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의 눈 세상을 구조로 보는 시선을 획득하기 바란다. 사과에 문제가 있으면 사과밭을 봐야 한다. 사람에게 문제가 있으면 사회를 봐야 한다. 어떤 것의 문제는 어떤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어떤 대상이며 그 대상은 관측자의 시선과 대칭된 것이다. 대칭이 중요하다. 대칭이면 둘이다. 둘이면 상대성이 성립한다. 상대성이란 판단기준이 둘이라는 것이다. 부모가 잘 가르쳤는데도 자식이 엇나간다. 감독이 잘했는데도 선수가 엇나간다. 투수가 잘 던졌는데도 타자가 홈런을 친다. 남편이 잘했는데도 아내가 바람을 피운다. 기준이 둘이면 사건이 둘이라 이렇게 된다. 기준이 하나여야 한다. 광원과 피사체와 그림자의 관계다. 광원은 보존된다. 변하지 않는다.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피사체와 그림자의 상대적인 위치는 광원의 움직임에 의해 다시 절대성으로 돌아간다. 전부 한 줄에 꿰어진다. 이 경우는 계가 통제된다. 마이너스 통제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추가되지 않는 것이다. 에너지는 광원에 의해 보존된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면 부모의 에너지와 자식의 에너지가 있다. 에너지원이 둘이다. 투수와 타자의 관계라고 치자. 투수의 에너지와 타자의 에너지가 있다. 감독의 에너지와 선수의 에너지가 있다. 에너지원이 둘이면 사건이 둘이고 상대성이 성립하고 결과는 통제되지 않는다. 에너지원이 하나여야 한다. 관측자와 관측대상의 관계는 에너지원이 둘이다. 관측자를 배제하고 사건의 닫힌계 안에서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찾아야 한다. 객관화하기다. 자기소개형 말투의 문제는 기준이 둘이고 사건이 둘이라는데 있다. 나는 짜장면이 싫어. 짜장면의 문제일 수도 있고 당신의 기분 탓일 수도 있다. 기준이 둘이면 안 된다. 닫힌계를 찾으면 사건 안에서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포착할 수 있다. 그래야 기준이 하나가 되어 객관이 성립한다. 객관이 되려면 일단 셋이어야 한다. 둘은 상대적이고 셋이라야 객관적이다. 배를 알려면 바다를 봐야 하고 비행기를 알려면 하늘을 봐야 한다. 선수를 보려면 구단을 봐야 한다. 그 경우는 상대성이 아닌 절대성으로 돌아오게 된다. 항상 한 단계 위를 봐야 한다. 감독과 선수의 관계는 상대적이지만 구단과 감독과 선수의 3자관계는 상대적이지 않다. 이 경우는 광원과 피사체와 그림자의 절대적인 관계다. 내부의 돌아가는 메커니즘이 찾아진다. 여당과 야당의 관계는 상대적이지만 국민이 있다. 여야의 관계는 상대적이다. 야당이 잘하면 여당이 잘못한 셈으로 된다. 상대의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국민이 개입하면 다르다. 국민은 여야를 동시에 통제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에너지원이 하나다. 박빠와 황교안의 관계는 상대적이지만 중도파가 가세하면 다르다. 중도파의 눈은 절대적이다. 부모와 자식 중에 누가 잘못했을까? 상대적이다. 그러나 사회가 개입하면 다르다. 무조건 부모 잘못이다. 강자와 약자 중에 누가 잘못했을까? 상대적이다. 에너지원이 둘이기 때문이다. 천만에. 국민이 개입하면 다르다. 강자의 잘못이다. 3자가 개입하면 닫힌계가 찾아지고 에너지원은 하나가 된다. 정답이 확인된다. 40살 남자가 15세 여학생에게 성범죄를 저질렀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채팅앱으로 먼저 요구했다고 변명한다. 사실일 수 있다? 천만에. 국민이 개입하면 180도로 달라진다. 국민의 명령을 거부한 것은 40대 남자다. 그는 40년간 국가 안에서 호흡했지만 15세 소녀는 아직 가족의 품을 벗어나 사회와 상호작용이 없다. 누가 잘못했는지는 명백해진다. 국민의 명령을 거부한 쪽이 잘못한 것이다. 사건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므로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면 이미 부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전체를 찾으려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체는 계를 이루고 질을 성립시키며 대칭된 양자를 동시에 통제한다. 에너지원은 하나가 된다. |
"전체는 계를 이루고 질을 성립시키며 대칭된 양자를 동시에 통제한다. 에너지원은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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