다. 어린이가 잘 삐치는 것도 이와 같다. 성인들의 우울증도 본질에서는 이와 닿아있다. 중요한건 여기에 의도가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린이가 허허벌판에서 혼자 뛰어놀다가 발을 다쳤다면 어떨까? 당연히 큰 소리로 울어제치려고 하다가, 문득 사방을 둘러보고 혼자 고립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울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서 어른처럼 씩씩하게 집으로 돌아간다. 울지 않는다. 그러나 대문앞에서 어머니를 보는 순간 울음이 터지고 만다. 서러워 죽는다. 아주 대성통곡을 한다. 세상에 그렇게도 서러울 수가 없다. 어머니가 야속하기만 하다. 그러나 일찍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면 어떨까? 부모가 없다면? 끝내 울 수 없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거나 자기 감정을 전달하거나 본질은 같다. 거기에 공동체 안에서 캐릭터를 구축하여 역할을 얻고 신뢰를 얻으려는 분명한 의도가 숨어 있다. 자신이 어떤 타입의 사람인지 분명하게 알려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쉽게 다가오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관성을 지키는 것이다.

 

  사회적인 약자들이 특히 어리광 전략으로 타인에게 의존하려고 한다. 어른들의 세계에도 어리광이 있다. 노예주와 노예의 관계에서 흔히 관찰된다. 노예는 주인이 자신의 도움 없이는 밥도 못 먹고 굶어죽을 것으로 여긴다. 노예끼리 경쟁 들어간다. ‘우리 주인 나리는 혼자서는 신발도 못 신지. 내가 구두주걱으로 도와줘야 해.’ ‘흥 겨우 그 정도냐. 우리 주인님은 혼자서는 화장실도 못가. 내가 밑을 닦아드려야 해. 이건 뭐 아주 등신이라니까.’ 그들은 서로 경쟁하여 자기가 섬긴느 주인이 무능하다고 주장하며 뿌듯해 한다. 주인의 무능에 방점을 찍으면 안 된다. 본질은 무능한 주인을 잘 포장해서 그럴듯한 상품으로 만들어낸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노예주 역시 노예는 자신의 도움 없이는 하인이 차표 한 장도 못 끊을 것으로 믿는다. ‘내 몸종은 말이야. 정말 형편없어. 구구셈도 못한다니까!’ ‘흥 겨우 그정도냐. 내 하인놈은 하나 둘 셋도 세지 못해. 아주 등신이지.’ 이러구 경쟁한다. 이런 정경 하에서 노예와 주인 간에 상호의존을 바탕으로 한 굳은 신뢰가 형성된다. 서로 무언의 약속을 정하고 그 금을 넘어가지 않는다. 그 점에서 일관된다.

 

  노예주는 자신이 직접 요리할 수도 있지만 행여나 노예가 삐칠까봐 일부러 요리를 안 배운다. 만약 노예의 역할을 빼앗으면 의기소침해진 노예가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고 우울증에 걸려 태업을 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노예주는 본능적으로 노예의 처지를 공감하고, 노예를 매우 학대하는 방법으로 노예에게 역할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심해지면 어떻게든 학대를 당할 요량으로 공연히 주인 앞에서 얼쩡거리며 방해하여 매를 버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된다. 노예와 주인 사이에 역할구분 한계선이 어디인지 명확하게 확인하여 두려는 의도이다. 주제넘은 짓을 벌여서 매를 맞는 방법으로 나의 주제는 여기까지야 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병영에서도 비슷한 일은 벌어진다. 줄빳다가 횡행하던 시절 빳다를 맞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을 자지 못하게 된다. 이 정도면 중독이다.  

 

  노예주는 하인의 부재시에 대비하기 위하여 직접 요리를 배우려고 시도를 해도 갑자기 짜증이 몰려오고 거부감이 들어 결국 배울 수 없게 된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지만 여기에도 명백히 의도가 들어가 있다. 요리를 배우는 순간 앞으로 모든 요리를 자신이 해야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작동한다. 갑자기 몸살이 나고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며 만사 귀찮아져서 ‘내가 왜 이런 일 까지 해야하지?’자문하며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역시 중독이다.

 

  일 잘 배우기로 소문난 박부장도 그렇다. 다른건 귀신같이 다 잘하는데 자기집 장롱 서랍에서 양말 찾는 일만은 죽어도 못한다. 부인이 매일 ‘양말은 여기에 있수!’ 하고 가르쳐줘도 그걸 못 배운다. 그걸 배우는 순간 양말 뿐 아니라 넥타이도 자신이 골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안 배우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자신의 의도를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양말찾기 같은 1초만에 배울 수 있는 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실된 태도로 거부하는 이유는, 설사 배워놓았다 해도 곧 까먹는 이유는, 그거 배우면 장차 집안청소도 자신이 해야할것 같은 예감 때문이며, 다 알고 안 배우려는 것이다. 분명히 의도적이지만 본인은 깨닫지 못한다. ‘왜 난 양말을 못 찾는지 모르겠어’ 하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물론 부인과 사별하고 난 다음에는 양말이 있는 장소를 귀신처럼 잘 기억하게 된다.

 

  이런 식의 역할중독에 빠지면 그야말로 속보이는 짓을 하게 된다. 속보인다는 말은 ‘의도가 보인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그의 의도를 간파할 정도로 속보이는 행동을 하고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자신의 속을 모른다. 추운 날씨에도 몸에 착 달라붙는 티셔츠 하나로 버티는 근육질 마초남자나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의 의도는 뻔한 것이다. 물론 본인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그 옷이 자신에게 잘 어울려서 입은 것 뿐이라고 강변한다.

 

  역할중독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영리한 노예는 자기 힘으로 차표를 끊을 수 있지만, 구구셈도 할 수 있지만 똑똑한 노예로 몰려 해고될까바 바보인척 한다. 그러다가 실제로 바보가 된다. 분명히 뇌가 퇴행한다. 멀쩡한 사람도 노예가 되면 지능이 떨어진다. 어리광은 상대방에게 큰 역할을 주려고 한다. 상대방이 주도권을 쥐고 사태를 풀어가기를 바라며 자신은 거기에 종속되려고 한다.

 

  부부간에 흔하다. ‘우리 부장님은 혼자서는 라면도 못 끓여. 나 없으면 굶어죽고 말거야’(어리광쟁이들은 남편을 ~님이라고 부른다.)하고 남편을 비난하지만 자세히 속을 들여다보면 자기 역할을 긍정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남편을 세뇌시켜 라면도 못 끓이게 만든다. 자기 없으면 굶어죽을 수 밖에 없도록 집안일에 무능한 존재로 만든다. 그게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긴다. 물론 자신의 그러한 의도를 본인도 모르기 때문에 진짜로 남편은 라면끓이기에 무능하다고 여긴다. 그 남편 친구와 등산가서는 라면만 잘 끓인다.

 

  놀부는 흥부를 보기만 해도 공연히 심술이 난다. 이 역시 일종의 어리광이다. 가족이니까 상대방이 당연히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고 믿고 함부로 행동한다. 흥부 품 속에 총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은 전혀 생각 못한다. 터무니없는 신뢰는 심각한 어리광이다. 가족도 타인이라는 사시을 인정해야 한다.

 

  범죄자의 심리도 그러하다. 처음 한번은 동료들에게 휩쓸려 무심코 범죄를 저지르지만 다음부터는 자신을 범죄자로 규정하고 범죄자의 캐릭터를 완성하며 그 방향으로 일관성을 얻으려는 의도를 나타내게 된다.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것보다 범죄자로서의 일관성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왠지 그래야 할 것처럼 여겨진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지만 여기에도 의도가 개입해 있다. 집단 안에서 캐릭터를 완성하여 신뢰를 형성함으로써 의사소통을 쉽게 하려는 것이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평범한 일반인으로 살아가려 하면 뭔가 어색해지고 불안정해진다. 자신의 숨은 의도를 간파해야 범죄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춘기의 청소년이 반항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 방향으로 캐릭터를 완성해야 동아리 안에서 일관된 신호를 보낼 수 있다. 그들은 목숨을 던질 인생의 목표를 구하려 하며 인생의 동기를 얻으려는 의도에서이다. 그 상황에서 히틀러 같은 자가 나타나서 ‘뭐하나? 조국이 자네를 부르고 있다네!’ 하고 선동하면 금방 넘어가서 총알 맞고 시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요즘은 평화가 길어져서 사람들이 전쟁스트레스를 겪어보지 않았으므로 이런 심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영화 ‘갈리폴리’에 잘 나타나 있듯이 멀쩡한 사람도 전쟁스트레스를 겪으면 전쟁터에 뛰어들어 죽기 위해서 안달하게 된다. 미쳐 날뛰게 된다. 전쟁의 광기다.

 

  사기꾼들에게 너무 쉽게 속는 사람이 있다. 탈북자들 중에 사기 한 번 안 당해본 사람 없다는 말이 나돌았던 적이 있다. 사회관계는 시스템에 의해 작동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한국사람 중에는 개인적으로 남의 빚보증을 선다든가 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이건 범죄적이다. 멀쩡한 사람도 누군가 자신의 보증을 서주면 어리광이 나타나고 태만해져서 부도낼 확률이 올라간다. 남의 보증을 서주는 것은 자신을 죽이고, 남도 죽이는 이중살상 행위가 되므로 선진국에는 이런 바보짓이 오래전에 없어졌다. 어리광이란 남들이 자신을 보증서 준다고 믿고 함부로 행동하는 거다. 공감도 포지션 원리에 따른 의도가 작동한다는 점에서 본질은 어리광과 같다.

 

  못된 아버지가 자식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일종의 어리광이다. 어리광은 자신의 포지션을 상대방에게 종속시킴으로써 중요한 가치판단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려는 태도이다. 그 절정판은 종교다. ‘나는 노예니까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거다. 이건 저항보다 순종이 유리하다는 어린이의 생존전략인데 어른이 어린이처럼 행동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다.

 

  한국계 미국인이 미국에서 총격사건을 일으켰을 때 한국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사죄해야 한다는둥, 한국이 사죄사절을 미국에 파견해야 한다는둥 하며 스스로 쫄아서 빌빌댄 수구꼴통 아저씨들이 대표적이다. 노예는 똑똑하면 안 되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바보로 만든다. 이런 현상은 물리적 단계로 나아가 실제로 뇌세포가 파괴되어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 어린 시절 학대를 당한 사람이 지능이 떨어지는게 대표적이다.

 

  반대만 하는 무개념 좌파들도 이 경우로 볼 수 있는데 지능이 떨어져서 바보가 된 예다. 만년야당이 체질이 되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야당 포지션에 딱 가서 상대방이 큰 역할을 하도록 주문하는 것이다. 이 경우 야당이 여당을 맹비판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여당의 역할을 크게 만들어서 보이지 않게 여당을 돕는다. 국민은 어린이고 여당과 대통령은 아버지인데, 왜 아버지인 여당과 대통령이 아버지 역할을 하지 않느냐고 따져서 국민과 자신을 바보로 만든다.

 

  독재국가에서 이런 점이 극대화 되는데 국민 전체가 어린이로 퇴행하여 급기야는 독재자 얼굴만 봐도 눈물이 줄줄 흐르는 단계까지 가는데, 그 결정판은 스무살 애송이 김정은 얼굴보고 눈물 흘리는 북한 주민들이다. 어리광 중독이 심해져서 뇌세포가 파괴되는 단계까지 진행한 것이다. 이 또한 본질은 의도있는 약자의 생존전략이다. 집단 안에서 역할을 얻으려는 의도가 있다.

 

  자신을 피해자로 설정하고 상대방을 가해자로 설정하는 것이다. 심해지면 피해망상으로 발전한다. 대통령을 제왕으로 여기고 왜 모든 문제를 단칼에 해결해주지 않느냐며 화내는 무뇌좌파들이 그러하다. 어리광이 심해진 나머지 퇴행하여 무뇌단계로 진행한 것이다. 이들은 대통령을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진 황제로 여기고 의존하다가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야속해 하며 배신감을 느끼고 치를 떤다. 결국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 하고 리플을 다는 응석단계로 진행하게 되는데 이것이 피해망상이다. 이 정도까지 진행되었다면 호르몬 작용으로 뇌세포가 상당히 파괴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대부분이 도둑과 강도들은 이런 류의 피해망상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사회의 피해자이므로 남의 것을 슬쩍 해도 괜찮다는 식이다. 그들은 가치판단의 수고로움에서 해방되어 그 자유를 만끽한다. 사회의 도덕률과 자신의 행동을 비교하여 판단할 필요가 없어진 데서 쾌감을 느끼며 거기에 중독된 것이다. 자신은 무슨 비리를 저질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졸부들이나 성공한 CEO들, 기득권층의 정서가 그러하다. 그들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실제로도 사회에 기여하고 있으므로 사회는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야 하고, 그 때문에 자기네의 사소한 불법과 비리는 국가에 기여한 공을 참작하여 추궁되지 말아야 한다는 오만에 빠지게 된다. 이건희, 정몽구 등이 곧잘 불법에 빠져드는 것이 그러한 심리 때문이다.   

 

  역할중독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굳이 브레히트의 서사극이론을 들먹거릴 필요없이 TV나 영화를 보면서 극에 몰입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공감하지 않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래 감독 너 한번 웃겨봐’ 하는 태도가 되어야 한다. 팔짱을 끼고 방관하며 ‘어쩌는지 보자’는 식이어야 한다. 몰입하면 중독되고 중독되면 퇴행한다. 감정이라곤 없는 돌부처나 냉혈한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의식이 의도를 자유자재로 통제하는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이 월드컵 사강에 진출해도 ‘짜식들 놀고있네’ 하는 표정으로 냉소하는 먹물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대중이 눈물 흘릴 때는 함께 눈물 흘리고 대중이 기뻐할 때는 함께 기뻐하면서도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말고 자기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어야 한다.

 

  삐친다거나 하는 것도 일종의 어리광이다. 상대방의 역할을 크게 하는 것이다. ‘나는 등 돌리고 있을테니 니가 알아서 내 문제를 해결해줘’ 하는 식이다. 우울증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물론 우울증은 상당부분 호르몬 작용에 따른 것이므로 의식으로 의도를 통제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그 호르몬 작용도 근본적으로는 의도에 따른 것은 분명하다. 자신과 세상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방법으로 상당부분 우울증을 다스릴 수 있다. 공연히 우울하다면 세상을 갑으로 자신을 을로 설정한 것이다. 높은 산 정상에 올라 구름 위로 일출을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기르면 우울증세도 상당히 극복된다.

 

  집단적으로 삐쳐버리는 수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 때 수구세력의 탄핵소동이 그 예다. 지금 북한의 입장도 국제사회 앞에서 집단적 삐침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자신을 약자로 규정하며 약자인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내부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고 강자인 미국이 북한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씩의 떼쓰기다. 미국과 대결하는 척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어린이의 떼쓰기에 불과하다. 대결은 위장된 태도이고 실제로는 미국의 주의를 끌어 자신의 몸값을 올리려는 것이다. 여자아이의 고무줄 놀이를 방해하는 일곱 살 꼬마나, 오줌을 싸서 보모의 주의를 끌려는 시설에 수용된 어린이나 다를바 없다.

 

  어리광은 포지션 구조 안에서 의도가 부정적으로 나타난 예고 긍정적으로 보면 공감이다. 어린이나 여성이나 시인들이 잘 공감한다. 의도적으로 어린이의 마음을 설정한 강호동처럼 리액션도 잘 한다. 어리광을 부리는 포지션과 공감하는 포지션이 일치한다. 어린이의 마음을 얻어서 세상을 향해 어리광을 부려야 좋은 시가 나온다. 여성의 공감능력을 말하면 여성차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집단 안에서의 생존전략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마초남자들의 폭력근성도 일종의 어리광이다. 단지 표현방식이 다를 뿐이다. 어리광은 어린이가 어린척 하는 것인데 어른이 된 마초가장이 강한척 하는 것도 집단 안에서 포지션을 설정하기 위한 태도이므로 본질은 어리광과 같다.

 

  어리광은 ‘~답게주의’로 발전한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충담사의 안민가)로 발전하면 최악이다. 남자는 남자답게, 학생은 학생답게, 여자는 여자답게로 치달으면 그 나라는 희망이 없다.

 

  한국여성들의 화장이 진해진 것도 이와 같은 법칙이 작동한 것인데 남자가 마초로 치닫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는 된장녀로 치달아서 ‘쥐도 무섭고 벌레도 무섭고 뱀도 무섭고 다 무서운’ 여자로 자신을 설정하는 것이며, 양말도 못찾는 박부장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무능한 존재로 만들어 상대방의 역할을 크게 함으로써 사회관계를 긴밀하게 하여 서로 의존적인 부부를 이루려는 타산이 작동한 것이다. 드라마에서 흔히 묘사하듯이 역할을 나눌 때 관계가 긴밀해진다. 한국의 한류드라마와 브라질의 텔레노벨라가 만나는 지점이 거기다. 둘다 폭력적 마초남자와 공주병 된장녀로 역할을 나누어서 바보를 유도하고 무뇌를 창출하는 방법으로 인간을 퇴행시켜 시청률을 흡인하고 있다. 김수현이 그 분야의 달인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똑똑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건을 만들려면 작가의 아이큐가 높아야 하기 때문에 멍청이들 사이에서 에피소드를 끌어내는 전략으로 가는 것이다.

 

  박부장이 자기 힘으로 양말을 찾아내는 순간 넥타이도 자신이 골라야 하고, 더 나아가서 밥도 손수 차려먹어야 하고, 애들 학업도 신경써야 하고, 부인을 할 일이 없어져서 취업을 할 것이고, 결국 맞벌이 가정이 되면, 경제력이 생긴 부인이 바람을 피우게 되고, 결국 이혼하게 되고, 따라서 가정은 파탄이 나고, 자녀는 비뚤어지고, 그러다가 늘그막에 홀로되어 비참하게 될거라는 계산들어간 것이다. 분명히 의도가 작동한 것이다. 이런 계산은 일초만에 된다. 직관이다. 직관이 무의식 중에 성립한다고 믿으면 무개념이다. 직관에 의도가 작동하고 있으며 훈련하면 파악할 수 있다. 속 보인다. 속이 보이는게 의도가 간파된 거다. 남의 의도는 잘 간파하는데 정작 본인의 의도를 모른다면 곤란하다.

 

  사람의 성격이 내향형 혹은 외향형으로 되는 것도 의식의 지향성, 곧 의도가 개입한 것이다. 필자처럼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다, 타고난 음치에 박치이고, 거기다 발음도 좋지 않다면 내향형 전략으로 가는 것이 편하다. 외향형 전략은 여러 문제에 부딪혀 반드시 실패하게 되며, 계속 실패하기 때문에 내향형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감성이 예민한 사람은 실패한 기억이 계속 상기되어 행동을 위축시키므로 실패할 확률을 줄이기 위하여 소극적 모드로 설정한 것이 내향형 성격이다. 필자도 자신있는 분야에는 갑자기 수다쟁이 모드로 변신한다. 기분 날 때는 몇 시간도 떠벌일 수 있다. 그러다가 여러 분야에서 실패한다는게 문제다. 성격은 자신의 행동에 어떤 일관성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캐릭터를 드러내어 포지션을 얻는 방법으로 사회관계를 긴밀히 하려는 명백한 의도가 작동한 것이다. 그러므로 의도를 바꾸는 방법으로 성격을 고칠 수도 있다.

 

  다 계산된다. 계산은 직관에 따라 일초만에 가능하다. 문제는 정작 본인이 자신이 그런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데 있다. 계산이라고 했지만 포지션을 읽는 직관이며 눈치로 아는 것이다. 공감도 직관이고‘ 리액션도 직관이고’ 눈치도 직관이고‘ 이심전심도 직관이고’ 어리광도 직관이고‘ 마초짓이나 된장녀짓도 직관이고’ 집단 히스테리도 직관이고‘ 군중의 광기도 직관이다. 편견도 직관이고, 타성도 직관이고, 습관도 직관이고, 차별근성도 직관이고, 고정관념도 직관이고, 성격도 직관이고, 귀족의 오만도 직관이고, 스타일도 직관이다. 한번 방향을 그렇게 정하면 일제히 그 방향으로 가며 도무지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 그러므로 깨달아야 한다. 필요한 때 방향전환에 성공해야 한다. 그러한 방향전환을 할 수 있는 것이 의식이고 그 의식을 작동시키는 것이 정신이다. 방향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정신을 못 차리기 때문이다. 외부충격에 의해 타격을 받으면 비로소 정신을 차려서 방향을 바꾼다. 개화를 거부하며 쇄국을 추구하던 일본이 동경만에 떨어진 흑선의 대포 한 방에 정신을 차리고 방향을 바꾸어 명치유신을 끌어낸 예가 대표적이다. 인간은 외부에서의 물리적 충격이 아니면 내부에서는 결코 방향을 바꾸지 못하며, 외부충격 없이도 방향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이 깨달음이다.  

 

  예술가는 예술가 티를 내려고 하고, 목사는 항상 웃고다녀서 눈가에 잔주름이셋이나 생기고, 직업군인은 집에서 가족들 모아놓고도 군인들 식으로 기합주려고 하고, 좌파 지식인은 무조건 삐딱하게 반대만 하는 것이 그러하다. 다 의도가 있는 것이다. 일관된 행동을 하여 분명한 캐릭터를 구축하는 방법으로 사회관계를 긴밀히 하여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이려는 것이다.

 

  그러한 역할놀이와 어리광을 던져버려야 한다. 특히 연예인이 공인으로서 사회의 모범이 되는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 북한이 그렇다. 김정일이 인민의 모범(?)이 되었기 때문에 북한은 국가전체가 바보가 되었다. 모범이 된다는 것은 거기에 의존해서 정신을 차리지 않고, 의식을 하지 않고, 의도를 까먹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모든 모범과 의존과 어리광을 타파해야 한다.

 

  어리광은 자신의 역할을 좁게 한정하고 ‘난 요것만 할거야’ 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생존전략이지만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부인이 식당을 잘 운영해서 크게 성공한 예를 몇 건 관찰했는데 하나같이 돈잡아먹는 남편, 문제 일으키는 자녀들이 주변에 있었다. 왜 부인이 돈을 잘 벌면 한결같이 남편은 하는 사업마다 족족 망하고 자녀들은 사고를 치는 것일까? 분명히 이유가 있다. 어느 사이에 부인은 버는 역할이고 남편은 까먹는 역할로 세팅되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에도 노예주와 하인 사이에 설정되는 역할극이 개입해 있다.

 

  부인이 남편과 자녀의 타락을 방조하는 것이다. ‘너희가 아무리 사고를 쳐도 내가 다 수습할 수 있어’ 하는 자신감이 충만해 있다. 사고치는 가족의 문제를 본인이 경제능력으로 수습함으로써, 무너진 집안을 혼자 힘으로 일으켜 세워 자신의 위상을 다지려는 의도가 개입해 있다. 물론 반드시 그러한 것이 아니고 한국과 같은 후진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선진국이라면 부부간에도 경제생활을 구분하기 때문에 이런 어리광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80년대만 해도 연예인이 성공하면 꼭 주변에 사기꾼이 나타나서 거덜나게 만든다. 배삼룡, 이기동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TV에 출연해서 ‘친구 좋아하다가 사기당했지. 의리찾다가 피봤어.’ 하며 자신이 피해자인척 하지만 그들을 타락시킨 것이 돈 많은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의리찾다가 사기당하지 않으면 연예인 축에도 들지 못하는 그런 시대가 있었다. 요즘도 퇴물 연예인 중에 케이블 방송에 출연하여 눈물로 호소하며 개과천선을 강조하고, 과거 친구 좋아하다가 사기당하고 친구 좋아하다가 도박에 빠진 경험을 팔아 연명하는 사람이 있다. 의리 찾다가 피봐서 거지됐다가 다시 재기한 연예인 여의도 주변에 한 트럭 있다. 그게 어리광이다. 의리 운운하는 것은 어리광을 변명하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어리광은 부정적 측면이고 공감과 리액션은 긍정적 측면이다. 모두 사회관계 안에서 포지션을 읽는 직관의 능력에 기초하는 것이며, 공동체 내에서 관계를 긴밀히 하여 집단의 결속력을 높이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이것이 방치되면 되도록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을 하지 않고 공동체 내의 포지션 원리가 답을 찾게 하려는 마음의 근무태만으로 발전하게 되어 관습, 습관, 버릇, 마녀사냥, 편견, 타성, 관행, 고정관념, 성격, 개성, 캐릭터 구축 등 다양하게 나타나게 되는데 대략 수구꼴통으로 퇴행하는 현상을 보이게 된다. 나이가 들면 당연히 보수화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우일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식적으로 관계재설정을 해주어야 한다. 자신은 강한 남자다, 약한 여자다, 책임감 있는 가장이다, 힘없는 어린이다, 반항적인 청소년이다, 뒷수습하는 가정주부다, 오만한 CEO다, 콧대높은 예술가다, 이런 일관성을 던져버리고 백지상태에서 다시 태어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런데 구한말 개화기와 같은 물리적 외부충격을 받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정신을 차려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역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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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미지 [레벨:2]김미라

2010.10.24 (23:11:32)


"역할 중독"이라는 말씀이 많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제가 의도를 가지고 세팅해놓은 역할들...

일터에서, 가족내에서, 사회안에서,, 모든 관계속에서..

잠깐 돌아보았는데도, 역할중독의 중증인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해 제 주변에 있는 분들을 다시 바라보게 되네요.

무엇보다 타국에서 이민자들 스스로가 스스로를 소수민족(minority)의 '약자'로 역할을 세팅해놓고,
이곳 주류 캐나다사람들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것 같습니다.
늘 '너희들이 다른 문화에서 온 약한 우리를 이해해라!" 하면서...
우리스스로를 캐나다다 주류사회의 약자와 문화충격의 피해자로 역할을 세팅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이곳 캐나다 동료들을 통해
그들도 저로 부터 상당한 정도의  문화적 충격(다름)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만 이해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이해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방이 아니라 늘 쌍방적인 것이라는 것을...

이러한 일방적이고 의도된 역할세팅은 우리의 약한 소수민족(minority)으로의 우리를 피해자로,
불평자로 행동하고 행동하게 만들어 더욱 이곳 주류사회로의 길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이곳 캐나다에서는 초기에 유럽에서 이주해온 캐나다인들이

원래부터 이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에 대해 '약한자'로서의 역할을 강요하고 세팅했지요

원주민들에게 각종 세금 혜택은 물론, 정외 대학 입학등 각종 혜택을 베풀고 있지만,

정책적으로 원주민들의 자신들의 원주민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물론 지금은 그러한 정책도 사라지고, 일부 원주민들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들을 바보로 이미 만들어 버리고 있는 것이죠.

각종혜택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원주민들의 삶은 캐나다주류사회에

비교할 수 없이 열악할 뿐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많이 피폐한 것이 현실입니다.


'역할 중독에서 벗어나 백지에서 다시 시작' 이라는 말씀...
마음에 새기고 이곳에 있는 분들과도 나누어야 겠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Snapshot_20101024_1.jpg Snapshot_20101024.jpg

*이곳은 일요일 아침입니다. 밴쿠버의 본격적인 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요즘은 겨울에 눈도 조금 더 많이 오고 예전보다 비가 덜 오기는 하지만,
보통 10월 중순부터 2,3월까지 비가 자주 옵니다.
올해는 한국같은 가을날이 많았습니다. 

첨부
[레벨:7]아바미스

2010.10.25 (17:57:01)

와 정말 시원시원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백지상태에서 항상 다시태어나는 연습.
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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