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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아란도
read 3620 vote 0 2010.11.04 (12:56:56)




 

아래의 글을 쓰다보니, 조선의 역사를 보면서 세계의 과학과 근대화, 자본에 초점이 맞추어져 버렸다. 조선 자체의 얘기로는 풀어갈 수 없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맥락을 잡아야 하는 것도 있지만, 부분만을 보면 답이 안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결국 한 나라의 역사이지만, 세계의 흐름과 맞물려 간다는 것도 생각해보면서... 조선의 도자기를 통해서 대정호 다완을 이해해 보려고 한 것이 너무 멀리 간 점이 없지 않아 있지만, 하나의 호기심과 관심이 전체를 다시한번 보게 한다는 점에서 내 스스로에게도 좋은 경험이 된 것 같다.

 

이 글은 아래 링크의 글을 쓰고나서 그 연장선상에서  소회감을 느낀 점에 대해서 써본 글이다. 그래서 도자기보다는 전반적인 역사에 통해 느껴지는 생각과, 오늘날과 연계된 부분에 대해서 대해서 생각해 보는 방향에서 써보게 된 것 같다.

http://blog.daum.net/arrando/13757625 

 

 

 

이번에 대정호 다완에 대하여 알아보려 조선의 도자기 역사를 전반적으로 그 변천사를 살펴보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조선의 역사와 그 당시 세계의 변화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조선의 역사를 들여다 보는 과정은 그리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지난날의 역사를 보고, 오늘을 다시 보게 되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오는 것을 반드시 어떤 감정을 갖고 접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의 역사를 보고 있으면 민초들의 애환이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아마도 그것은 현실과 어떤 면에서는 겹쳐지는 부분들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한 사람의 왕을 뽑으라고 한다면 주저없이 세종대왕을 뽑을 것이다. 세종의 애민의 마음이 없었다면 조선 백성들 불쌍해서 어찌할뻔 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왔다. 아마도 나도 모르게 그 시대의 백성들 마음이 감정이입 된 것 같기도 하다. 역사는 흘러가고 역사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시대에서 최선을 다해주는 모습,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당시 세종이 보고 있었던 이상과 현실의 고뇌도 느낄 수 있었고, 그가 바랬던 세상이 무엇이었을까? 대해서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동안 살아왔던 문화와는 다른 문화를 살아가야 하고, 새로운 이념을 받아 들여야 하는 백성들로서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유학이 서민들의 배를 불려주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고, 더구나 유학을 공부해서 서민들의 삶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고, 지배층의 이념의 맞추며 살아야 하는 서민들의 고달픔을 세종은 이해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졌다. 지배층이 바라는 것과 서민들이 바라는 것은 완전하게 거의 불일치한다. 그런 불일치 속에서 세종은 지배층이 백성을 이해해야 하고, 백성의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세종 역시 왕이므로 완벽하게 백성들에게만 맞출 수는 없었을 테지만, 자신이 낮아져서 눈 높이를 맞추는 왕도 흔한 것은 아니므로...주저없이 세종을 손 꼽는다.

 

백성이 이 시대에는 존중 받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존재감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세종이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알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백성이 그 존엄을 존중받고 나서 어떻게 대우 받은 것을 표현해 내었는가가 중요해진다.

왕이 존중해줘서 눈물나게 감사한 것이 아니라(물론 백성을 그렇게 떠 받들고 아끼는 왕이 많지 않으니 눈물이 날 수도 있다), 백성들의 의식을 일깨워준 그것이 중요하고 존중 받은 그 마음을 어떻게 삶과 문화에 표출되어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래서 이 시대의 문화는 피지배 계층 문화가 지배층 문화를 앞서게 된다. 한반도가 민초들의 힘으로 이어지고 있는 땅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문화적으로 독자성과 창의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예속에서 벗어나 조선만의 문화를 민초들이 먼저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대부들의 문화는 그 후로 나타나게 된다. 결국 조선의 사대부 문화는 민초들의 문화를 밣고 일어선 격이 되었다. 이미 거기에서 모순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같이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대부 문화만이 유일한 문화라는 발상에서 민초들의 문화가 사라지게 된 것이고, 민초들의 문화를 사대부 문화에 예속되게 하였던 것이다.

백성을 하늘같이 알아야 한다는 유학의 근본 원리에 맞지 않았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민초들을 희생시킨 나라였다. 조선의 그 많은 민란은 모두 이러한 모순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선 백성은 자신의 존엄을 인정 받고 싶었던 것이다. 계급으로, 신분으로 나누어지고, 남녀로 갈리고, 이념으로 갈리고, 등등 수 많은 갈림에서 벗어나 대우받고 싶었던 것이었다고 본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외면하고 간 그 시대의 아픔에 대해서 ..할말이 없으니 역사속에 있었던 사실이었다고만 말하게 된다. 물론 조선에도 수많은 인재가 있었으나 그 인재들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들 스스로는 유학에 입각하여, 혹은 백성을 위하고 조선을 위하는 마음으로 행했겠으나, 이 또한 그들 스스로의 신념이었다고 보이며, 각 시대를 이어가는 주류 지배층의 생각은 조선의 의인들과는 상반된것 같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이 반드시 힘이 없어서 겪게 된 전란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은 조선의 오만에서 비롯되었고, 지배층의 당리당략의 의해 조선이라는 배가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뒤로 가지도 못하게 된 상황의 결정판이었다고 생각된다.

병자호란은 사대주의 사상에 몰입되어, 변화해가는 중국의 정세에 대처하지 못해서 생긴 결과이다. 결국 이 양 전란으로 인한 피해는 백성들이 고스란히 받았다.

 

임진왜란으로 일본은 일본 내부의 모순을 어찌되었든 풀었고, 조선의 에너지를 가져감으로 인해서 그들은 내부에 없던 에너지, 즉 외부에서 에너지 끌어 들이기에 성공하였다. 조선의 문화와 기술들을 가져감으로 인해서 일본은 세계의 흐름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는 명나라를 정신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었으며, 명나라에 대한 지배적 중심 사상을 청나라로 바꾸는데 성공하였다. 명이 없어지자 조선은 스스로 조선중화주의를 자처했고, 청은 조선의 대한 지배와 제제를 강화함으로서 청은 명을 온전히 복속하게 됨으로 인해서 또 한번 조선의 에너지를 가져가게 된다. 이 역시 청의 입장에서는 외부에서 에너지를 조달한 것과 같다.

 

그 당시 조선은 명과 청의 교체시기에 걸쳐 있었고, 여전히 사대주의라는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에 청을 문물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사상도 등장하게 되었다. 청은 이미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서 세상의 변화에 가는 문물을 다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물관을 자처했을 뿐이었고 청은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 결과 서구의 근대화가 진행되어도 동양에서는 획기적인 근대화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16세기~17세기는 서양에서는 과학 혁명기였다. 그당시 유럽 서양은 12세기에 그리스 - 아랍문명을 받아들여 중세의 암울함에서 벗어나고 있었고, 오랬동안 지배를 해온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론에서 벗어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실용주의 학문을 중시했을 뿐이고, 써 먹을 수 있는 부분까지만을 활용했을 뿐이었다. 더 나아가지 못했다.  철학적인 부분에서는 처음부터 동양과 서양의 시작의 방향이 달랐다. 서양철학은 '세상 만물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였다면 동양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것에서 부터 최초의 출발점이 달랐다. 서양철학은 눈에 보이는 것은 다양하나 쪼개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의 더 근본적인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고, 반면에 동양은 하나의 이미 완결된 존재로서의 삶의 관심을 더 가졌다. 이러한 결과로 동양에서는 수학적인 면에서도 대수 일반으로 추상화 하지도 않았고, 기하학 일반으로 나아가지도 않았다. 서양에서는 근대역학이 성립되고, 근대 생리학이 성립되고, 18세기에 근대화학이 성립되고, 19세기의 생물학에서는 다윈의 진화론, 멘델의 유전법칙까지 성립됨으로 인해서 19세기의 서구의 근대과학은 완결되었다.

 

이 당시 동양에서는 단지 서구의 문물을 써먹을 뿐 더이상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어떠한 의문이나 탐구의 마음을 갖지 않았다. 이로서 동양은 근대학문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에서는 16~17세기 중반은 전쟁으로 인하여 나무나 가난했고 피폐해 있었다. 지배층 역시 청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고, 여전히 성리학에만 몰입을 하였고, 좀 더 능동적인 사유의 실천은 금새 묻혀버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의 모든 에너지를 빼앗기고 피폐해져 버린 산천과 백성의 살림살이는 양반들의 수탈에 한 번 더 비통해 했을 것이다. 지배층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조선은 조선의 산천을 전쟁터로 내어주게 된 것이다. 자신들의 땅에서 치룬 전쟁은 그 나라의 백성이 모두 짊어져야 했다. 전쟁이 빈번한 시대에 살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자국의 영토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막았어야 했다고 생각된다. 그 두 전쟁으로 인하여 조선은 근대화로 가는 막차를 타게 되었고, 그 역시 화려하게 재기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너무나 미약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조선이란 나라가 없어져 버리게 되었다.

 

이 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조선은 좀 더 일찍 근대화가 되었거나, 아니면 내부 모순으로 인하여 조선은 백성의 봉기로 망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일본의 조선 침략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임진왜란을 통해서 일본은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 내었고, 서양과 무역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근대화에 성공하였다. 근대화에 성공하였기에 그 당시 세계적인 추세인 제국주의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외부에서 에너지를 조달하지 못했다면 일본의 그런 비약적인 발전은 없었다고 생각해 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선이 방지만 했더라도 나라를 잃는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나고도 관리들은 임금의 눈에 날까 두려워 숨거나 혹은 목을 내놓아야 했다. 의병이나 승병은 모두 자신들의 전적을 숨겨야 했다. 그리고 전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그 공과를 나누어 가졌다. 남의 나라를 쳐들어 갔어야 했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미리 전쟁을 예방했어야 했고, 전쟁터로 자국의 땅을 내주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들은 그 험난한 전쟁을 치루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됨으로 인해서 100년이 늦어진 18세기에 들어서야 조선의 르네상스를 맞게 된 것이었으니, 이는 일본,과 청나라 서양보다는 한참 늦어진 것이었다. 또한 일본은 그 후로 근대화에 성공하였지만, 청과 조선에 찾아온 르네상스는 사실 공허한 것이었다. 내부에 어떤 비약적인 변화가 있었거나 과학적인 기술이 쌓여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그저 그 시대의 흐름이 자본이라는 부를 가져다 준 것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내부의 변화라기 보다는, 생산적인 측면보다는 소비적인 측면의 자본의 성격이 강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결국 역사에 그동안  없었던 풍요의 시대를 맞고서도, 정조사후 급속하게 무너져 가는 조선의 역사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 당시에 정조가 내부적인 모순을 외부로 시선을 돌려 좀 더 적극적인 시스템적인 변화를 조선에 가져왔더라면 자신이 죽고나서 그렇게 까지 조선이 망가질 수 있을까... 한 세력이 한 세력에 의해서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조선의 역사는 어찌 되었든 당파로 이어져온 나라였으니 그 당파가 차라리 마지막까지 유지되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한 세력이 완전히 사라지고, 남은 한 세력의 독재적인 권력으로 흘러버렸다는 것이 그동안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던 사회체제를 깨는  또 하나의 모순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역시 조선왕실과 사대부들이 갖는 사고의 한계를 볼 뿐이라고 생각된다. 시스템적인 변화를 왕실에서 부터 한다는 것은 조선이 사대부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에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반발들과  주류 지배층의 세력들을 통제하는 것만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살아야 했던 그 시대를 뚫고 나오게 된 것은 역시나 무역이었다. 또한 세종때부터 공을 들여온 농법들이 그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로는 인구가 늘어났고, 농사의 수확량이 많아졌으며, 외부적으로는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상인들로 주축된 자본가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청과 무역을 시작한 조선 상인들의 자본력은 숙종때에 와서 성장하게 되었고, 숙종은 자본과 권력 사이에서 정치를 하였다. 이는 영.정조로 이어져 왕실을 튼튼히 하게 되었고, 전반적으로 인구가 늘게되자 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농민들이 한양으로 몰려들게 되었다. 자본주의 도시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한양에서는 빈부 격차가 심해지게 되었고, 천연두, 홍역같은 질병이 생겨나게 되었다.

 

지배층은 그 어느 때 보다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도자기 역시 다시 호화로와 지고 질이 좋아지게 되었다. 일반인에게도 생활도자기가 등장했다. 그 당시 세계화의 흐름은 근대화였고, 그러한 결과물들로 인하여 청은 서양과 많은 무역을 하게되었고, 그 여파가 미쳐서 조선 역시 청과 무역하면서 조선이  부유해졌지만 지배층은 여전히 자신들이 잘해서 그러는줄 알고 있었다. 전 시대의 노력들이 쌓여서 농사법과 다양한 분야에서 그 실효가 나타났고, 무역은 세계적인 흐름이었다. 그러나 지배층과 세도가들은 그저 그 생활을 즐기고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는 일본의 침략이었고 결국 조선은 없어졌다. 서양의 근대화는 현대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인류가 가는 방향에서는 필연적인 발생이었지만, 동양과 만남에서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동양은 근대화라는 엄청난 괴물이 눈앞에서 얼쩡거려도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오직 일본만이 근대화라는 괴물을 받아들여 근대화에 성공하였고, 아시아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무너져 버렸다. 조선 역시 일본의 일방적 근대화에 무너졌다. 이미 조선은 그 내부에 중추가 될만한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조선의 지배층과 자본가들은 자신의 주머니을 채워줄 쪽으로, 권력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들에게는 그것외에는 별로 중요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라도 백성도 모두 팔아버렸다. 그 결과 그들의 주머니는 더욱 더 두둑해졌다. 결국 이들은 돈의 노예가 되었다. 권력은 단지 돈을 지키는 도구에 불과했다. 조선의 근대화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조선의 백성은 아무것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주어진대로 닥치는대로 비바람을 맞으며 살 수 밖에 없는 근대화였다.

 

지금의 우리의 일상은 과학이 아닌 것이 없다. 그리고 과학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쪼개도 쪼개도 더 작은 존재는 계속하여 등장하고 있고,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면 볼 수록 더 작은 것이 나타나고 있다. 근대 과학은 기술과 결합하여 인간과 자연을 마음대로 지배하게 되었다. 근대과학을 더욱더 탄탄하게 뒷받침 해준 것은 근대철학이고, 근대과학은 그것을 입증하였다. 기계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 근대인들의 자연의 대한 인식은 자연 파괴를 서슴치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근대에 탄생한 과학문명은 현재에 와서 그 한계점을 보여준다. 물론 과학은 계속 발전 할 것이지만, 그 과학을 통제할 수단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근대의 나타나서 근대과학을 제어하고 싶어했던 독일에서 발생했던 낭만주의 자연철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괴테에 의해 등장한 낭만주의 철학의 입장은 고대 아르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연의 근원까지 파헤쳐 들어가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영향은 일에서 자연철학을 낳게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자연철학은 기계론적 자연철학에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그 이후로 근대과학은 거칠 것이 없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현대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리스토텔레스 관점은 근대과학으로 깨졌다. 그러나 근대과학은 우주나 자연을 기계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현대과학에서 보자면  우주나 자연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주나 자연은 지배와 이용의 대상만도 아니다.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근대과학이 남긴 의문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내야 하는 것과 함께 과학과 자연과 인간이 공존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현대의 자연철학은 근대의 자연철학과는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진행되고 있다. 근대의 자연철학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과학의 긍정적인 부분을 인정해야 하고, 또한 근대에서 생각한 자연철학의 입장도 현대에 와서는 수정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철학이 그 시대를 뒷받침하게 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현대의 철학은 무엇일까...? 어떠한 철학을 가져야 근대를 벗어나고도 아직 근대를 벗어나지 못한 인간의 정신적 사유를 성장시키게 될까...?

 

서양에서는 16세기에 싹튼 민족주의가 특권층에 해당되는 것에 한정된 것을 반봉건적인 것에 대항하는 차원에서 민족이라는 근간을 형성하여 프랑스에는 혁명으로 이어졌고, 미국의 독립운동, 19세기에는 민죽의 이익을 대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식민지를 만들어 나갔고, 20세기에는 제국주의,나치즘, 파시즘으로 흘러갔다. 근대의 자연관이 근대화를 이루고 산업화를 발생시켰고, 무역을 하다보니 자국의 이익과 보호를 극대화 시키려는 발상이 오도된 결과였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식민지 나라들에게도 전이 되었는데, 제국주의 나라가 갖는 민족주의와 식민지 나라가 갖는 민족주의는 그 본질의 접근이 다른 것이었다. 자국과 자국의 민족의 이익을 극대화한 민족주의와, 독립을 해야하고 민족끼리 뭉쳐서 대항해야 한다는 민족주의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반동의 결과로 민주주의가 나왔다. 즉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근대가 만들어낸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민주주의일 것이다. 반면에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 독재도 같이 나타나게 되었다. 자본주의에 대항에서 공산주의가 나왔듯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요즘 사회를 보면 자본이 없이는, 자본이 굴러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듯이 현대의 민주주의에는 자본이 필수이다. 이 자본을 어떻게 제어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는가에 따라서 민주주의의 역량도 달라지게 된다. 즉 자본관리 능력이 그 나라의 정부의 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본은 감정적으로 대응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므로 자본에 대한 철학을 가져야 하고, 정신적으로 제어해야만 그 수준이나 효율성에 있어서 자본에 대하여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자본 관리 능력으로 그 나라 정부의 정신상태를 가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자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자본이 흘러가는 방향의 흐름에 올라타는 것일 뿐이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자본을 보자면, 18세기의 번성이야말로 자본의 흐름에 왕과 지배계층이 올라타 있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이 반드시 잘해서 자본이 조선시장에 모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흐름이 그 당시에 자본을 풍족하게 해준 것이다. 단지 숙종과 영조 정조는 그 자본을 효율적으로 통제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외척 세력들은 그 자본을 움켜쥐려고만 했지 그 자본의 흐름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보자면 자연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유기적인 것이 된다. 자본의 흐름 역시 하나의 유기체로 보아야 한다. 어느 사회나 지배층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그 사회는 망한다. 왜냐하면 자본의 흐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지배층의, 권력층에 가까운 사람들일수록 자본의 흐름을 빨리 포착하게 된다. 조선시대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 흐름을 의도적으로 막고, 차단하고 자신들의 주머니로만 흐르게 하였다. 그런 돈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들이 특별히 정치를 잘해서 잘해서 자본이 몰린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흐름을 탔을 뿐이고, 그런 흐름을 통해서 자본이 유입된 것이다. 그때의 지배계층과 세도가들은 그저 흘러가는 자본을 붙잡아서 자신들을 위해서만 사용하였다. 자본의 흐름을 틀어쥐고 자신들에게만 유리하게 사용하려 하는 것은 자본의 흐름을 왜곡하는 것이어서 반드시 탈이난다. 그리고 그런 피해는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지배층이 돈의 흐름을 살피고, 자신들을 적절하게 제어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망한다. 돈을 가치있게 흐르게 할 수 있어야  그 사회에 희망이 있다. 조선시대의 후기의 세도가들은 조선백성에게 너무나 큰 빚을 졌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시대적인 흐름을 가로막았고, 그 결과 한반도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나라 잃은 설움을 줬으니 그 빚을 어쩔 것인가? 그리고 조선의 지배계급 역시 조선의 백성들에게 빚을 진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현대에 와서, 지금에서 생각해 본다면 서구의 과학은 동양에 점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과학적 토대위의 사유의 방향이 아니게 되면, 'A면 B다' 라는 논리성이 결여되기에 과학적 토대위에서 사유해야 한다. 그런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과학적 틀의 기초한 사유라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생각하는 막연한 앎과는 다르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무의식적으로 경험된 기존의 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을 통하여 일상적 앎이 지닌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 토대위의 사유가 아니거나 학문이 아니면 중구난방이 되어서 그 뿌리를 찾을 수가 없게 된다. 명확해야 하는 것이고, 철학의 문제제기, 과학의 문제풀이, 미학의 답으로 해결이 되어야 한다.

 

더구나 필연의 발생으로 인한 것이지만 동양에는 일방적으로 다가왔던 과학, 그리고 지금은 받아들인 과학을 토대로 동양의 사유의 방법은 더 빛을 발하게 되었다. 서양이 서양의 사유의 출발점으로 과학문명을 이루었다면, 이제 동양은 과학의 토대위에서 동양의 사유 방식을 펼쳐가야 한다. 예전의 동양이 토대없이 그저 집을 지으려고 하였다면, 이제는 과학이라는 토대위에서 사유를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동양의 사유방식, 즉 철학이 제기한 문제를 과학으로 풀어낼 수 있고 , 미학의 답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동양에는 철학과 미학의 완정성은 있었으나 과학의 문제풀이 과정이 생략되었기에 방향을 포착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부족했던 과학의 부분을 메꾸었으니 철학 과학 미학은 이제 한자리에 있는 것과 같다.

 

서양에서는 지금 많은 소재들에 대하여 동양에서 아이디어를 얻어간다. 그러나 지극히 표면적으로 접근할 뿐이다. 우리는 동양의 사유에 대해서 익숙하고 동양의 깊은 면을 잘 알고 있다. 그러한 부분에 관심을 가져서 과학(지금의 과학은 근대와 마찬가지로 거의 기술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의 토대위에서 정신을 펼쳐내야 한다고 생각된다. 즉 과학보다 정신이 더 위에 있는 것이다. 서양의 과학을 받아들인 지금은 충분히 동양의 정신을 꽃 피울 수 있다고 생각된다. 동양의 대해서 잘 아는 동양인들이 과학을 이용하여 동양의 정신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를 얼마든지 깊게 활용할 수 있다고 보며, 그러한 것은 질적은 면을 한 단계 끌어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동양은 그저 과학을 쓸모 있는것, 활용하는 가능한 것 정도로만 생각했고 한 단계 낮은 대우를 해왔다. 그러나 과학은 낮은 것이 아니다. 과학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 눈에 보이게 하는 현실화에 기여를 한다.

 

흙은 흙일 뿐이지 그릇이 아니다. 그런데 이 흙을 정제하고, 빛고 , 그림을 그리고, 유약을 발라서 불에 굽는 것은 과학이다. 그리고 우리 눈 앞에 그릇이 나타나게 한다. 이것이 과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현실화 하는 과정이다. 모든 물질은 이렇게 생겨난다. 즉 물질화 하게 하는 것이 과학이다. 이러한 과학을 좀 더 유익하게 사용하고 통제하는 것이 인간의 정신이다. 동양의 정신으로 과학은 좀 더 아름다워 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동양은 미학적 완성이 무엇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전의 동양은 과학이 없었다. 처음과 끝은 있었는데 중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력이 없어서 근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과학을 받아 들인 지금 그 중간인 과학이 있다. 인간과 자연의 사이에 과학을 가져다 놓아야 한다. 그리고 동양정신은 그 출구와 마지막을 이미 알고있다.

과학은 산업이고 미학은 문화이다. 우리나라 산업은 그동안 선진국에 종속되어 일어났지만 이제는 종속에서 벗어나 끌고가야 된다. 그래서 과학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미학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 과학이 그동안의 사회를 끌고 갔기에 미학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제 문화가 과학을 주도해야 한다. 과학은 언제나 무엇인가의 하부구조로 편입된다. 그래서 과학 = 산업이 종속된다는 것이다. 미학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종속에서 벗어나 이끌고 가게된다.

 

서양인들이 도자기 그릇이 없을 때는 교양이나 양식이 없더니 도자기 그릇이 생기니 아주 복잡한 식탁 에티켓을 만들어 놓았다. 그것이 미학이다. 즉 자신들끼리 양식을 만들어 약속의 체계를 정한 것이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상대하지 않는 것처럼..그리고 그 양식이 그들의 문화가 되었다. 그들은 그런 에티켓을 지키지 않으면 싫어한다.교양이 없다고... 이렇게 미학은 어느 한 부분을 건드려서 전반적으로 어떤 수준을 전체적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도자기는 그들에게 산업이지만, 그들은 도자기로 차리는 식탁의 양식을 만들어서 문화로 만들었다. 이것이 그들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서 미학적으로 끌어올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예다. 미학은 단순하게 아름답고,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문화적 수준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즉 삶의 전반적인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는 전체적으로 퍼져가다보면 처음에는 부분적으로만 수준이 높다가 퍼지다보면 전반적으로 수준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동대문의 옷가게는 예전에는 싸구려라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지금은 패션의 유행을 측정하는 척도가 되었다. 이는 전반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제가 좋아지면서 사람들의 안목이 올라갔기 때문에 동대문에서 파는 옷들도 그것에 발을 맞춘 결과 질과 디자인 면에서  싸구려라는 이미지를 벗어나  유행을 선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것이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나가 변하면 전부 변하는 것이다. 어느 한군데만 파급되는 것이 아니라 그나라 사람들의 안목과 질이 높아지면 다른 것들도 전부 그것에 연동되어 바뀌게 된다. 결과적으로 문화가 바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을 기반으로 정신의 안목이 높아지면 과학산업의 종속에서 벗어나 문화적인 선도를 할 수 있다. 그동안은 과학으로 인한 종속된 산업역시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그 종속에서 벗어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벗어나지 못하면 출구를 찾지 못해서 퇴보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우리사회 전반에 걸쳐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도기도 한다. 어느 한군데에서의 탁월한 변화가 사회전반적으로 확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스마트폰도 없었듯이 미학은 그렇게 연동되어 일어나고 변화시킨다. 스마트폰이 나타남으로 인해서 휴대폰 등의 다양한 것이 다 바뀌게 되어 버린 것과 같다.

 

이렇게 전체 역사의 흐르을 보고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비록 이런 사유가 지금 당장 밥을 먹여 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디로 세상이 흘러가고 있는지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방향성을 포착하고 흘러가야 한다. 그냥 떠밀리듯이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방향을 찾고 보면서 가야 한다고 생각된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0.11.04 (13:05:40)


흠...좀 글이 기네요. ^^;
프로필 이미지 [레벨:5]id: 땡건땡건

2010.11.04 (13:35:59)

방향성을 포착하고 흘러가야 한다..라는 말씀이 참 공감가네요.
다음에는 조금 더 긴 글 부탁드려요. 제가 너무 한가해서요.하하^^
좋은 글 잘읽고 갑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0.11.05 (12:01:46)


저도 한가 했나봅니다. 쓰다보니 길어져 버렸네요.
ㅋㅋ,,,감사합니다. ^^()
프로필 이미지 [레벨:6]지여

2010.11.05 (12:44:39)

(조선) 역사공부는 새록새록 재미 불러일으키는 부분이라 글 감사부터 드리고....

역사를 사건후 누군가에 의한 기록과 평가로 본다....는 측면과,    그리고  그 사건자체도  ㅇ 씨뿌리고   ㅇ 꽃피우고(물과 거름 주고)   ㅇ 열매를 수확하는 단계가 있음으로 해서   항상  기록 평가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살아가는 역동성으로 느껴집니다  

조선역사중  세종과 정조에 대한 저 나름대로 생각은
교과서로 외웠던 세종의 업적중 대부분은 악역을 자처(씨 뿌리기와 거름주기)했던 이방원(태종)의 몫이지 않을까? 생각해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을 위대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글이라는 국민사랑의 씨앗을 뿌려 500년 600년 후 거름주고 열매 맺으려는 대한민국 현실이 세종의 씨앗덕분  아닐까 느끼고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서양신식무기를 이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그 분의 고마움 ㅎ ㅎ
정조 역시 꽃피우고 열매수확 관점 은  숙종의 악역 덕이 큰 것 같구요  태종과 세종 관계 ~ 숙종과 영정조 관계 유사....
정조의 씨뿌리기 관점은 문체반정으로 보면 오히려 서민문화와 백성을 위한 과학발전에 저해된 요인 있지 않나?   정약용과 남인의 천주학 실학도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관련 서적 등 읽어보면 정조 사후 급격한 국력 쇠퇴에 일말의 책임이 있지 않을까  ?   뭐 그런 생각... 좀 더 공부해야겠지만,,,,,

현재 대한민국 아이티강국 열매도 어떤면은 군사정권시절  육사(군인이라기 보다는 학자나 교수직책이지만) 출신 오명 전 장관 씨뿌리기공이 큰 것은 객관적 사실이구요, 물론 이 씨앗을 물주고 거름주고 꽃피운 건 디제이 공로인 것도 명확하구요. 단지 골통 명박일당이 열매만 관심있고 물도 거름도 주고 있지 않는 게 불안요인이지만....  


프로필 이미지 [레벨:5]id: 땡건땡건

2010.11.05 (15:58:11)

골통 명박일당에 좀 뿜었습니다.ㅎㅎ 꿈에 나올까 두렵습니다.
이명박 이라는 이름은 지금 골통 이명박으로 끝나지 않을까요?ㅡㅡ;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0.11.06 (08:18:06)


^^ 제 얘기의 골자는 지속가능한가, 아니면 멈추어 버리는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치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겠지요.
내용이 꽉 차 있는 상태에서의 사치는 지속가능하기에 아름다움으로 발전이 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한 것이지만,
내용이 없는 공허한 사치는 지속가능하지 않기에 추해져 버리는 것이기에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겠지요.
실용을 목적으로 하는 합리주의는 결국 실용이 없어지면 폐기처분 되는 것이기에 비합리주의와 같고,
이상을 목적으로 하는 합리주의는 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기에 지속가능함을 품고 있기에 합리주의인 것처럼...
세종의 치세는 지속가능한 것을 목표로 하였기에 합리주의를 바탕에 두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후에 빛을 발하게 되었고 계속 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면,
정조는 정조 이후에 그 가치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한계가 있었고, 그렇기는 하지만, 반드시 정조가 비 합리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흐름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흐름이 서구는 과학의 기반위에 세워져 지속 가능함의 바탕위에서의 사치를 추구했다면( 정치,사회적으로 변화가 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지속가능한 바탕위에서의 사치였다고 봅니다.) , 조선의 르네상스는 내용의 변화없이 그 시대의 흐름에 맞춰 흘러간 것 뿐이다 보니, 안에서의 변화가 일어나서가 아니라 밖의 변화가 안의 영향을 준 것일 뿐이고, 또한 그러한 영향을 안에서 근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쉽게 무너져 내린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세종은 조금은 근본적으로 접근하려 했던 반면에(물론 세종은 어떠한 정치 세력보다는 백성들이 살아가는 방향에서의 지속가능함을 추구했던 것 같지만은요),  정조는 조금은 방향이 그런 것은 아니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요.
상황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종이 혁신을 하려했다고 생각이 든다면 정조는 지키려 했다는 생각이 들고, 세종이 훈구파를 어느정도 제압한 상황에서 뭔가를 했다면, 정조는 노론을 견제하기는 했지만, 변해가는 세상에 맞춰서 근본적으로 변화를 시도했어야 하는 시기였는데, 그 변화의 시대에 변화를 주도할 세력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고, 또한 그 세력이 건재하여 그 시대를 끌고갈 안전한 시스템을 마련해놓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다는 것이지요.
세종은 어찌되었든 백성이라는 세력을 만들어 놓았다면, 정조는 정치세력이라도 만들어 놓았어야 했는데, 그리고 그 둘이 만나서 새로운 시대를 끌고갈 동력이 되어야 했는데... 정조가 그것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과학기술과 혁명은 아예 바라지도 않았구요, 그 시대 사고로 상공업의 발전이 있었다고는 하나, 과학 혁명이 나왔을리도 없구요...단지, 정치세력만이라도 안정되게 확되었다면 어찌되었든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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