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창조자들
문화공간은 그 공간에 연출된 특정한 것을 향유하는 공간이다.
그러니 이건 돈으로 가치를 단순환산할 수 없다. 특히나 작은 카페들은 그 공간을 만든이의 모든 것이 투영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공간들이 삶의 질을 높여 준다. 이러한 공간을 만드는 이들은 한번 만들고 두번 만들고...점차로 사회와 세상과의 상호작용한 범위를 공간에 반영하게 된다. 즉 자기세상을 공간에 연출하는 것이다. 이 연출된 공간은 다양한 소통을 불러 사람을 교류 시킨다.
자신의 주변의 질이 낮으면 사람의 삶의 질이 저하 된다. 삶의 질이 높아지려면 자기주변의 질이 높아져야 한다. 촛불은 그렇게 우리가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자기 자신도 그러하고 자신의 친구들도 자신이 속한 집단도 자신이 속한 사회도 자신이 교류하는 세상도 모두 자기주변이다. 이 자기주변의 질이 높아질때 사람은 행복해지게 된다.
행복....자기주변의 질이 낮은데...어찌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적당하게 소비할수도 있고 적절하게 놀수도 있어야 하고 알맞게 여행도 할 수 있어야 하며 절대적인 자기시간도 확보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할지라도...자기주변이 부실하거나 질이 낮으면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이 홀로 행복해도 되는 것이라면 정말 개돼지들의 행복일 것이다.
인간은 홀로 절대적인 고독을 취할수는 있을지라도 홀로 절대적으로 행복할순 없다. 홀로 절대적으로 행복할 수 없기에 인간에게 소통이 필요한 것이고, 그 소통을 하기 위해 안목이 필요한 것이며 그 안목으로 자기를 연출하는 것이며 그 연출의 최종은 '예'인 것이다. 만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남은 새로운 관계와 세계로 가기 위한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 시작에 의하여 인간에게 공간이 중요한 이유이다. 인간이 어떤 특정한 공간에 들어서면, 바로 닫힌계가 성립한다.
그 공간만의 절대적 시간이 있다. 시간은 닫힌계에서는 공간만의 시간이 흘러 시간과 공간안에서 압축되어 에너지를 생성한다. 그 에너지의 질이 그때 그 공간을 지배한 밀도가 된다. 에너지 생성은 다양한 방법이 있겠으나... 결국 사람이 모이다보면 사람의 에너지 수준이 질의 수준이 된다.
질이 높으면 편안하고 질이 낮으면 불편해진다. 공간의 질도 그러하다. 그러니 그 자신의 질을 점검해야 한다. 그 질을 어떻게 공간에 펼쳐 놓을까 하는 것이다. 이 시간은 시계로 보는 누구나에게 통용되는 시간과는 또 다른 시간이다. 그러니 다시 닫힌계안에서는 절대적인 시간이 상정되지만, 보편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시간에 있어서는 상대적인 시간이 된다.
특정한 공간에서 자기취향은 별 의미 없다. 이미 콘셉트가 제시되어 있어서 그 기준과 방향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공간의 밀도를 이기지 못하면 그건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균일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균일해질 때 까지 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여기가 모든 시작점의 딜레마이다. 균일하지 않으면 만나도 만나는 것이 아니라서 애초에 시작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천만에, 다시 원점일 뿐이고 한번도 만난적이 없다. 한번이라도 만나본적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볼 일이다.
문화공간은 그 공간에 연출된 특정한 것을 향유하는 공간이다.
그러니 이건 돈으로 가치를 단순환산할 수 없다. 특히나 작은 카페들은 그 공간을 만든이의 모든 것이 투영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공간들이 삶의 질을 높여 준다. 이러한 공간을 만드는 이들은 한번 만들고 두번 만들고...점차로 사회와 세상과의 상호작용한 범위를 공간에 반영하게 된다. 즉 자기세상을 공간에 연출하는 것이다. 이 연출된 공간은 다양한 소통을 불러 사람을 교류 시킨다.
자신의 주변의 질이 낮으면 사람의 삶의 질이 저하 된다. 삶의 질이 높아지려면 자기주변의 질이 높아져야 한다. 촛불은 그렇게 우리가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자기 자신도 그러하고 자신의 친구들도 자신이 속한 집단도 자신이 속한 사회도 자신이 교류하는 세상도 모두 자기주변이다. 이 자기주변의 질이 높아질때 사람은 행복해지게 된다.
행복....자기주변의 질이 낮은데...어찌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적당하게 소비할수도 있고 적절하게 놀수도 있어야 하고 알맞게 여행도 할 수 있어야 하며 절대적인 자기시간도 확보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할지라도...자기주변이 부실하거나 질이 낮으면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이 홀로 행복해도 되는 것이라면 정말 개돼지들의 행복일 것이다.
인간은 홀로 절대적인 고독을 취할수는 있을지라도 홀로 절대적으로 행복할순 없다. 홀로 절대적으로 행복할 수 없기에 인간에게 소통이 필요한 것이고, 그 소통을 하기 위해 안목이 필요한 것이며 그 안목으로 자기를 연출하는 것이며 그 연출의 최종은 '예'인 것이다. 만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남은 새로운 관계와 세계로 가기 위한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 시작에 의하여 인간에게 공간이 중요한 이유이다. 인간이 어떤 특정한 공간에 들어서면, 바로 닫힌계가 성립한다.
그 공간만의 절대적 시간이 있다. 시간은 닫힌계에서는 공간만의 시간이 흘러 시간과 공간안에서 압축되어 에너지를 생성한다. 그 에너지의 질이 그때 그 공간을 지배한 밀도가 된다. 에너지 생성은 다양한 방법이 있겠으나... 결국 사람이 모이다보면 사람의 에너지 수준이 질의 수준이 된다.
질이 높으면 편안하고 질이 낮으면 불편해진다. 공간의 질도 그러하다. 그러니 그 자신의 질을 점검해야 한다. 그 질을 어떻게 공간에 펼쳐 놓을까 하는 것이다. 이 시간은 시계로 보는 누구나에게 통용되는 시간과는 또 다른 시간이다. 그러니 다시 닫힌계안에서는 절대적인 시간이 상정되지만, 보편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시간에 있어서는 상대적인 시간이 된다.
특정한 공간에서 자기취향은 별 의미 없다. 이미 콘셉트가 제시되어 있어서 그 기준과 방향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공간의 밀도를 이기지 못하면 그건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균일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균일해질 때 까지 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여기가 모든 시작점의 딜레마이다. 균일하지 않으면 만나도 만나는 것이 아니라서 애초에 시작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천만에, 다시 원점일 뿐이고 한번도 만난적이 없다. 한번이라도 만나본적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