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동영상 강의 해설입니다.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는 하나다. 짝짓기에 따라 둘로 나눠졌더라도 ‘일’에 의해서 다시 하나로 통합된다. 그러므로 하나로 이야기해야 한다. 하나로 이야기하면 답은 연역이다.
연역은 진리의 파악이다. 귀납은? 연역의 하부구조다. 귀납은 체계적 인식이 아니다. 귀납은 낮은 단계의 불완전한 연역, 혹은 연역을 위한 소스제공이다. 인간의 인식은 백퍼센트 연역을 위주로 한다.
‘1+1=2’를 알면 ‘2+3=5’는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이것이 연역이다. 만약 그것까지 일일이 알려주고 있다면 귀납이다. 만약 그런 식이라면 미처 셈을 깨우치지 못한 것이다.
만약 귀납하고 있다면 실로 아는게 아니라 모르는 거다. 암기위주로 답을 외워서 찍었다면 시험은 어떻게 통과되었는지 몰라도, 이건 시험제도의 실패이지 인식은 아니다. 응용할 수 없는 죽은 지식이다.
인식에는 연역과 귀납이 있지 않다. 완전한 연역과 불완전한 연역이 있을 뿐이다. 연역은 하나의 논리툴에 따라 한 덩어리로 모듈화 된, 체계있는 인식이다. 포지션이 맞는 통짜덩어리 인식이다.
인식은 원인과 결과로 짝지어서 세팅된다. 포지션이 갖추어져 있다. 귀납은 일정한 체계가 없다. 부스러기 파편들의 무질서한 집합이다. 덜 갖추어진 인식이다. 인식으로 발달할 수 있는 소스들이다.
● 연역 - 사과는 사과나무의 열매이다.(원인과 결과의 짝짓기 세팅) ● 귀납 - 사과밭, 애플잼, 사과파이, 스티브 잡스?(연상되는 기억의 파편들)
인식을 연역과 귀납으로 나누는 이유는 여러 불완전한 연역이 모여서 제대로 된 연역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연역만이 올바른 인식이며 귀납은 장차 연역으로의 발달을 가능케 하는 쓸모있는 소스다.
무릇 안다는 것은 ‘존재를 안다’는 것이며, 이는 존재 그 자체가 나아가는 길을 안다는 것이다. 길은 에너지의 길이다. 에너지의 길은 도(道)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간다. 水+去=법(法)이다.
물이 가는 길이 일정하므로 그 힘을 이용하여 수력발전이 가능하다. 에너지는 가는 길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 절대경로와 상대경로가 있다. 절대경로는 존재의 족보다. 개체의 발생과정을 따라간다.
절대경로는 공장에서 자동차가 제작되는 과정이다. 상대경로는 짝짓기다. 그 자동차를 누가 운전하는가이다. 절대경로는 하나지만 상대경로는 여럿이다. 귀납은 상대경로에 빠져 길을 못 찾아 실패다.
엄밀히 말하면 인식은 모두 연역이며, 귀납은 낮은 단계의 연역이다. 높은 단계로 올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상대경로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는 인식툴인 인과율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인식은 근본 인과율에 의존한다. 원인과 결과의 짝짓기 방법으로 지식을 포드시스템으로 대량생산한다. 원인과 결과를 따져서 길을 찾는데 원인은 에너지가 들어오는 쪽이어야 한다.
어리석은 인간은 그 점을 보지 않고 막연히 포지션만 채우면 된다고 믿는다. 사과가 왜 떨어지지? 무거우니까. 아하 그렇구나. 전혀 답을 알아낸 것이 아니지만 무려 답을 알았다고 믿는다.
내부에 에너지가 유도되든 말든, 원인이 가야할 자리에 아무러나 하나가 위치해 있기만 하면 그것을 원인으로 친다. ‘거시기’와 비슷하다. 그 자리에 아무 단어나 위치해 있기만 하면 의사가 통한다.
인간이 연역을 못하는 이유는 근본 뇌가 연역을 못하도록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뇌의 활동은 패턴을 감지하는 것인데, 귀납적 패턴은 잘 수집한다. 연역적 패턴은 뇌가 매우 거부한다.
더구나 이름이 붙여져 있지 않아서 입수된 패턴도 조직하지 못한다. 왜 인간의 뇌는 연역적 사고를 거부하는가? 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니다. 아기 때는 잘 한다. 그러므로 언어도 쉽게 배운다.
나이가 들수록 연역적 사고를 거부한다. 포지셔닝 원리 때문이다. 그 자리에 어떤 정보가 위치해 있기만 하면, 맞는지 틀렸는지 검토하지 않고 그냥 쓴다. 그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연역적 사고는 뇌사용에 있어서 비효율적이다. 귀납적 사고는 효율적이다. 연역은 뇌가 더 많은 산소와 당을 소비한다. 연역할 때는 여러 실행프로그램을 중지시켜야 하므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연역은 고도의 긴장을 유발하므로 쾌감과 스트레스를 동시에 유발하며 여타 실행프로그램을 중단시키므로 자원을 낭비하고 비효율적이다. 더구나 뇌의 전체를 사용하므로 의사결정이 늦어진다.
정글에서의 생존경쟁에서는 치명적이다. 귀납적 판단이 효율적이고 빠르기 때문에 인간은 귀납한다. 문제는 귀납이 오류를 유발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은 대부분 재탕이므로 상관없다.
고도의 심오한 판단을 하지 않으면 된다. 어렵고 중요한 판단은 시간과 자원을 소비하더라도 연역해서 올바른 판단을 해야하지만 쉽고 가벼운 판단은 귀납해서 신속한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동물의 뇌는 발달하지 않도록 진화했다. 인간의 뇌가 진화한 것은 예외적인 경우다. 만약 뇌의 진화를 막는 시스템이 없었다면, 모든 동물이 천재가 되어 지구 생태계는 곤란해졌을 것이다.
인간만큼 지구에 해로운 존재가 있던가? 동물의 유전체계 내에 뇌의 진화를 막는 프로그램이 있고, 그 때문에 인간의 뇌만 진화한 것이다. 그러한 뇌의 진화는 인간의 생존에 크게 불리하다.
지구에 인류의 조상이 출현하고 600만년 동안 인간은 생태계에서 가장 미약한 동물이었다. 심한 경우 1000개체 안팎의 숫자로 감소되어 멸종직전의 절망적인 상태에 도달해 있기도 했다.
600만년 동안 중남부 아프리카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2만년 전에 갑자기 세력확장을 시작하여 몇 천년 사이에 생태계 태반을 파괴했다. 도처에서 인간의 발길이 닿자말자 종이 멸종하곤 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연역한다. 인간의 창의적인 생각은 거의 백퍼센트 연역이다. 그러나 같은 생각을 반복하게 되면서 점점 귀납으로 변한다. 귀납의 이로운 점은 운동능력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타자가 투수의 공을 친다면 어떨까? 처음 한번은 관련된 뇌세포 전체가 작동하여 연역적으로 공을 친다. 그러나 연습할수록 거기에 관계하는 뇌세포의 수가 감소한다. 그래야 홈런이 나온다.
뇌 안에서 일어나는 뇌세포들의 생존경쟁을 이해해야 한다. 반복연습에 의해 특정 뇌세포가 탑포지션을 장악하면 뇌는 의도적으로 다른 세포의 개입을 차단한다. 시냅스가 끊어지는 것이다.
원활하고 빠른 의사결정이 일어난다. 그래야 홈런이다. 반대로 많은 뇌세포들이 참견하여 생존경쟁을 벌이면 연속삼진이다. 뇌의 진화는 신속한 의사결정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매우 해로운 것이다.
물고기를 잡되 처음엔 그물로 몰아서 잡는다. 이것이 연역적 방법이다. 연습을 거듭 하면 할수록 작살로 한놈만 찔러 잡게 되는데 이것이 귀납이다. 연역의 그물을 쓴다면 많은 어부가 동원된다.
목표하지 않은 다른 물고기도 같이 잡힌다. 비효율적이다. 귀납의 작살을 쓴다면 최소의 노동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다. 원샷 원킬이다. 인간은 연역해서 상황파악을 한 다음 귀납해서 적응한다.
처음부터 귀납할 수 없다. 처음에는 큰 그물을 사용하여 온갖 고기를 다잡은 다음 거기서 목표로 삼은 참치 한 마리를 골라내야 한다. 참치에 대한 정보를 알아낸 다음에는 작살로 잡을 수 있다.
선연역 후귀납으로 되는 것이며, 처음부터 귀납하고자 하면 실패하게 된다. 처음에는 연역으로 어떻게든 인식을 성공시키고, 다음에는 귀납으로 방법을 전환하여 효율을 증대하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나이다. 인간은 백살까지 상당히 오래 산다. 선연역 후귀납으로 갈 경우 나이를 먹을수록 지식이 증가해야 하는데 그 반대로 된다. 15살에 정해진 바운더리 밖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15살까지만 연역하고 그 이후로는 귀납만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완고해져서 고집불통이 된다. 맨 처음 그물로 잡았을 때 잡아보지 못한 고기는 끝내 잡지 못한다. 스케일이 결정되어 버린다.
연역은 처음 상황을 파악하고 환경설정을 해주는 것이다. 처음에 파악한 상황의 수준 이상으로 높아지지 않는다. 애초에 낮은 단계에서 시작했다면 인식은 더욱 더 낮아질 뿐이다. 인식의 퇴행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 중에서 처음 ‘운동’으로 시작했다면 양으로 내려가고 그 이상의 단계는 올라가지 않는다. 운동에서 양으로 전개하는 것도 연역이다. 다만 낮은 단계의 연역인 것이다.
아기 오리는 맨 처음 본 것을 엄마로 믿는다. 각인효과다. 그건 연역이다. 문제는 오류시정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때부터 그것 하나만 따라다닌다. 개를 엄마로 알고 따라다니는 송아지도 있다.
두번 다시 상황파악을 하지 않고 오류시정을 하지 않는 것이 귀납의 문제다. 왜냐하면 그게 생존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연역은 생애 딱 한번이다. 첫 사랑, 첫 수업, 첫 등장 뿐이다. 이후는 귀납만 한다.
군대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점호를 한다. 이게 일종의 연역이다, 제일 짜증나는 일이다. 그런데 이걸 왜 하지? 안해도 되는 일인데? 일석점호는 불필요한 행사다. 베테랑 병사들에게는 그런거 없다.
군대는 전쟁에 이기려고 어쩔 수 없이 연역을 하는 것이며, 사회에서는 대부분 연역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망가진다. 매번 연역한다면 수시로 점호를 하는 것과 같아서 귀찮다. 에너지 낭비다.
대충 밥먹고 사는데는 연역이 필요없다. 그래서 인류 모두가 연역을 하지 않으면? 인류는 붕괴되고 만다. 적이 나타났다. 부대 전체에 비상이 걸린다. 10만 대군이 적군 병사 하나 때문에 난리를 친다.
아군끼리 오발해서 죽고 다친다. 그것이 연역이다. 연역은 최악의 낭비적 뇌사용이다. 똑같은 적이 반복하여 계속 나타나면? 비상은 걸리지 않는다. 베테랑이 혼자 나가서 조용히 적을 사살하고 온다.
이 상황이 계속되면? 10만대군이 쳐들어오는데도 베테랑 혼자 싸우러 간다. 보초를 세우지 않아 부대가 전멸한다. 연역은 자원의 낭비지만 그 낭비적인 연역을 계속해야 전쟁에서 승리한다.
오늘날 휴전선에서 적군이 침략해 오지 않았는데도 부지런히 전방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 연역이다. 연역은 단지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타자가 야구공을 치는 것도 같다.
처음에는 10만 뇌세포들이 총출동하여 호들갑을 떠는데 공은 맞히지도 못한다. 뇌세포간 의사소통 지연으로 뇌의 의사결정이 늦어지기 때문이다. 뇌세포가 많이 참견해서 오히려 공을 맞히지 못한다.
연습하면 나중에는 베테랑 뇌세포 하나가 전담해서 홈런을 양산한다. 다른 뇌세포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이것이 귀납이다. 인간은 훈련하여 귀납으로 치닫는 것이다. 아기 때는 누구나 연역을 한다.
아기들은 누구나 천재다. 7살 꼬마라면 공룡이름 30가지는 기본으로 외고 있다. 나이가 들면 보수꼴통으로 변하는 것은 뇌사용 기피 현상이다. 인간은 원래 연역을 기피하도록 세팅되어 있다.
그럼에도 인류가 살아내기에 성공하는 것은 집단지능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홀로 연역하는 리더가 있기 때문이다. 연역하는 자가 끝내 경쟁에서 이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역해야 한다.
인간이 연역하는 이유는 첫째 특정 조건에서 연역이 경쟁에서 이기기 때문이다. 둘째 어린이는 연역이 주는 쾌감을 쫓아 연역하기 때문이다. 셋째 처음 맞닥들이는 일은 연역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연역하지 않는 이유는 첫째 어른이 되면 어린이의 쾌감이 없어지고 대신 고도의 긴장을 유발하여 스트레스를 낳기 때문이다.. 둘째 단순한 일처리는 귀납이 더 쉽고 빠르기 때문이다.
셋째 같은 일을 반복할 때 연역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같은 만화를 열 번씩 봐도 쾌감을 느끼지만 어른은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 어른들은 코미디를 봐도 잘 웃지 않는다.
단순한 일이라면 귀납이 더 유리하지만, 리더는 연역을 해야 한다. 미래를 생각한다면 연역을 해야한다. 의식적으로 연역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의도적으로 연역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럴 때 뇌에서 많은 엔돌핀이 분비되어 똥꼬가 뻑적지근한 쾌감을 맛보게 된다. 어린이가 열심히 말을 배우는 것은 쾌감 때문이다. 어린이의 연역은 빈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자동이다.
어른의 연역은 물이 가득찬 스펀지를 짜내고 다시 물을 채우는 일이라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의도적인 훈련이 아니면 실패한다. 어른은 뇌 속이 지저분해져 있기 때문에 연역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컴퓨터도 오래 사용하면 하드디스크가 지저분해진다. 인간의 뇌도 각종 소스들로 뒤죽박죽이 되어 있기 때문에 뇌를 다시 세팅하는 툴을 가동하지 않으면 연역은 스트레스를 유발할 뿐 실패한다.
툴을 사용하여 지저분해진 뇌 속을 깨끗하게 정리해주는 것이 깨달음이다. 연역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더 쉽게 전혀 스트레스 없이 고도의 각성된 긴장상태에 돌입할 수 있게 된다.
보통은 분노가 인간을 긴장하게 한다. 그러므로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할 줄 아는 자가 연역할 수 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누구나 연역적 사고를 한다. 그래서 천재지변에는 인간이 착해진다.
사랑도 뇌와 마음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는 점에서 강한 스트레스다. 사랑할 때 몰입할 때 인간은 연역적 사고를 한다. 그래서 깨달음과 사랑은 뇌의 작동이 비슷하다. 사랑하면 살 빠진다.
연역은 점호와 같다. 정신차리는 것이다. 지나가다 바퀴벌레 한 마리를 보았대도 맨 위의 하느님부터 밑바닥 바퀴벌레까지 점호를 불러보는 것이다. 만리장성 팔달령 구간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듯이.
기점이 되는 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우주를 찾고, 지구를 찾고, 지구역사 50억년 안에서 그 바퀴벌레의 위치를 파악해 본다. 바퀴벌레는 내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시공간적 한 지점에 있다.
안다는 것은 그냥 어떤 대상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전체 안에서 그것의 위치를 아는 것이다. 그래야 지식을 복제할 수 있다. 지식을 낳는 지식이 진짜 지식이다. 연역이 진짜고 귀납은 소스다.
물론 소스도 중요하다. 귀납의 신속성과 효율성도 중요하다. 문제는 귀납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연역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낮은 단계의 엉터리 연역을 함부로 한다.
A가 죽었다. B도 죽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두 죽는다? 이것이 귀납이다? 천만에. 이 사람은 이미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모두 죽기 때문에 죽음이며 어떤 것만 죽는다면 죽음이 아니다.
천년을 사는 고목도 세포 단위로 보면 매우 죽었다. 살아있는 건 손자들이다. 백살을 사는 인간도 아침에 깨어나 저녁에 죽는다. 일년은 해마다 죽고 달은 다달이 죽고 날은 나날이, 시는 수시로 죽는다.
보편적인 죽음을 이해했다는 점에서 이미 연역했다. 시작과 끝, 삶과 죽음은 같은 세트다. 귀납적 사고라는건 대부분 낮은 단계의 연역이다. 개별사실을 추론하여 보편진리를 찾는게 아니다.
보편진리를 아는 사람이 개별사실을 이미 알고있는 보편진리와 짝짓는 것이다. 원래부터 보편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귀납하려 해도 실패한다. 동물은 아무리 귀납해도 지식이 증가되지 않는다.
인간은 젊었을 때 해둔 연역 덕분에 그 연역의 울타리 안에서 귀납에 성공하는 것이며, 동물은 해둔 연역이 없기 때문에 귀납이 불성립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적 성장은 대개 15살에 멈춘다.
15살 이후는 양적 증가에 불과하다. 사고의 수준, 안목의 깊이는 조금도 틔워지지 않는다. 15살 이후에 그것을 해내려면 툴을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구조론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자유에 대해서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는 것이 구조론이다. 형식이 부실한 상황에서 콘텐츠 확보는 불성립이다. 사상누각이 된다. 진보주의는 콘텐츠다. 내용이다. 왜 실패하는가? 형식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정치의 출발점은 자유주의다. 자유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부르조아 계급이 하층계급을 착취하는 자유를 의미한다. 그래서 보수주의가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 지점을 면밀하게 관찰하여야 한다.
자유는 뿌리다. 거기서 진도를 더 나가는게 진보주의다. 자유에 머물러 있는 것이 보수다. 한국의 문제는 뿌리가 부실하다는데 있다. 자유 그 자체에 있어서 철저하지 않다. 한국에 자유가 없다.
노예주들과 자발적 노예가 득시글하다. 그러므로 정치가 출범하지 않는다. 정치는 먼저 자유를 주고 다음 그 자유를 제어하는 것이다. 자유는 1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정치는 2가 1을 견제하는 것이다.
정치는 작당이고 작당은 2인이 결사한 것이다. 왜 2인이 결사할까? 1인이 무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룹 중에 누군가 총을 소지하고 있다면 그 주변 사람은 결사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다.
중요한 점은 그 무기가 애초에 없다면 정치가 출범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그냥 살면 되는데 왜 정치가 필요하지? 농부는 밭갈고, 어부는 물고기잡고, 선비는 글 쓰고, 명박이는 삽질하고.
정치인은 필요가 없다. 그런데 왜? 누군가 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권(權)이다. 권리에서 권력이 나온다. 그러므로 대항하기 위해 2인이 결사하는 것이며 그것이 정치의 출발이다.
이 부분이 옳게 세팅되어야 진도를 나가서 정책이 나와준다. 한국은 여전히 두발을 단속하고 교복을 강제하는 자유없는 나라다. 촛불을 탄압하고 미네르바를 억압하고 개인을 핍박하는 나라다.
자유가 뿌리다. 한국에 자유가 없는데 정책이라는 진보의 꽃이 필 리가 없다. 개인이 무장해야 한다. 미국처럼 개인이 총기를 소지해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개인이 권리로 무장해야 한다.
권리는 혁신에서 나온다. 작가의 권리는 창작에서 나오고, 발명가의 권리는 특허에서 나온다. 생존권과 인권을 포함한 일체의 권리가 개인의 무장이다. 인터넷이라는 혁신에서 네티즌의 권리가 나온다.
금속활자의 발명이라는 혁신에서 언론의 자유라는 권리가 나온다. 금속활자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언론의 자유도 없을 것이다. 당연하다. 애초에 언론이 없는데 무슨 언론의 자유란 말인가?
자유의 크기는 혁신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다. 우리는 혁신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이 무장하면 이에 대항하기 위해 2인이 결사한다. 바로 정치가 출범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권리는 인터넷의 등장, 아이폰의 등장과 같은 부단한 혁신에서 나오고 이를 철저히 보장하며, 그 혁신된 자유권의 행사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한 결사체가 정당이다.
혁신이 자유를 낳는다. 이는 물리적인 법칙이다. 그 자유는 철저히 보장하되 그 자유의 행사에 대해서는 철저히 대응해야 한다. 자유는 억압되고 규제되어야 하는게 아니라 대응되어야 하는 것이다.
미국이라면 총기소지를 허용하되 그 총기의 사용에 있어서는 철저히 대응한다. 확실하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먼저 자유를 주고 다음 그 자유의 행사에 대해서는 물리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정치다.
자유를 부정하면 진보는 뿌리가 죽어 출범하지 못한다. 자유와 정책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문제다. 구조론은 형식을 강조한다. 철저한 자유에서 완벽한 진보적 정책이 나온다.
철저한 자유가 중요하다. 철저한 자유는 철저한 무장에서 나온다. 철저한 무장은 철저한 권리에서 나온다. 철저한 권리는 철저한 혁신에서 나온다. 혁신이 권리를 낳고 권리가 권력으로 발전함이 정당이다.
정당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며, 권력은 권리들의 결집이며, 권리는 혁신에서 얻어지고, 혁신을 가능케 하는 것은 자유다. 그것이 에너지가 가는 길이며 이를 따르는 것이 우리의 강령이다.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좋은 정책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유권자들에게 아부하고 엎드려 절하며 유권자의 표를 구걸하여 구걸한 표로 집권하겠다는 것은 망상이다. 정책은 전혀 필요없다.
우리가 혁신하여 권리를 탄생시키고 권리를 결집하면 그것이 권력이다. 우리가 권력이 없는 이유는 권리를 결집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권리를 결집하지 못한 이유는 혁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힘으로 혁신하지 않고 서구인들이 해놓은 혁신을 빌어왔기 때문이다. 스스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인들은 총으로 무장했지만 우리는 혁신으로, 권리로, 자유로 무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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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을 지인들에게 소개하면 반응은 다음과 같이 귀결되오
"어렵게 보인다"
깊게 고민해보고, 구조론의 사유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씹어보고 하는 말이 아니오.
그냥 '구조론'이란 단어를 보고 어렵다고 연상하고 그냥 아예 접근을 포기해버리오.
맙소사.
나는 도무지 공부가 재미없다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오.
그들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머리 아프고, 스트레스 받고 괴롭다고 하오
나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머리가 근질거리고 스트레스를 받긴 하지만 그것을 풀었을 때의 쾌감을 기억하기에 계속 탐구를 진행하오.
그렇게 해서 나는 공부가 재미가 있었소.
연역의 즐거움을 알았던 것이오.
명상을 해도 마찬가지. 한참 명상을 할 땐 의식의 각성 상태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쾌감을 낳더구려.
이 땐 벼리를 잡아당기면 그물의 나머지 부분들이 끌려오듯이, 마음 속의 온갖 생각들이 한 줄에 꿰어지는 느낌이 들더구려.
그런것이 연역이었구려.
구조론의 연역과 귀납에 대한 설명을 보고 가슴이 벅차올랐소.
그리고 상담이란 것이 바로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연역을 이끌어내는 것임을 알았소.
상담에선 이를 <통찰>이라 부르고 있소.
조만간 연역과 통찰에 대해 글을 써 보겠소. 거참, 상담가들이 이 구조론을 공부하면 좋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