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노랗게 익은 단감처럼 구조론이 무르익어 책으로 열매를 맺어 세상에 나왔다.
구조론이 나오고 다시 '구조','소통지능' 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구조라는 책은 총서 형태로 나왔다.
김동렬 총서 1 이 구조라면
소통지능은 김동렬 총서 2 다.
앞으로 김동렬 총서의 맨 끝자리는 어느 숫자가 차지할지 모른다.
총서의 행진이 계속 진행 될 것이고,
그만큼 구조론은 완성될 것이다.
구조가 무엇인가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으로 되어있고, 그동안 과학으로 미세하게 한 없이 쪼개기만 하던 세계에서
구조라는 세계로 관점이 바뀌게 되는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그동안의 철학과 과학에서 구조를 얘기하는 범위는 극히 한정적이었다면,
김동렬의'구조'는 세계가 이루어진 근본을 '구조'라고 선언한 점이 각별하다.
심1과 날2로 축과 대칭을 이룬 구조의 모형.
같은 패턴을 집적하여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두고 밸런스와 시스템으로 발전시키는 것.
세상의 모든 구조는 그 패턴이 같다.
구조는 에너지가 가는 길을 결정한다.
구조는 존재의 단위이다.
존재는 공간에 에너지를 태우고 일한다.
일의 시작과 끝 사이에 에너지 처리의 단위가 있다.
질은 결합하고,입자는 독립하고,힘은 교섭하고,운동은 변화하고, 양은 침투한다.
구조(낳음) >> 기하(차림) >> 대수(모임)
시스템 >> 플랫폼>> 밸런스>>포지션>>데이터
자연 ---------수학 -------인간
자연 > 구조 > 기하 > 대수 > 과학
서구의 인과율 - 시간의 일방향적 완결성 지향
동양의 대칭성 - 공간의 쌍방향적 밸런스 지향
시간은 항상 시작과 끝이 있다. 하루는 아침에 시작되어 저녁에 끝난다.
일년은 봄에 시작하여 겨울에 끝난다.
그러므로 시간성에 주목한 서구는 시작한 일을 어떻게든 마무리 짓고 본다.
반면 공간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 대신 밸런스가 있다.
그러므로 공간성에 주목한 동양은 음양의 밸런스를 조정하여 문제를 악화시키지는 않는다.
대신 확실하게 마무리 짓지 못한다.
서구는 일직선으로 치고 나가서 바로 문제를 해결하되 대신 방향감각이 없어서 곧잘 에러를 일으키는 결점이 있고,
동양은 가운데서 잘 조정하여 무리없이 공존하되 대신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가 없어서
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없이 어중간하게 얼버무리고 마는 결점이 있다.
서구의 시간 인과율에 기초한 에너지 입출력 개념으로 외부에서 에너지를 조달할 수 있고,
동양의 공간 대칭성에 기초한 밸런스 개념으로 내부에서 에너지를 제어할 수 있다.
둘을 합쳐야 바른 이론이 얻어진다.
그러나 대수와 기하는 공간개념에 전념할 뿐이다.
시간의 수학이 필요하다.
서구정신이 더 시간측면에 주목하지만 논리학에 갇혀 있을 뿐 정작 서구 수학에 그것이 없다.
시간의 흐름은 사건을 관통하므로 수학에 없는 사건 개념을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조론이 시간 개념을 도입하여 동서양 사상을 통섭한다.
사건은 시작과 끝 사이에 입력, 저장,제어,연산,출력의 5단계를 거친다.
입력 > 저장> 제어> 연산 > 출력
서구 인과율은 양 극단인 입력과 출력을 보고 있으며 동양의 대칭성은 그 가운데 저장, 제어, 연산의 밸런스를 보고 있다.
서양은 에너지가 있되 방향감각이 없어서 통제하지 못하며, 동양은 에너지를 잘 통제하되 정작 그 에너지가 없다.
구조론은 에너지가 가는 길을 밝힌다.
에너지는 공간을 타고, 전개하며 시간을 진행한다.
중요한 건 시간이다.
현대문명은 여전히 시공간의 얽힘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있다.
공간에 주목해야 시간이 옳게 해석된다.
동양의 음양론이 강조하는 공간적 밸런스 개념이 도리어 서구의 시간적 인과율을 완성시킨다.
구조론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과정이 한 줄에 뀌어진다.
우리는 한걸음 앞서 미래를 예측함으로써 돌발적인 사건의 리스크에 대비할 수 있고, 한편으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외부에서 에너지를 조달하고 내부에서 에너지를 제어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주로 자연을 관찰하여 지식을 구하려 하지만 참된 지식은 씨앗을 심어놓고
싹이 틀 때까지 지켜봐야 하는 시간적 순서의 문제로 되어 있다.
시공간의 얽힘을 반영하는 바른 모형은 선 위에 나열하는 텍스트 형식으로 기술될 수 없고, 평면적 이미지 역시 불완전하다.
모래시계 그림으로 대표되는 구조론의 이론 모형은
시간의 비 가역성이 적용되는 동영상 시물레이션이라는 점에 주의하여야 한다.
구조론은 조직의 성장원리, 국가의 성장원리, 공동체의 성장원리를 해명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과 집단,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해명한다.
유기체로 성장하는 모든 집단들에 대해서 그 방향성을 예측할 수 있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단일화 시켜서 복잡하게 나열된 많은 것들에 대하여 간략하게 일원화 하여
존재론적 방향과 인식론적 방향을 해명할 수 있다.
인간이 가지는 정신과 마음에 대하여 해명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구조의 자궁에서 나왔다.
구조는 자연의 완정성 관점을 해명한다.
구조는 관계맺기로서 소통하고 낳는다.
이는 자연의 생명성이며 인간에게는 창의성이다.
구조는 열린 구조다. 자기복제를 통하여 증폭하고 공명한다.
존재는 순수한 정보로 환원될 수 있으므로 단순반복 작업은 불필요하며
자연의 생명성에 기대어 복잡한 중복과정 없이 정답으로 바로 쳐들어 갈 수 있다.
증폭하고 비약할 수 있다.
창의와 깨달음의 세계다.
구조론은 일의 1단위를 이루는 레이어 5로 전부 설명된다.
레이어는 곧 사건의 층위다.
5는 완성을 뜻한다.
산술 개념의 5가 아니라 단위 개념의 5다.
1은 값, 2는 대칭, 3은 평형, 4는 독립, 5는 완성을 의미한다.
완성되면 통한다. 통하면 낳는다.
낳으면 복제하고 성장하고 발달하여 큰 세력을 이룬다.
입력 - 원인(시작)
저장 - 작용
제어 - 판정
연산 - 반작용
출력 - 결과(끝)
(존재론) - (인식론)
배경 ㅜ 응용
실체 ㅜ 종합
연관 ㅜ 분석
이행 ㅜ 수용
귀결 ㅜ 지각
<구조 책에서 본문 인용>
무엇인가를 학습할 때 기존의 것들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 충돌이 일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새로운 것은 새로운 틀을 갖추는 것이기에 새로운 틀에서 이해하는 것이 그것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무엇이나 그것만의 고유한 틀이나 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이해하는데 다른 틀을 적용하면 혼란스럽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틀이 없다는 것은 어찌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체계를 갖지 못한 것이므로...
내용은 있다 하여도 그것을 담아줄 그릇이 없다면 말짱 도루묵인 것처럼...
그래서 무엇인가를 담아내려면 틀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구조론은 그동안의 모든 학문을 통합하여 더 나아간 것이기도 하지만, 구조라는 새로운 틀을 제시했고, 그것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요약될 수 있다. 그래서 구조론은 구조론의 틀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고 보며, 또한 구조론은 그 자체가 커다란 틀이어서 부분의 작은 틀(즉 각 분야로 갈라진 학문들 등등)로는 구조론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부분이 전체에 들어올 수는 있어도, 새로운 것이 기존의 것의 하부구조로 편입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새로운 틀이 마련되면 기존의 틀을 폐기처분하거나, 혹은 새로운 틀 자체를 받아 들이거나, 아니면 그 두개를 구분하여 바라보는 시선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새로운 이론이 나와서 그것이 타당하다면 새로운 이론은 기존의 것에 대하여 수정하고, 또한 모두 포괄하거나 수용해 버리거나 통합해 버리기에 기존의 것으로 새로운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하여, 각자의 체계는 그 체계안에서 이해하여야 하며, 무엇보다 새로운 체계는 그 자체로서 다른 것과 섞임없이 이해해야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새로운 체계는 기존의 것을 포함.수용해 버리는 것처럼, 새로운 체계를 이해하면 기존의 체계는 저절로 이해가 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사람은 기존의 것으로 새로운 것을 헤아리고 이해하고 받아 들이려는 입장을 고수하게 되어서 새로운 틀과 충돌은 불가피하고, 거기서 혼란과 갈등은 증폭된다. 하지만 기존의 것으로는 새로운 것을 절대 받아 들일 수가 없으므로 틀을 바꾸어 주어야 새로운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갈 수는 없는 이유, 새로운 틀이란 기존의 모든 토대를 바탕으로 그것을 망라하여 통합하여 나타나는 것이고, 더 나아간 것이기에 기존의 것보다 더 큰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낡은 관점이 새로운 관점을 이길 수는 없는 이유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습득하고 학습할 때는 기존의 틀을 대입하지 말고, 새로운 틀 그 자체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기존의 틀에 대하여, 또는 기존의 것으로 헤아릴려고 하는 습관을 의식적으로 제어하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 인해서 의식의 틀을 바꿀 수 있다. 새로운 틀은 의식적으로 진행되어야 받아들이고 알 수 있다고 생각된다. 즉 정신처려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리되면 기존의 것에 끼워맞추려는, 대입하려는, 같은 개념이라고 속단해 버리는, 등등 많은 오류들의 수정이 가능하다. 그래서 오히려 새로운 것으로 기존의 것이 더 명확하게 이해되기도 하고, 그 차별성(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의 차이점과 다른점)의 대해서 더 잘 알게되고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적 사고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살펴보니, 그것은 확실하게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사례들이다. 일상적 앎과 과학적 앎은 틀을 바꾸어야 가능하다는 것, 과학적 앎도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틀이 나타나면 새로운 틀에 올라타야 해결 된다는 것도, 이러한 것이 인문학이나 인문사회학에도 적용되기 때문인데 즉 모든 분야에 걸쳐서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일상적으로만 무의식이 작동 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세계에서도 무의식은 작동 되는 것 같다. 대부분은 기존의 나와 있는 것을 배우거나, 혹은 과정에 따라서 단계로 나아가듯이 학습되거나 하는데, 갑자기(수용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껴짐) 새로운 학문이 나타나면 기존의 것으로는 해결이 안된다. 구조론이 최근에는 가장 큰 예라고 생각된다. (이 부분에서 갈릴레이의 종교재판도 떠오른다. 그만큼 사유체계를 바꾸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지만, 그래도 요즘은 조금 더 낮지 않을까 생각은 해보지만... 어쨌든 우리는 자신의 사유체계와 관점을 바꾸는 그것에 있어서 그만큼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존의 앎이 훨씨 익숙함으로 거부반응 없이 자동적으로 기존의 앎이 새로운 앎의 대하여 간섭을 하기에, 기존의 틀로 새로운 것을 이해하고 판단하려 한다. 새로운 것을 이해하는 토대는 기존의 것이 제공해주나(밑바탕이 되는 지식 등등) 새로운 것 자체를 방해하는 요인도 된다는 것이지요. 기존의 것이 관념화 되어 새로운 것의 대해서 수용을 불편해 하는 것 같은 경우처럼 말이다.)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을 수정만 할 때도 있으나, 완전히 바꿔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전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을 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는 것이라서 전체 다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방향을 의식적으로 끌어올려야 새로운 것을 받아 들일 수 있다는 것일 것이다. 이것이 마음이 진보하는 것이고 마음이 커가는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
구조론은 존재의 사유의 틀을 바꾸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보이지 않던 지점이 보이게 된다.
인간의 인식은 보이는 부분만을 가지고 뭔가를 해결하여 하기에 언제나 역설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역설이란 인간이 인식하지 않는 부분, 즉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그 부분을 보아야 역설의 상황이 생기지 않고 바로 문제를 해결하는 전체적인 시야를 가질 수 있다.
평화란?
밸런스의 회복이 평화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서 구조의 밸런스가 맞아야 비로소 평화가 온다. 이 점을 바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은 인류의 집단지능 시스템 그 자체다.
지식이 스스로 지식을 낳는 지식의 자동증식 시스템이다.
지식체계가 고도화되어 독립적인 가치판단이 가능한바 인격성을 획득한 것이 지성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식개발자 상호간에 알고리듬을 주고받는 소스코드의 표준화가 필요하다.
철학적 일원론 > 과학적 합리주의 > 미학적 이상주의가 정답이다.
집단지능 시스템은 소통지능에 의해 건설된다.
기억능력과 연산능력은 단순작업을 반복하는 하부구조이며,
이를 통제하는 프로그래밍 작업은 상부구조의 소통지능이 담당한다.
소통지능은 외부에서 자원을 끌어오는 의사결정능력과 내부에서 이를 통제하는 가치판단능력이며, 구체적으로는 환경과의 교감능력, 사회적인 의사소통, 현장에서의 문제해결능력으로 존재한다.
<소통 지능 책에서 인용>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정거장은 들렀다가 곧 떠나가는 것이다.
한 단계에 집착하지 않고 바로 다음 다음 단계로 나아가 주는 것이 무심이다.
인간은 높은 단계로 올라 갈 때 무심해질 수 있다.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닐 때 무심해 질 수 있다.
눈을 떠야 한다. 더 높은 세계를 보아야 한다.
고맙소.
자극받아서...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올려 보았지만...조금은 뭔가 부족한 듯 하기도 하지만....다음에 마음 책이 나오면 ㅡ 그때는 자알...^^()
오랜 단골 교보로부터 오늘 날라온 소통지능 아주 기대되오. 내용이 출중하니 편집에 대한 불만은 일단 접어두기로 했소. 3권, 4권,,,, 10권이 단박에 날아올것을 생각하니 무쟈 뿌듯하오
대박행진이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감사염^^
블로그 있으신 분들은 이글 퍼서 두개로 나눠서 올리고, 자신의 꼬리말을 간단히 올리면 좋을 듯 하네요.
네이버에도 올리고, 야후에도 올리고...
동렬님이 책때문에 맘고생 할 사람도 아닌데, 고생이 많을 듯 하고...
역사적으로 고생하지 않은 스승들이 없으니, 동렬님도 그길을 반복되는 것 같아 내심 위로되면서도 안타깝고...
스승이 고생해야 제자들이 열받아서 스승의 사상을 알리는 심리를 이제 좀 이해할 것 같소.
고생하지 않으면 좋다.
그러나, 반드시 거쳐가야 할 고생이라면 피하지 않겠다.
함께 할 고생이라면 더욱 힘이 난다.
결국 고생 끝에 낙이 반드시 온다.
------------------
[2신]
방금 4만명 가입, 10만명 가입한 교사카페2개, 김광수 경제포럼에 아란도님 글을 퍼 날랐소.
책에 반응은 나중에 전하리다.
오타가 있어서 수정했습니다. 쓸 때는 모르겠는데 나중에 보면 오타가 너무 많습니다. 다 독수리의 비애입니다.^^;
이상우님께서 옆구리를 찔렀으나...그동안 해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실행키를 작동시켜 주신 것이지요.
부족한 글을 이리저리 옮겨주시니 감사...... 책이 잘 나가서 다음 책을 내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상우님한테 옆구리 찔려보고 싶네 ㅎㅎ
통한것이오...통....ㅋㅋ^^
아란도 님은 이미 스스로 옆구리찔렀는데, 내가 확인해서 다시 찔렀소.
아란도님, 멋져부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은 인류의 집단지능 시스템 그 자체다-소통지능은 외부에서 자원을
끌어오는 의사결정능력과 내부에서 이를 통제하는 가치판단능력이며, 구체적으로는 환경과의
교감능력, 사회적인 의사소통, 현장에서의 문제해결 능력으로 존재한다.'
몇 번을 읽어도 기분 좋은 쇠의 차가움(정신바짝!)이 느껴지는 글, 다시 말해 '쭈빗!'^^
저도 소통지능 게시물, 준비중... ^^
스크랩했습니다^^
썼던 댓글과 책의 본문을 인용하여...가을이라서 단감과 함께 올려보았소...
흠 다른 책들 리뷰보다 조금 더 어려웠소...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