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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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1937 vote 0 2012.05.22 (01:10:15)

 

외부의 답과 내부의 답

 

“답은 언제나 외부에 있다.” “반드시 내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모순된다. 둘 다 필자가 여러차례 반복한 내용이다. 이와 관련하여 질문하는 분이 있었는데 하긴 헷갈릴 만도 하다.

 

질은 외부에서 답을 찾고, 입자는 내부에서 답을 찾는다.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한다. 질은 외부와 결합하고 입자는 내부적으로 독립한다. 구단주는 외부에서 히딩크 감독을 데려와야 하고, 감독은 주어진 자원을 가지고 내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 질 – 구단주 (외부)
◎ 입자 – 감독 (내부)

 

넥센은 구단주가 강하다. 이장석 사장은 프로야구 전 경기를 직관한다고 한다. 유일하게 야구를 아는 구단주다. 김성근은 내부에서 답을 내는 감독이다. 외부의 투자나 지원 없이도 상당한 실적을 낸다.

 

장기전은 외부에서 답을 찾고 단기전은 내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대선후보를 정하기 전에는 외부를 보고, 후보가 나서면 내부를 보아야 한다. 시합이 시작되기 전에는 외부에서 답을 찾고, 일단 시합이 시작되면 외부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한다. 사상가의 면모를 버리고 철저하게 선거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

 

정치를 하든 야구를 하든 같다. 초반에는 외부를 잘 엮어내는 사상가가 뜨고 막판에는 내부를 잘 제어하는 기술자가 뜬다. 초반에는 바람이 일어나도록 선동을 잘 해야 하고 막판에는 조직을 잘 챙겨야 한다.

 

외부의 바람만으로 이기겠다거나, 혹은 내부의 조직만으로 이기겠다면 곤란하다. 그러나 실정은 어떤가? 이미 시합이 시작되었는데도, 이미 전투에 돌입했는데도 외부에서의 기적을 바라는 일은 흔히 있다.

 

홍경래는 ‘청나라 대군이 의주에 집결하고 있다’고 떠들며 외부의 지원을 기대하다가 망했다. 광주항쟁 때도 미국항모가 오고 있다는 식의 말이 떠돌았다. 초기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서양선교사의 도움을 꾀하다가 실패했다.

 

독립군은 한때 레닌의 200만 루불을 기다리다가 서로 삥땅했다니 하며 분열했다. 그루지야 등에서도 미국의 지원을 믿고 겁대가리없이 러시아에 대들다가 피떡이 되게 얻어터지기만 했다.

 

장개석이나 베트남 역시 외부의 지원에 목을 매다가 패망했다. 이라크의 쿠르드족이나 팔레스타인도 비슷하다.

 

동학농민항쟁이 실패한 이유는 외부의 지원을 얻지 못하고 철저히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양반집단은 물론 부유한 상인들의 협조도 받지 못했다. 동학군이든 홍경래군이든 포수, 무당, 승려, 광부, 농민의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일본은 동도서기 운운하며 서양의 기술을 빌릴 뿐 내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갑자기 유교주의 운동을 벌였다. 중국 역시 중체서용 운운하며 중국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을 베끼자는 소극적인 책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망했다. 반대로 문화혁명기에는 중국의 전통을 전부 때려부수었다.

 

한국은 어떤가? 친일, 친미파에 친서구파로 전부 외국에 기대려 하고 있다. 그러나 실패한다. 한국의 실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인터넷-스마트 시대는 외부에서 들어온 충격이다.

 

초기 외부와 연결한 다음에는 반드시 내부에 구심점을 세워야 한다. 내부에서 대체재를 제시해야 한다. 한국이 일어서려면 한국 안에서 참된 철학이 나와야 한다. 외국철학은 단지 기존의 잘못된 것을 때려부수는데서 끝내야 한다.

 

개화기로 돌아가자.

 

◎ 실패 - 서양오랑캐를 물리치고 조선왕조를 받들자.
◎ 실패 –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죄다 서양식으로 바꾸자.
◎ 실패 – 서양오랑캐를 이용하여 일본의 전통을 회복하자.
◎ 실패 – 기술은 서양것을 쓰고 정신은 중국것을 지키자.

 

대부분 이런 식으로 망한다.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 내부를 지키려 해도 망하고, 외부의 것을 추종하고 외부의 방식으로 바꾸어도 망하고 이를 적당히 절충해도 망한다. 어느 쪽이든 결말은 망하고 만다.

 

그렇다면 정답은? 외부의 것으로 내부를 치고, 내부에서 혁신한 다음 다시 외부로 전파해야 한다. 무엇인가? 서양기술을 들여와서 조선왕조를 타도하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사상과 철학을 구축한 다음, 다시 이를 외부에 전파해야 한다. 물론 이건 매우 어려운 목표다.

 

지금까지 우리는 외부의 것을 들여와서 내부를 치는데 이용하려고만 했다. 혹은 줏대없이 외국을 추종하려고만 했다. 혹은 서양것을 이용하여 내부를 치고 다시 복고주의로 되돌아가려 했다. 이들은 개혁에 일정한 한계를 둔 것이다. 혹은 기술은 서양식으로 가고 정신은 동양식을 지키는 식으로 절충하려 했다.

 

◎ 국수주의 실패 – 서양을 물리치고 우리 것을 지키세.
◎ 사대주의 실패 – 서양 것을 받아들여 우리도 서구인이 되세.
◎ 부분개혁 실패 – 서양 총으로 막부를 치고 일본 전통을 회복하세.
◎ 절충주의 실패 – 기술은 서양 것을 쓰고, 정신은 중국 것을 쓰세.

 

정답은 서양의 기술로 우리의 상부구조를 치고, 다시 우리 안에서 우리 전통에 기반을 둔 새로운 우리의 질서를 만들어내야 하며, 그것은 복고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하며 과거로 퇴행하는 식이면 실패할 뿐이다. 이러한 구조는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스탈린은 내부를 주장하여 외부를 바라보던 트로츠키를 제압했고, 모택동은 내부에서 뭔가 수를 낸답시고 문화혁명을 일으켰다. 어쨌든 정치적으로는 승리했다.

 

혁명이든 개혁이든 초기 단계에서는 외부의 힘을 끌어들여야 하지만 일정한 단계가 지나면 반드시 내부의 힘으로 바꿔야 한다. 계속 바깥만 쳐다보고 있다가는 외교에는 귀신이라는 이승만처럼 망하고 만다.

 

햇볕정책도 마찬가지다. 외부의 북한과 손을 잡는 것은 가하나 계속 북한을 쳐다보고 있으면 망한다. 이는 이명박도 마찬가지다. 북한과 마찰하는 것도 북한을 이용하는 거다. 계속 북한을 이용하여 수를 내려고 하면 망한다.

 

왜 NL이 PD를 이겼는가? NL은 우리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흥했고, PD는 서구의 힘을 빌리려 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기존의 체제를 때려부수는 데는 서구의 힘을 빌릴 수 있지만,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데는 철저하게 우리의 정신으로 시작해야한다.

 

그러려면 우리의 철학과 정신이 있어야 한다. 이때 복고주의로의 퇴행은 곤란하다. 그러나 현장을 보면 개량한복 입은 진보들이 복고주의로 가고 있다. 개량한복 입어도 좋고, 풍물 배워도 좋고, 귀농운동 해도 좋다. 신토불이도 좋다. 그런데 그게 전부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답을 찾은게 아니다. 그건 헛짓거리다.

 

황토집 짓고, 개량한복 입고, 풍물이나 치며, 청국장 먹으면 그게 진보냐? 뻘짓이다. 그런데 왜?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외부에서 답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근데 말이다. 우리 안에서 답을 찾고자 하니 주사파가 준동한다. 따지자면 주사파 역시 안에서 답을 찾은게 아니다. 그냥 뻘짓이다. 우리 안에서 어떻게든 답을 찾아야 한다는 NL의 큰 방향성은 맞지만, 북한과의 연결은 그냥 뻘짓이다. 북한 역시 외부는 외부이기 때문이다.

 

참된 진보는 외부의 것을 들여와서 기존의 구체제를 타격하고, 다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사상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복고주의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안에서 참된 지도자와 참된 사상이 나와야 한다. 김구 선생이 그러한 모색을 한 사람이다. 한옥 짓고 한복 입는다고 우리의 얼은 아니다. 그냥 뻘짓이다. 한옥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한옥의 진짜 가치를 아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이문열도 고래등같은 한옥을 지어놓고 에헴하고 있더라만 그냥 뻘짓이다. 우리 안에서 세계를 아우르는 보편성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세계를 다 먹겠다는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청국장이나 순두부찌개 따위로 서양인들 앞에서 어색한 웃음을 띠며 그것으로 서구인에게 인정받으려 한다면 곤란하다. 우리 안에서 세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와 문화를 개척해야 한다.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앞서지 않으면 안 된다. 서구가 중심인 상태에서 우리가 그 주변을 차지하며 구색맞추기로 가면 곤란하다. 변두리즘 극복해야 한다.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필자가 말하는 구조와 깨달음은 세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퍼즐조각이다. 레고블럭은 세계 어느나라 아이든 거부하지 않는다. 반면 삼성이 좋아하는 파란색은 blue가 ‘우울하다’는 뜻을 가진다는 서양의 기초상식조차 모르는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으로는 세계를 리드할 수 없다.

 

서양을 배우고, 서양을 알고, 서양의 입맛에 맞추어서는 2등주의를 극복하지 못한다. 진정 앞서려면 무엇보다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파란색은 남자색깔이다. 삼성은 벌써 세계의 반을 버리고 시작하는 거다. 인간에 대한 무지다.

 

우리와 서양이라는 이분법을 극복하고 인간으로 올라서야 한다. 서양을 이용하려 해도 안되고, 서양과 맞싸우려 해도 안 되고, 오직 인간으로 올라가서 탑 포지션을 차지해야 한다. 그것이 이기는 길이다.

 

인류가 원하는건 존엄이다. 존엄이 보편성이다. 우리가 철저하게 존엄을 추구할 때 서구든 동양이든 떠나 세계 모두가 우리를 존경하게 된다. 그럴 때 보편성을 얻고 그럴 때 우리 안에서 세계를 리드하는 질서가 찾아지며 그것이 답이다.

 

답은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 안은 이미 세계이며 인류여야 한다. 동양이나 한국을 주장하면 곤란하다. 우리가 세계의 마음을 갖지 못하면 세계를 아우를 수 없다. 우리가 인류의 마음을 갖지 못하면 인류를 아우를 수 없다.

 

“개고기 먹으면 어때! 흥. 먹는거 가지고 지럴이여.” <- 이딴 식의 유아적인 발상으로는 세계를 아우를 수 없다. 그게 어리광이다. 우리가 세계를 주도하려면 심판의 포지션에 서야 하고 심판은 엄격해야 한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극점을 우리가 먼저 찍고 와야 한다.

 

일본은 원래 막부를 섬기며 서양을 물리치려 했다. 그러다가 신식소총 3천자루를 손에 쥐게 되자,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서 막부를 타도했다. 옛날로 되돌아간다면서 갑자기 유교주의를 제창했다.

 

그들은 갑자기 퇴계의 문하가 되었다. 막부를 섬기다가 돌변하여 이미 식물이 된 왕을 섬기려고 하니 논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어쨌든 일본식 유교주의는 일본 안에서 새로운 철학이 찾아진 듯이 보였다.

 

일본이 잠시 성공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이 잠시 퇴계를 떠받들었던 것은 자기네가 권력을 움켜쥐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그들은 진정한 퇴계의 문하가 아니었다. 그들은 패망했다.

 

이번에는 반유교주의가 되었다. 일본 지식인들에게서 유교주의 폄하를 찾아보기는 쉽다. 그들은 군국주의 시절의 모든 잘못된 것을 퇴계유교의 탓으로 돌린다. 적반하장이 따로없다.

 

어쨌든 일본의 ‘젠 스타일’이 서구에서 상당히 먹히는 것은 동양적 깨달음이 가지는 보편성 때문이다. 깨달음은 동양의 것이 아니다. 회교의 수피즘이나 카톨릭에도 일부 비슷한 것이 있다.

 

서양의 근대철학은 동양의 깨달음을 자기식대로 표절한 것이다. 유교만 남녀차별 하는게 아니고 기독교도 남녀차별 한다. 교회에 여자 목사가 없고 성당에 여자 신부님은 없다.

 

남녀차별은 유교전통이 아니라 단지 후진사회의 봉건적 관습에 불과하다. 진정한 우리 것은 문화에 있고 안목에 있고 스타일에 있다. 서구의 어느 패션디자이너가 한국의 한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사람은 한국의 패션감각이 조선시대보다 후퇴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양복을 버리고 한복을 입어야 하나? 천만에. 한복에서 동서양을 초월하는 첨단 패션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한복이 우리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조선의 철학은 성리학이고 성리학은 유교가 선종불교를 표절한 것이며 선종불교의 미학은 세계에서 가장 앞서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연못도 사각형으로 만들었다. 한옥에도 불필요한 장식을 줄이고 단아하게 했다. 한복에도 그 영향이 반영된 것이다.

 

장식을 금기로 치는 유교의 절제미가 한옥과 한복에 반영된 것이며, 최근의 패션은 모두 유교주의 미학을 표절하고 있으며 이에 홀로 역주행한 김봉남 패션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원래 서양의 복식은 과장된 장식을 위주로 하는 것이다. 현대의 심플한 양식은 동양에서 영향받은 것이다.

 

왜 선비들은 연못을 직사각형으로 만들었는지 생각해야 한다. 사찰의 문살에 있는 장식은 화려하지만 선비들은 이를 거부한다. 미학은 심플해야 한다는 것을 선비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이유가 있어야 하며 이유없는 것은 단 한 치도 허용하지 않는다. 구불구불한 연못은 허용될 수 없다. 선 하나 각도 하나라도 이유없이 있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 것이 선비의 미학이다.

 

가구를 보아도 한국의 고가구는 나무의 결을 살리지만 중국의 고가구는 장식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다. 일본은 모든게 검은색이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일본의 패션과 가구 등은 당나라 때 것이 아직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일본 여인들이 눈썹을 밀어버리고 눈 위에 둥근 가짜눈썹을 그리는 것이나 특이한 머리모양이나 복식은 당나라 시대의 것과 거의 같다. 일본은 천년동안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가 가야 할 참된 길은 스스로 분명하다. 서양의 힘을 빌려 우리의 구체제를 칠 수는 있어도 우리가 서양을 추종해서는 안 된다. 구체제를 타격한 다음에는 우리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이때 복고주의로 가도 안 되고, 절충해도 안 되고, 부분개혁으로 가도 안 된다. 참된 길은 우주왕복선이 지구궤도로 돌입하는 것만큼 어렵다. 바늘같은 틈이 있고 그 틈으로 찌르고 들어와야 한다.

 

어려운 목표지만 그 길로 가야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과 서양, 한국과 외국의 이분법은 극복해야 한다. 동양의 포지션을 버리고 한국의 포지션을 버리고 인간으로 올라서고 존엄으로 올라서야 한다.

 

인류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룰은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존엄이고 이를 반영한 미학이다. 18세기 조선 선비의 미학은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었다.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앞서야 한다. 세계가 우리의 기준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류가 세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일면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일면이 그러할 뿐이며 사람장사 하는 이수만은 결코 우리의 답이 아니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앞서있는 부분은 인간에 대한 태도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미묘한 거리다. 갈곳이 없어 축구장에 몰려있는 영국인이나, 야구장에 가 있는 미국인은 인간 사이의 거리를 잘못 설정한 거다. 그들은 거리를 잘못 설정하여 어색해 하며 이상한 곳에 가 있다.

 

오타쿠나 히키고모리로 짱박힌 일본인이나 우르르 몰려다니며 시끌벅적한 중국인도 답은 아니다. 인류의 진정한 가치는 존엄이며, 그것은 오직 참된 친구에게서만 얻을 수 있고, 이를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설정해야 하며, 그것은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어야 한다.

 

500년만에 발견된 편지만 해도 그렇다. 부부는 '하소체'를 쓰며 서로를 존중한다.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인간을 존중한다. 물론 모든 면에서 그러한 것은 전혀 아니다. 한국인은 서열을 강조하고 약자를 차별한다.

 

그러나 선비의 사교문화나 선비집안의 부부관계는 세계에서 가장 인간존중의 면에서 앞서 있었다. 부부간에 서로 조심하고 친구간에 서로 조심한다. 지금은 드라마에서 남편은 반말하고 부인은 존댓말하는 괴상한 구조로 퇴행했지만 그래도 그 흔적은 남아있다. 한류가 먹히는 이유다.

 

한국인만큼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 앞에서 겸허한 집단은 지구 어디에도 없다. 물론 지금은 이게 잘못되어서 감방 안에서도 나이 가지고 형님, 아우 따지는 뻘짓을 저지르고 있지만.

 

세종대왕은 새로운 화폐제도를 시행하다가 불법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였는데 그 당사자가 자살을 하자 곧바로 법을 폐지했다. 인간존중의 본보기다. 세계 어느나라에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물론 이명박은 천 명이 죽어도 눈도 꿈쩍 않지만. 그래도 한국인의 정신에는 세종의 유전자가 남아있다. 그러다가 문득 빛을 발하기도 한다. 그것이 세계를 매료시킨다.

 

배용준이 일본에서 뜬 이유는 딱 하나다. 여성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따스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헐리우드의 그 어떤 배우에게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눈빛이었다. 이는 유교주의로 훈련된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동서양의 모든 철학은 최후의 단계에서 인간존중, 이를 위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거리, 이를 단번에 해결하는 깨달음, 이를 실생활에 반영하는 문화, 그 문화를 만들어가는 삶의 스타일, 이 다섯가지를 말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에겐 익숙한 거다.

 

 

 

 

 

 

 0.JPG

 

최후의 승자는 좋은 친구를 가진 사람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처럼.. 가까이 있지 않아도 멀리서 지켜봐주는 일천만개의 뜨거운 가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통은 긴밀해지고 에너지는 강렬해지는 그런 마음.

그 마음은 패션과 서재와 자동차와 건물의 디자인에 반영됩니다.

 

서재에 빈 찻잔이 놓여있지 않다면 그 마음은 사라집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처럼 졸부의 화려한 건물은 그 손님이 발을 돌리게 만듭니다.

거들먹거리며 에쿠스 타고 온 손님은 문전에서 쫓겨납니다.

 

작더라도 아이디어와 유머가 있어야 합니다.

일본처럼 까다롭게 격식을 따지며 감시하는 눈길도 곤란합니다.

(일본의 다도는 원래 봉건 영주에게 숨은 인재를 추천하는 용도로 일종의 면접시험임. 벌벌 떨며 차 마시는 것임. 손님이 어떻게 마시는지 주인은 뒤에서 은밀히 감시함.)

중국처럼 시끌벅적한 것도 곤란입니다.

 

조용하고 은근하며 당장은 모르지만

나중에는 우연히 알게되어 그때를 떠올리고

슬며시 미소짓게 되는 그것이 진짜입니다.

 

 

http://gujoron.com




[레벨:2]이심전심

2012.05.22 (08:46:46)

느낌이 있는 좋은 글로 하루를 열게되어 기분 좋습니다. ^^

프로필 이미지 [레벨:6]블루

2012.05.22 (08:58:38)

좋은 영감 얻고 갑니다..

 

...최후의 승자는 좋은 친구를 가진 사람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처럼.. 가까이 있지 않아도 멀리서 지켜봐주는 일천만개의 뜨거운 가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통은 긴밀해지고 에너지는 강렬해지는 그런 마음.

그 마음은 패션과 서재와 자동차와 건물의 디자인에 반영됩니다...

 

어느책,어느 강단에서도 못듣던 좋은말입니다.

몇백권의 철학책보다도 좋은 영감을 주는말입니다.

 

[레벨:30]스마일

2012.05.22 (11:22:59)

전에 모 미술관에 전시된 고려청자부터 조선의 달항아리까지 천년의 세월을 전시해 놓은 것을 봤는데,

그 때의 가슴 먹먹함이 이글에서 전해오는 것 같습니다. 고려청자의 그 화려함이 종국에는 하얀 달 항아리로 끝 날때,

그 흰 여백이 세상에서 그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그 때 느끼고 지금도 달항아리를 보면 심장이 먹먹합니다.

문양 그런거 하나도 없어요. 단지 흰항아리가 그렇게 가슴 울렸던 적이 또 있을까요?

지금도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아요. 화려한 문향이 나중에는 흰 여백이 되는 과정이 어찌나 가슴 울리던지.....

 

제가 시골에서 살아서 항상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한옥의 문의 문살에 어떤 뜻이 있는지 궁금해요.

몬드리안의 직사각형 같은 문살도 있고, 마름모꼴로 얼기설기 해 놓은 것도 있던데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몬드리안의 직사각형도 일정한 비율로 맞추어서 그린 걸로 알고 있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2.05.22 (11:43:00)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략 한자의 이미지라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 일본 중국의 문살이 다르다는 거지요.

중국은 둥근 문에 복잡하고 추상적인 문살을 해놨는데 이건 도교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봅니다.

 

일본은 그냥 대책없는 정사각형인데 미학적으로 황금비례가 아니에요.

일본식 문살은 답답합니다.

 

엑스자 문살도 좋지 않습니다.

엑스자 문살은 가난한 사람의 집에 흔한데 튼튼하긴 하지만 보기에 좋지 않아요.

 

한국은 돌축대를 쌓아도 수직으로 쌓습니다.

요즘 전원주택을 보면 가짜 자연석을 얼기설기 대충 비스듬히 쌓아놓는데

 

사이사이에 철쭉도 심고

조선시대 선비들이 봤다면 싸대기 날립니다.

 

용서할 수 없지요.

곧 죽어도 축대는 수직입니다.

 

마름모형으로 쌓은 축대는 지진에 강해서 일본에 많은데

한국의 성이나 돌담은 곧 죽어도 수평입니다.

 

정사각형은 안되고 엑스자도 안 되며 비스듬해도 안 되고

나무도 궁궐이나 사찰이 아닌 이상 통나무가 아니라 깎아서 써야하고

 

일본이나 독일식으로 너무 가늘어도 안 되고

너무 굵어도 안 됩니다.

 

요즘 전원주택 중에는 통나무 아주 굵은 것을 쓰거나

버섯집이라며 구불구불 괴상한 집을 짓거나

 

괴목 비슷한 구부러진 나무로 탁자를 만들거나 하는데

선비들이 봤다면 싸대기 맞습니다.

 

물론 꼬장꼬장한 선비의 직선이 다는 아니고

곡선도 괜찮지만 곡선으로 세련되게 모양내기는 진짜 어렵습니다.

 

그냥 편하게 둥글둥글 곡선으로 해놓으면

처음 3개월은 보기 좋은데

 

차츰 거지집으로 변해갑니다.

거지의 미학도 있겠지만.

 

 

프로필 이미지 [레벨:3]농담이야

2012.05.22 (11:46:54)

심장이 두근두근 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2.05.22 (11:51:45)

황토_1~1.JPG

 

왼쪽 여불때기 붙은 굵은 통나무 기둥은 최악임.

좋은 집인데 잘나가다가 주인의 수준을 들통낸 삑사리 사건.

 

가난한 시골선비의 세련된 초막을 지으려 하다가

잘못 되어서 거지집을 지어버림.

 

무리하게 굵은 기둥 쓰면 안 되고 반드시 깎은 사각기둥을 써야 함.

 

황.jpg

 

이렇게 무리하게 굵은 기둥을 구부러진걸로 쓰면 처음 석달은 재밌는데

한 1년 지나면 도끼로 뽀개서 장작으로 쓰고 싶은 충동을 일으킴.

 

미를 아는 사람은 절대 이렇게 안 지음.

 

 

황이.jpg

 

깎지 않은 원목을 그냥 쓸라면 이렇게 지어야 함.

딱 좋은 집.

 

첨부
프로필 이미지 [레벨:6]블루

2012.05.22 (13:05:55)

유모가 충만하네요ㅎㅎㅎ

프로필 이미지 [레벨:15]aprilsnow

2012.05.23 (16:15:32)

ㅎㅎㅎ 실제로도 맨아래 외양간이 미학적으로 훨 낫소.

 

위에 두 집.

진짜 토나오게 생겼네. 싸대기 맞아도 싸.

곡선을 가지고 뭘 하고싶다면 저러면 안되지.

진짜 그거 어려운건데, 곡선의 미학적완결성을 추구해야지.  적어도 가우디처럼.

진짜 촌스럽고 조잡해.

 

한옥이랍시고 무조건 자연을 살린답시고

이상야릇 조잡하게 멋부린 집들에 가면

욕지거리가 나오곤 했소.

이제와서 매너리즘도 아니고 뭔짓?

 

한때 유행한 개량한복도 무지 욕했던 적이 있소.

"한복이 거지옷이냐? "

 

절대미, 보편성

한치도 허용않는 미학적인 추구. 이런거 없이  전통 팔아서 거저 묻어가려는 속셈. 

정말 선비들이 보면 치도곤을 치르게 할 일.

 

 

[레벨:2]주유천하

2012.05.23 (08:46:51)

2012년 5월판 국민존엄헌장 입니다.

김공이 계셔서  심히 뿌 -- 듯합니다.

 

일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이런 생각의 고갱이를 거의 완벽하게 글로 일으켜 세우시다니...

휴우 ~ 김동렬공은 귀하디귀한 보배이십니다.  

 

고마운 시간을 담아 보냅니다. *~*

 

[레벨:4]당당

2012.05.23 (15:39:50)

김동렬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일관되어 수미상관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완전하게 할 수는 없지요.

추진의 방향성은 가지되

부족하더라도 어느 하나를 먼저 할 수밖에 없지요.


외부의 힘을 빌려도 되고

복고주의도 되고

민족주의도 되고

절충주의도 됩니다.


그렇게에 일단 움직여야 됩니다.

그리고 차례로 문제가 생기고 적절한 대안을 찾아야지요.

완전하게 될때까지 기다렸다가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그 사이에 새로운 문제가 생기거나 상황이 바뀔 수 있지요.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유연성입니다.

소련이 70년만에 망하고

일본이 미군정이후체제 60년만에 엉망진창이되고

한국이 미군정이후체제 70년만에 비빔짜장이 되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그때그때마다 최적의 방향으로 개혁하는 것이 제일 낫다고 봅니다.


절대적인 해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해답은 유연성입니다.

필요할 때 대안을 내는 것.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유연성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망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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