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의 소설 만다라에 소개되는 병 안의 새 화두를 떠올릴 수 있다. 유리병 안에 갇힌 새가 점차 자라서 입구보다 몸집이 커졌다. 병을 깨뜨리지 않고 새를 꺼낼 수 있을까? 당연히 꺼낼 수 없다. 없어야 한다. 그래야 큰스님의 체면이 서는 것이다. 동자 스님이 쉽게 새를 꺼내버리면 누가 이 똥 같은 화두를 만들었어? 하고 힐난이 들어올 판이다. 통제불가능성이다. 사람들이 이런 거 좋아한다. 그런데 우습지 않나? 이런 거 좋아하는 그 얄팍한 심리 말이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당연히 닭이 먼저다. 알이 먼저라고 우기는 사람은 일단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알은 어미가 품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깨어나지 않는다. 이건 3초 안에 알 수 있다.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다른 의도가 있다. 통제불가능성이다. 밑도 끝도 없는 이런 거 좋아한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다. 저의를 숨기고 있다. 닭은 여성이고 알은 그 여성이 임신한 태아다. 누구에게 태아에 대한 통제권이 있는가? 닭이 먼저라는 말은 임신한 여성에게 태아에 대한 통제권이 있다는 말이고, 알이 먼저라는 말은 그 알을 점지해준 하느님에게 통제권이 있다는 말이니 교활한 속임수를 쓴 거다. 하느님이라고 둘러치는 수법을 쓰지만, 사실은 그룹의 지배자인 목사에게 의사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집안의 가부장에게 권리가 있고 국가의 정권을 쥔 자들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말이다. 천박한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달걀먼저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매우 패야 한다. 그들은 저의를 숨기고 나쁜 일을 벌이며 모권을 훼손하고 여성을 차별하는 자들이라 하겠다. 뉴턴이 말했듯이 물질은 단단하여 관통할 수 없고 나눌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지배자의 체면이 선다. 자기 권력이 산다. 왜? 혹시 누가 뒤로 물질을 잘못 건드려서 관통시켜 버리면 졸지에 우주가 무너질지도 모르잖아.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이 되어 밤잠을 이룰 수가 없잖아. 신을 내세워서 인간들을 제압하고 날로 군기를 잡으며 조져대는 의미가 없잖아. 사실이지 그런 골칫거리들을 떠넘길 의도로 신을 세우는 것이다. 권력자는 통제불가능성에서 파고들 집단의 약한고리를 발견한다. 오직 신만이 물질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물질을 통제하려고 덤빈다면 건방진 행동이다. 만약 김정은이 지하벙커에 비밀실험실을 차려놓고 물질을 관통시키는 실험에 성공하여 마침내 우주를 통째 인질로 잡아버린다면? 지구를 블랙홀로 만들어버리겠다고 위협한다면?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참수부대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야 하나? 그런 곤란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신의 건축재료인 피조물은 관통되지 않는 단단한 것이어야 한다. 메타포가 있으니 물질은 관통할 수 없어야 하며 인간은 얌전해야 하며 개기는 놈들은 신에게 대드는 무엄한 자들이니 손을 봐줘야 한다. 이는 뉴턴의 썩은 관점이다. 뉴턴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17세기 당시는 워낙 시대가 그런 시대였다. 군기 잡는 시대였다. 군기를 잘 잡는 나라가 흥했다. 작은 섬나라 영국이 제 몸집보다 몇백 배나 되는 거대한 식민지를 지배하려면 절대강자의 지배논리가 필요했던 거다. 뉴턴 역시 어두운 권위주의 시대의 부역자였으니 이후 인간은 수백 년간 헷갈리게 되었다. 무無와 허虛와 비非와 불不과 같은 부정적 어휘를 앞세우는 자들은 언제라도 인간을 제압하고 지배하려는 불순한 저의를 숨기고 있다. 바로 노자의 무리가 그러하다. 인간을 볏짚으로 만든 풀강아지로 본다는 도덕경의 논리는 독재자를 위한 맞춤논리가 된다. 타락한 권력에 도전하려는 민중을 무無로 막고, 허虛로 조지고, 비非로 쳐부수고, 불不로 찍어낸다. 오늘날 썩은 노자를 추종하는 무리가 지구에 가득하니 탄식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자의 인지의신예로 낱낱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이 악을 이겨야 하고 진보가 보수를 이겨야 한다. 닭이 알을 이겨야 하고 산모가 태아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중립을 주장하는 자도 있지만 선과 악 사이에서 중립은 악의 편이다. 강자와 약자 사이에 중립은 강자편이다. 닭과 달걀 중에 어느 쪽도 이기지 못하도록 교착시켜놓고 낄낄거린다. 제가 못 먹는 곶감을 남이 손대는 꼴을 못 봐주겠다는 심술이다. 여우의 신포도라 하겠다. 그들은 혹시 누가 몰래 우주를 건드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비겁자들이다.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깨닫지 못하면 주춧돌에 대가리 박고 죽겠다는 비장한 결의가 있어야 한다. 왜 사느냐 생각해봐야 한다.
당연히 닭이 알보다 먼저다. 동動이 정靜보다 먼저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닭은 전체고 달걀은 부분이다. 닭에 있고 알에 없는 것은 에너지다. 질서다. 통제가능성이다. 숨은 매개변수 하나가 더 있으니 벡터와 스칼라의 차이다. 그것은 굉장한 것이다. 대단한 것이 닭에 있고 알에 없으니 닭은 능동이요 알은 수동이라 언제라도 능동이 수동에 앞서는 것이다.
사건은 기승전결의 진행하는 순서가 있으며 이 순서는 에너지 준위의 순서라 결이 다르고 층위가 다르니 엔트로피에 의해 언제나 일방향성을 가질 뿐 그 역은 우주 안에 절대로 없다. 알은 결코 스스로 닭이 되지 못하며 간혹 스스로 깨어나는 알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이미 알 속에서 깨어나 있는데 사람이 껍질 속의 사정을 모르고 착각한 것일 뿐이다. 세상과의 상호작용을 시작한 시점에 이미 닭은 깨어나 있다. 당연히 창이 방패보다 먼저다. 창 나고 방패 났지 방패 나고 창 났겠는가? 원시인이 돌창을 던졌을 때 돌방패는 없었다. 창은 언제라도 방패를 뚫을 수 있다. 방패는 절대로 창을 온전히 막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방패를 뚫는 창과 모든 창을 막는 방패가 대결하면 당연히 창이 방패를 이기니 선빵필승이다. 창은 선수를 바꿀 수 있지만 방패는 선수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창을 더 힘센 사람이 와서 더 세게 던지면 된다. 방패는 그냥 세워놓는 것이니 운용할 자체 에너지가 없다. 그러므로 모순은 결코 모순이 아니며 단지 모순적인 거다. 진실을 말하자.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모르는 것이다. 언제라도 창이 먼저이고, 공자가 먼저이고, 전략이 먼저이고, 닭이 먼저이고, 오자병법이 먼저이고, 공화주의가 먼저이고, 상부구조가 먼저다. 에너지가 물질에 앞서는 것이며 물질은 양자역학에 의해 언제라도 관통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방패는 따르고, 노자는 따르며, 전술은 따르고, 달걀은 따르고, 손자병법은 따르고, 자유주의는 따르고, 하부구조는 따른다. 질서가 있다. 에너지에 의해 만유는 통제된다. 사건은 머리와 꼬리가 있으니 머리가 꼬리를 이끌 뿐 꼬리가 머리를 앞지를 수 없다. 에너지의 공급원을 장악한 쪽이 머리가 되고 의사결정을 하는 쪽이 머리가 되니 설계가 머리라면 시공은 꼬리다. 별수 없는 기독교 신도인 뉴턴은 물질을 창이 아닌 방패로 보았다. 닭이 아닌 알로 보았다. 설계가 아닌 시공으로 보았다. 그럼 설계는 누가 하는가? 하느님이 한다. 뉴턴이 물질을 제한하여 닫아걸고 좁혀놓은 것은 신의 활동공간을 열어주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던 것이다. 다시 김성동의 만다라로 돌아가자. 진실을 말하자. 누구도 병 안의 새를 꺼낼 수 없다는 통제불가능성으로 제자들을 옴쭉달싹 못하게 묶어놓고 그 수법으로 능히 제자들을 통제하여 보이는 통제가능성이 제시된다. 병 안에 갇힌 새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제자들의 한계요 그 새를 꺼내는 것은 그러한 통제불가능성을 이용하여 제자를 통제하는 스승의 방법이라 하겠다. 그렇다. 제자는 병 안에서 제 발로 걸어 나오지 못하지만 바로 그러한 맹점을 이용하여 스승은 능히 제자를 통제하고 제압하는 데 성공하니 병 안의 새는 이미 훌륭하게 밖으로 걸어 나와버린 것이다. 부분에서의 통제불가능성이 오히려 전체에서의 통제가능성으로 도약한다. 노자의 무無와 허虛와 비非와 불不은 공자의 인지의신예로 도약한다. 량은 운동을 이기지 못하고 운동은 힘을 이기지 못하며 힘은 입자를 이기지 못하므로 오히려 질은 입자와 힘과 운동과 량을 통제한다. 그러므로 천하는 능히 다스려진다. 하수는 고수를 꺾지 못하나 고수는 하수를 꺾는다. 결은 전을 꺾지 못하고 전은 승을 꺾지 못하고 승은 기를 꺾지 못하나 기는 승을 꺾고 승은 전을 꺾고 전은 결을 꺾는다. 결과는 원인을 꺾지 못하나 원인은 언제라도 결과를 디자인하는 데 성공한다. 결말이 시작을 통제하지 못하나 시작은 결말을 통제한다. 똥이 밥을 결정하지 못하나 밥은 똥을 결정한다. 닭이 먼저다. 새는 탈출해 있다. 사람들은 다양성에 환호한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누가 담벼락을 뚫고 몰래 내 집에 침입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막아야 한다. 무無와 허虛와 비非와 불不이 쓰인다. 점차 부정적 사고에 길들어 얌전한 바보가 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뚜렷한 질서가 있으니 엄격하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암컷 아니면 수컷이니 제3의 성은 없다. 동성애자는 제3의 성이 아니라 암수가 바뀌거나 혹은 섞인 것이다. 모든 생물은 유전자 방법을 쓰니 그 밖의 또 다른 수법을 쓰는 생물은 없다. 우주는 일원적으로 통제된다. 기승전결로 통제된다. 엔트로피의 비가역성으로 통제된다. 우주 외에 또 다른 무엇은 없으며, 에너지 외에 또 다른 무엇은 없으며, 진리 외에 또 다른 무엇은 없으며, 1+1=2가 아닌 다른 숫자가 답이 되는 또 다른 수학 같은 건 없다. 뒤로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말라. 비겁함을 들키지 말라. 제압하고 조지고 통제할 의도로 꼼수를 쓰지 말라. 교착시켜놓고 낄낄대려고 하지 말라. 하수에게나 먹힐 뿐 임자 만나면 바로 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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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에서는 "닭"이 먼저라고 주장하고,
오히려 진화론자가 "알"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를테면, 조류보다 어류가 먼저였고, 어류는 이미 알을 낳고 있었다.
즉 알이라는 것이 닭이라는 것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것이지요.
진화론에 따르면 유전자에 의해서 종이 결정되는데, 최초의 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그 어미의 몸속에서 유전자의 형태로 합성되어 알로 세상에 나왔다가 부화되었다고 할 수도 있고요. 최초 닭의 어미를 닭이라고 한다면 언어적으로 모순되니까 최초의 닭은 알의 형태로 세상에 출현했다는 것도 말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만약 창조자가 있다면 그는 온 세상의 최종점을 미리 마음속으로 계획하고(최후의 결과를 알고) 최초의 원인을 일으켰을 겁니다.
닭은 알의 다음 단계이니, 창조자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닭이 알보다 선행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인과에서는 닭알이 먼저이고, 닭은 닭이 아닌 어미의 보살핌으로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알은 닭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수단에 불과하므로, 닭이 먼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창조론에서는 창조자가 닭을 먼저 종류대로 창조했다고 하고요.
아주 지엽적인 문제이지만, 재미 있는 논점이기에 거론해 봤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건 보편적인 판단기준을 세우는 문제입니다.
억지 말 가져다 붙이기 게임을 한다면 엉뚱한 겁니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데 말장난을 들고 나오면 피곤한 거죠.
알과 닭을 구분하면 이미 틀려버린 것이며 존재론적으로는 불가분입니다.
이런 것을 판단할 때는 무엇보다 절대기준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며 엔트로피의 법칙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닭이 알에 앞서는게 아니라 닭은 있고 알은 없습니다.
닭이냐 알이냐 하는 말은 닭과 알은 별개의 존재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갑니다.
홍길동도 있고 홍길동의 궁둥이도 별도로 있는게 아니라
홍길동의 궁둥이는 홍길동에 속하므로 별도의 존재가 아니며
홍길동의 궁둥이라는 것은 존재가 없으므로 논의대상이 아닙니다.
부분은 전체에 포함되므로 비교판단되는 논의대상이 아닙니다.
부분은 다른 부분과 비교될때만 논의대상이 됩니다.
닭걀은 오리알과 비교될때만 존재가 되는 것이며
닭과 비교될 때는 독립적인 존재자가 아닙니다.
달걀은 일단 존재가 아니므로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지한 명제를 제시하셨는데 제가 말꼬리 잡는 꼴이 되었군요.
아, 알은 닭의 한 존재 형태에 불과하니까 닭과 따로 논할 수 없다는 거군요.
사실 달걀도 닭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동렬님께서는 원인과 목적 중에서 언제나 원인의 입장에서 서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목적론은 말장난에 불과하고,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는 입장이신 것으로 앎니다.
오직 원인론에 의해서 사건의 궁극적인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죠.
결과는 인과의 연쇄에 따라 원인을 알면 조작할 수 있는 것이므로, 과학적 입장에 서고자 한다면 원인을 통해서 사건경과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런건 논리학이 해결해야 하는데
인류의 논리학 수준이 개차반이라 해결이 안 됩니다.
논리학이 개차반인 이유는 그동안 구조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건 범주구분의 문제라 하겠는데
구조론은 의사결정단위가 존재단위가 된다는 명확한 구분기준을 제시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구조론을 안 배웠기 때문에 관측자의 관측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닭이 의사결정을 했다. - 닭이 존재한다.
달걀은 의사결정을 하지 않았다. - 달걀은 존재하지 않는다. 달걀은 닭에 의속하며 별도의 존재자가 아니다.
이게 구조론의 존재론적 구분기준이고
보통 사람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개입시켜 인식론 곧 관념론으로 가는데
내가 닭을 보았다. - 닭이 존재한다.
내가 달걀을 보았다. - 달걀이 존재한다.
내 입장을 가지고 말하므로 뭐가 먼저고 나중인지는 내마음이죠.
내가 닭을 먼저 보면 닭이 먼저고 내가 달걀을 먼저 보면 달걀이 먼저고
하느님이 달걀을 먼저 만들면 달걀이 먼저고
하느님이 닭을 먼저 만들면 닭이 먼저고.
흔히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면
뭘 따져!
알 수 없는 것이 있는게 삶의 아이러니야~
불어로 세라비~
하고 읊조리며 갈무리 하기도 한다
나에게 인상에 남았던 책 중의 하나는
가토다이조가 지은 '착한아이의 비극'이 있다
에리히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도 있지만
최악의 집중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 읽어내지 못했다
이렇듯 나의 마음을 당기는 주제는
내가 들어가있는 나의 삶이다
그 누구나 상부구조에는 나의 삶이
자리를 잡고있지 않을까?
세상과 짝을 이루고 대칭하리라
정하는 것도 내가 결정하고
반응하는 것이다
물론 나의 자율과 상관없이
내가 호응해야만 하는 하나의 길이
있을 때도 있다
자율과 정해진 하나의 길의 균형을
잡는 것이 삶의 기술인듯 하다
어찌하였건 동렬선생님의 글에서
세상의 군기문화 권위주의 문화,
무와 허와 비와 불의 부정적인 어휘를
앞세우며 통제하려는 문화는
우리를 꼭두각시로 교육하려는 음모가
담겨있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런 화두를 지나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의 많은 시간들을 투자해서
사색해내시고 세상에 내어놓는
동렬선생님의 그 노고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