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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4090 vote 0 2010.11.04 (00:23:10)

 

 


 존엄 자유 사랑 성취 행복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으로 펼쳐지는 마음의 작동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을 처리하는 기계적인 메커니즘일 뿐, 실제로 운전자의 계기판에 표시되는 정보는 다르다. 자동차는 연료탱크≫엔진≫트랜스미션≫구동축≫바퀴로 동력이 전달된다. 그러나 운전자에게 전달되는 정보는 유량계≫수온계≫엔진회전계≫속도계≫적산거리계로 나타난다.


  자동차에 기름을 채우면 유량계가 변하고, 시동을 걸면 수온계가 변하고, 기어를 넣어주면 엔진회전계가 변하고, 엑셀레이터를 밟으면 속도계가 변하고, 브레이크를 밟으면 적산거리계가 변한다. 자동차는 다섯가지 방법으로 조작되고, 그에 따라 계기판에 다섯가지 정보가 표시되는 것이다.


  마음도 이와 같다. 마음은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으로 작동하지만 마음의 계기판에는 존엄≫자유≫사랑≫성취≫행복으로 나타난다. 정신의 상태는 존엄으로 표현되고, 의식의 상태는 자유로 표현되고, 의도의 상태는 사랑으로 표현되고, 생각의 상태는 성취로 표현되고, 감정의 상태는 행복으로 표현된다.


  자동차를 달리려면 먼저 기름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정신이 차려졌는지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존엄을 보아야 한다. 자신이 자신을 충분히 존중하고 있는지 봐야 한다. 사회로부터 존중받고 있는지 봐야 한다. 자기존중감의 문제이다. 거의 모든 마음의 문제는 여기서 일어난다.


  최근에 학교에서 체벌이 문제가 되고 있다. 체벌은 패배감을 불러 일으켜 존엄을 파괴한다.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지 않게 된다. 자신을 폭력에 의해 물리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 나약한 존재로 알게 된다. 자신을 깔보게 되는 것이다. 그 경우 세상과의 관계맺기에서 레벨이 다운된다. 수준이하가 된다. 길들여진 개처럼 가장 낮은 단계에서 노예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소년기에 심한 체벌을 당하면 마음이 상한다. 감정이 상하는 것이 아니라 존엄이 상한다. 감정의 상처는 회복할 수 있지만 존엄의 상처는 복구하기 어렵다. 긍지와 자부심을 잃는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몰려 있다고 믿게 된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존엄을 다친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세상앞에서 자신이 갑이 아닌 을이라고 믿게 된다. 남의 눈치를 보고 자기 행동을 결정하는 습관이 생긴다. 자유의 생동감보다 감옥의 안전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유가 리스크로 여겨진다. 자유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속박을 자기 몸에 잘맞는 편한 옷으로 여긴다. 엄격한 법률과 제도에 편안해 하고 즐거운 축제 앞에서는 얼떨떨해 한다.


  존엄이 인격이다. 존엄이 파괴되면 전부 파괴된다. 노예근성에 중독되어 비굴한 행동을 하게 된다. 사건이 일어나면 안전한 숨을 장소부터 찾으려 한다. 어떤 불리한 상황전개도 그것을 역이용하여 자신에게 유리하게 반전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배짱과 호기를 잃어버리고, 상황이 발생하면 무조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믿는다. 피해의식에 빠져 주눅든 상태가 된다. 항상 ‘손해 안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의심하고 소극적인 행동을 한다. 기가 꺾인 것이다. 기가 꺾이면 인생이 꺾인다.


  존엄이 가장 중요하다. 존엄이야 말로 상승의지를 만들어 인간의 마음에 에너지를 주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심리학계에서도 자기존중감을 강조하고 있다지만 어느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기 때문에 자존감을 잃어 모든 병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존중받지 못하면 사소한 일에만 분노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정치나 사회의 큰 문제에는 통 관심이 없고 주변의 좀도둑이나 양아치에게나 신경쓰게 된다. 만약 좀도둑이 얄밉게 느껴지고 상당히 신경이 그슬린다면 자신을 좀도둑 취급하는 것이다. 양아치가 공연히 밉다면 자신을 양아치로 대접하는 것이다. 좀도둑이나 양아치의 소행은 사회에 항상 존재하기 마련인 당연히 있는 리스크로 보고 신경이 가지 않는 것이 맞다. 이건희나 정몽구가 좀도둑이나 양아치 따위에 신경을 쓰겠는가 말이다. 시선을 정상에 두는 것이 자기를 대접하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대접하느냐가 중요하다. 자기 시선의 눈높이를 신의 위치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신의 완전성에게 주의가 가고 양아치 따위는 안중에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서 마음의 에너지가 나오기 때문이다. 수력발전소가 힘을 얻으려면 댐의 수위가 높아야 한다. 낙차가 커야 한다.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는 이상주의 시선과, 발에 채이는 현실주의 삶 사이의 커다란 간극에서 마음의 에너지를 얻는 큰 낙차가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멀리 보는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현실과 맞서 저항하며 마찰을 일으켜야 한다. 그것이 자기 존중이다. 눈앞의 현실에 적응하여 안주하려고 하는 한 현실의 변덕에 끌려다닐 뿐이다. 현실은 늘 변덕스럽다. 여야가 바뀌고, 외교관계가 바뀌고, 유행이 바뀌고, 산업이 바뀌고, 시대정신이 변한다. 그 변화의 흐름에 끌려다니지 말고 말을 다루는 마부처럼 그 변화의 흐름 위에 올라타야 한다. 그 변화를 즐겨야 한다. 이상주의자의 눈높이를 얻어야 그것은 가능하다.


  요즘 많이 활약하는 웹툰 만화가 중에 윤서인 씨가 특히 일본과 한국을 비교하는 만화를 다수 그려서 네티즌들 사이에 시끌시끌 화제가 되고 있다. 문제는 비교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부모가 자식을 비교하여 굴욕감을 주는 것이 자식의 인생을 망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엄마 친구 아들’과 특히 비교가 심하였기로 ‘엄친아’라는 유행어도 생겨났다. 자존감을 해친다는 면에서 비교하여 험담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초보적인 교양이다. 자아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여야 한다.


  왜 비교하는가? 비교하는 이유는 상대방의 행동을 관찰하였다가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것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근거로 삼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이미 존엄이 파괴된 것이다. 갑이 아니라 을이 된 것이다. 마음이 종속되어 버린 것이다. 노예의 마음을 가진 것이다.


  모든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의 근거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다움이어야 한다. 내 안의 어떤 일관성과 항상성으로 자기 정체성을 삼고 그것으로 판단기준을 세워야 한다. 비교한 즉 패배다. 무의식적으로 환경에 조종당하게 된다. 홀리는 것이다. 줏대를 잃어버린 것이다. 누가 그런 줏대없는 사람과 소통하려 하겠는가?


  그 경우 소통의 레벨은 극도로 낮아진다. 상황의 변화를 주도하는 고급정보의 흐름에서 이탈하여 혼자 동떨어진 채로 소외된다. 저급한 정보만 유통되는 저급한 시장에서 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뒷골목의 음담패설 시장과 같다. 그곳에서는 상대방을 경멸하고, 비웃고, 받아치고, 엿먹이고, 까발리고, 조롱하는 테크닉만 유통된다. 수준이하가 되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 소통하면서 영감을 얻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서로의 창의력을 흡수하는 본능의 센서는 고장나 버리고 만다. 상대방이 아이디어를 툭 던져서 운을 띄우면, 거기에 댓구를 달아 자기 아이디어를 더하고, 다시 상대방이 거기에 아이디어를 더하며 눈덩이처럼 판을 점점 키워가는 능력은 잃어버린다. 그 기세의 흐름이 나아가는 방향성을 포착하고 거기에 맞추어 자기 포지션을 설정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박제되고 마는 것이다. 고리타분한 인간이 되어버린다.


  존엄이 없는 자들은 상대방의 포지션을 읽은 다음에야 거기에 맞추어 자기 포지션을 정할 수 있기 때문에, 주로 친구와 자신을 비교하며 굳이 이기려 든다. 심하면 자기 아내와 자신을 비교하여 부부싸움을 벌인다. 더 심한 경우는 자기 자식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식을 이기려 든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증거를 찾아내고 의기양양해 한다. 그 경우 마음의 낙차가 없다. 에너지가 없다. 존엄이 없기 때문이다. 비교대상이 되면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먼저 별들의 위치를 비교하여 북극성을 찾고, 다시 북극성의 위치를 기준으로 별들의 위치를 찾아 시간을 잰다. 북극성은 판단기준이 될 뿐 비교대상이 아니다. 신은 비교될 수 없는 존재이다. 완전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것은 절대성을 가진다. 비교는 상대성의 세계에서 작동할 뿐이다. ‘신 앞에서의 단독자’라는 표현도 있다. 비교될 수 없는 신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존엄(尊嚴)의 존은 높이는 것이고, 엄은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비교될 수 없는 곳은 정상이다. 정상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비교될 수 없다. 정상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정상에서는 더 이상 오르는 길이 없다. 그러나 중턱이라면 여러 코스가 있다. 이 코스와 저 코스가 비교된다. 그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비교되므로 존엄은 실패인 것이다. 존엄은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정상에 오르는 코스는 비교하여 선택할 수 있지만 정상은 선택할 수 없다.


  공주와 왕자가 으스대며 잘난척 하는 것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고 복근이 훌룡해서도 아니다. 뒤에 세력이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존엄한 것은 지능이 높아서도 아니고, 동물보다 신체적 능력이 우월해서도 아니다. 인간은 별로 잘난 것이 없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60억 인류 전체의 지혜를 결집하고 거기에 인격을 부여하여 그것을 하나의 뇌처럼 사용할 수 있는 소통지능 덕분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바깥뇌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60억 인류의 대표자 마음을 얻을 때, 더 나아가 과거와 미래의 인류까지 통합하는 전체인류의 마음을 얻을 때, 인간의 존엄은 신의 완전성에 닿는다. 그럴 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 지점에서 정상에서의 호연지기를 얻는다. 그 마음을 얻어야 마음의 연료탱크에 에너지가 충만해지고 유량계의 바늘이 FULL을 가리킨다. 존엄은 마음에 에너지를 채우는 것이다.


  존엄이 가장 중요하고 다른 것은 존엄에 연동되어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존엄이 크면 그만큼 자유가 넓혀지고, 그만큼 사랑이 긴밀해지고, 더불어 성취가 이루어지고, 진정한 행복을 맛보게 된다. 존엄에 실패하면 곧 비교하게 되고, 친구와 다투게 되고, 가족과 싸우게 되고, 타인을 시기하게 되고, 열패감을 느끼게 되고, 자존감을 잃어 마음의 모든 병리가 한꺼번에 일어난다.


  존엄은 마음의 에너지를 얻는 것이고, 마음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고, 눈높이를 상승시키는 것이고, 세상의 변화와 트렌드를 끌어가는 고급정보가 유통되는 높은 시장으로 소통의 레벨을 끌어올리는 것이고, 마음의 신분을 상승시키는 것이고, 세상 앞에서 당당해지는 것이다. 거기서 비로소 사건은 시작된다. 자유는 존엄으로 얻은 동기를 실현하기 위하여 먼저 자기의 운신할 영역을 넓히는 것이고, 사랑은 그 확보된 영역 안에서 상대와 대결하며 상대적인 자기 포지션을 정하는 것이고, 성취는 마침내 실천하여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며, 행복은 거기에 따라오는 최종적인 결과다.


  인간은 행복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행복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운행하면 적산거리계에 이동한 거리가 표시된다. 인간이 자동차를 운용하는 목적은 그 표시된 거리 만큼의 이동을 얻으려는 것이다. 적산거리계를 조작하여 계기판의 숫자를 올려놓는다고 해서 이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연료탱크에 기름부터 가득 채워야 한다. 그 다음에 엔진에 시동을 걸어야 한다.


  존엄을 얻으면 신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 된다. 행복은 이미 초월해 있는 것이다. 행복하려 하는 이유는 불행하기 때문이다. 행복하려 하면 이미 실패다. 진정으로 행복한 이는 행복에 관심이 없다. 불행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존엄의 반대는 비참이다. 인간이 살지 못하는 이유는 불행 때문이 아니라 비참 때문이다. 범죄를 저지르고 속임수를 쓰면 일시적으로 쾌감을 얻을 수는 있다. 마약에 의존할 수도 있고, 술과 담배에 중독되는 수도 있다. 인간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비참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얻은 행복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구원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자유에도 없고, 사랑에도 없고, 성취에도 없고, 행복에도 없고, 오직 존엄에 구원이 있다. 존엄 안에 자유도, 사랑도, 성취도, 행복도 풀세트로 갖추어져 있다. 존엄을 얻으면 전부 얻는 것이다.


  공주와 왕자가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뒤에 있는 세력을 믿기 때문이지 결코 자기 한 몸뚱이가 잘나서가 아니다. 60억 인류 대표자의 마음을 얻을 때, 역사가 진보하는 흐름에 올라타고 역사의 울부짖음과 함께 공명할 때, 신의 마음을 얻을 때, 자연의 완전성과 자유자재로 소통할 수 있을 때, 자연이 내 안 깊숙이 침투하여 들어와 나와 함께 흐른다는 느낌을 얻을 때, 타인과 즐겨 소통하며 영감을 얻고 창의력을 얻는 본능의 센서가 작동할 때, 세상의 진보를 이끌어가는 고급정보가 유통되는 시장에 자신을 올려태울 때 인간은 존엄해진다. 비참을 극복하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 세력을 거느린 왕자처럼 당당해진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사는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똑똑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내 영역은 분명해지고 내 포지션은 명확해진다. 언제라도 세상을 움직여 가는 존재의 근원과 소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http://gujoron.com




[레벨:3]금란초

2010.11.04 (08:16:04)

글좋다
상쾌한 아침 좋은 글을 읽으니  에너지가 솟는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5]id: 땡건땡건

2010.11.04 (12:44:40)

많이 깨닫고 갑니다. 가슴에 담아야 할 좋은 글이네요.^^

[레벨:2]주유천하

2010.11.04 (13:28:39)

존엄란 분이
존엄의 언어로 궁극의 경계를 터치해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매순간 성성히 깨어있는 인간으로 아주 조금씩 되어가고 철이 좀 더 들어갑니다. ㅉㅉ

프로필 이미지 [레벨:6]지여

2010.11.04 (13:54:02)

정신 의식 의도 생각 감정 - 다섯단계 입체설명 듣기 전..... .. 마음 이라는 한 단어로 이해하던 시절 

이론이 아닌  경험으로  알게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마음활동을  네가지로 새겨두었더랬소 
1. 두려움 (fear)   2.  부러움(envy)  3. (사랑이 이닌) 동정(pity)  4. 비교(compare)
이 네가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 그게  나의 전부라고 할만치 - 관심= 개인철학=생활  그 자체이었는데 

입체적으로 체계를 잡아 주어  고맙소 

 마음(소프트=목적)) 이 아닌   세속적  물질적 우리 주변(하드=수단) 을 으 보면

자유와 돈(선택의 폭)       사랑과  아름다움(미모)          성취와 지위권력              행복과 건강

쯤 돠려나 ?

존엄은 차원이 다른 이를 다 아우르는 상위존재이니 수단 대칭 이 불가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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