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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관리자*
read 3673 vote 0 2012.10.21 (21:51:30)

어원으로 보면 생각(think)에는 '속, 쏘다, 찌르다'는 뜻이 있다. thorn, through, thought, thank로 전개되는데 가시처럼 속으로 관통하여 쏘다, 속으로 쏘아서 꿰뚫는다는 뜻이다. 머릿속을 찌르고 들어가면서 동시에 사물의 내부를 관통하는 것이 생각이다. 

 

김동렬, 세상은 마이너스다, 228쪽 


안철수의 생각을 읽었다.

요즘 한참 사람들이 그 이름을 목놓아 부르는 철수의 생각이라 하길래 작금의 현실을 한 줄로 관통할 것으로 기대했다.

내 가슴까지 꿰뚫어줄 것을 기대했다. 생각이란 그런 거니까.

 

읽어보니 나쁘진 않았다.

 

복지

정의

평화

 

나름 상부구조를 건드리는 단어들만 골랐다. 뭐, 대한민국이라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공동체를 복지를 주춧돌삼고 정의의 기둥을 세워 평화라는 지붕을 올리겠다는 철수의 생각. 나쁘지 않다. 근데 통쾌하진 않다. 꿰뚫지 못한다. 밋밋하다 맹숭맹숭하다. 몸에 좋은 웰빙 식단이긴 한데 맛은 별로 없다. 참 바르고, 단정하고 괜찮은 사람인데 한 번에 상대의 마음은 사로잡지 못하는, 철수는 그런 남자?

 

사실 지금 책을 다 안 읽었다. 절반쯤 읽었나? 그래도 알 건 다 알았다. 이 사람이 어떤 포지션을 취하는지 절반쯤 읽으니 다 나오더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는 세 가지 필수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달리기 경주를 예로 들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아요. 우선 달리기를 시작할 때는 모든 선수들이 같은 선에서 동시에 출발해야 합니다. 즉 출발선에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죠. 그리고 달리는 과정에서 어떤 반칙이나 특권도 허용하지 않고 공정하게 겨루게 하는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잘 지켜지는지 심판이 감시해야겠죠. 마지막으로 결승선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눠졌을 때 패자를 그냥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안철수, 안철수의 생각, 86쪽


(만약 위의 인용된 부분을 읽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참으로 주옥같은 말씀이네. 역시 안철수야'하시는 분들은 그냥 조용히 이 글을 스킵하시라. 하지만 위의 글을 읽고 피식하며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온 분이라면 계속 읽어도 무방하다.)

 

허허허.... 위의 글을 읽으니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며 나름 기특한 생각을 글에 담았지만 어른이 보기에는 참으로 귀엽기 짝이 없는 그런 느낌?

 

모든 선수들이 같은 선에서 동시에 출발해야 한다?

공정하게 겨루게 하는 규칙이 있어야 한다?

심판이 감시해야겠죠겠죠겠죠?

패자를 그냥 버려두지 말고 재도전의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라고라?

 

아.. 이건 마치 남도에 내려가 한정식을 기대했는데 그냥 숭늉 한그릇 달랑 나온 그런 느낌?

 

우선 모든 선수들을 같은 선에 세워서 동시에 출발시키겠다는 발상부터 말이 안 된다.

이건 마치 철지난 공산주의 유머를 듣는듯한 그런 느낌?

나름 달리기라는 동영상 모형을 가지고 정의를 설명하려는 노력은 기특하나 결과는 실패!

 

인류 역사 이래 인간은 단 한 번도 동시에 출발한 적이 없다. 문명 간에도 선발주자와 후발주자가 있었고 그 간격이 좁아져서 에너지의 낙차가 사라지면 다시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고, 그 문제를 푸는 새로운 선발주자가 등장하고 후발주자들은 열심히 베끼는 그런 패턴이 반복되어 왔다. 1%가 문제를 풀고 그 모범답안이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99%에게 퍼지는 것. 그것이 인류가 걸어온 길이고 앞으로도 걸어갈 길이다.

 

불쌍한 철수, 이를 어쩌나. 위의 글로 본심을 들켜버렸다.

사람들을 한 줄로 줄세우고, 방아쇠를 당기고 누가 반칙하지 않나 지켜보는 그런 심판의 역할을 맡고 싶다는 속내를 들켜버렸다. 그런데 심판이 세우는 그런 정의는 수준 낮다. 공정한 규칙을 만들겠다는 그런 의지, 역시 수준 낮다. 패배한 사람들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주면 되지 않겠냐는 그런 항변, 역시 수준 낮다.

 

안철수는 위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포지션을 심판 자리에 놓았다. 구단주도 아니고 감독도 아니고 무려 심판이다.

지금 대통령 후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이 자기 포지션은 심판이라고 밝힌 것이다.

이쯤되면 눈치 빠른 사람들은 감을 잡았을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그가 어떤 역할을 할지 말이다.

 

사람들을 한 줄로 세워 동시에 출발시키겠다는 철수 생각.

심판이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도 이미 선수들은 뛰고 있고 앞선 선수를 따라잡으려 뒤에 선 선수가 X빠지게 뛰면서 따라잡는게 인류 공동체의 진화이며 일단 둘의 기록이 같아지면 이제 다른 종목 하나 신설해서 다시 선발주자를 후발주자가 따라잡는 걸 반복한다는게 구조론 생각. 그렇게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면서 인류 전체의 집단지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고 선수들을 한 줄에 세우는 노가다를 할 시간에 선발 주자의 노하우를 후발 주자가 공유할 수 있는 집단 지성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는게 구조론 생각. 

 

공정하게 규칙을 세우면 된다는 것은 철수 생각.

애당초 공정한 규칙도 공정한 게임도 없고, 모든 게임은 그 판을 설계한 사람한테 유리하게 되어있다는게 구조론 생각. 따라서 규칙이 마음에 안 들면, 게임이 마음에 안 들면, 내가 처음부터 새로운 게임을 만들고 규칙을 짜야 한다는게 구조론 생각. 그렇게 인류 전체가 자신이 주인공이고 설계자인 게임을 하나씩은 만들어야 한다는 게 구조론 생각. 남이 짜 놓은 판에서 공정한 규칙을 떠들어봐야 결국은 남 좋은 일만 실컷 하다 끝남. 

 

귀족이 대토지 소유에 농업으로 처음부터 자신들에게 유리한 게임을 설계하면 브루주아지는 공장에 공업기술로 응수하는 것이 정답. 딴나라가 조중동에 공중파로 게임을 걸면 우리는 인터넷과 SNS 게임으로 응수하는 것이 정답. 그렇게 우리는 자신에게 처음부터 '유리한' 게임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진짜 공정한 거다.

 

패자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주면 된다는게 철수생각.

하지만 패자에겐 재도전의 기회가 아니라 신대륙이 필요하다는게 구조론생각.

여기에서 실패해도 저기에서 성공할 수 있는 그런 넓은 공간을 확보하는게 중요하다는게 구조론 생각.

 

중요한 건 재도전이 아니라 신대륙이다. 좁디 좁은 구대륙에서 어떻게든 성공해보겠다고 발버둥칠 시간에 신대륙으로 향하는 편이 낫다. 체급 차이로 처음부터 안 되는 게임은 접고, 체급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승부를 낼 수 있는 게임을 시작하는 것이 낫다. 같은 게임을 반복할 기회를 주는 그런 재도전은 허무하다. 처음부터 안 되면 안 해야 한다. 그거 말고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패자부활전이 힘든 것은 공정한 심판이 없어서도 아니고 제도적 지원이 없어서도 아니라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이 좁기 때문이라는 거. 좁아서 일체의 지대(비유적 표현임)가 상승해있기 때문에 재도전이 힘들다는 게 진짜 문제이다.

 

학력차별을 철폐하겠다는 발상, 남녀차별을 없애겠다는 발상, 젊은이들의 창업지원을 하겠다는 발상, 이런 것들은 다 지대를 낮추겠다는 기특한 생각들이다. 어떤 시도를 처음 하는데 방해가 되는 진입장벽을 낮추겠다는 생각들이다. 하지만 역시 대통령이 할 생각은 아니다. 이런 것들은 공무원들이 낼 아이디어고 대통령은 달라야 한다. 대통령쯤 되려면 적어도 국가 단위의, 문명 단위의 지대를 낮출 생각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영토를 넓힐 생각을 해야 한다. 그것은 정치외교적 영토일 수도 있고 문화적 영토일 수도 있고 경제적 영토일 수도 있다. 암튼 진짜 재도전의 기회는 넓은 영토 확보에서 가능하다는 게 핵심이다. 그러려면 신대륙을 발견해야 한다. 패자에게도 재도전의 기회를 주겠다는 소심한 사후대책이 아니라 발을 디디는 것 만으로도 도전이고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성공인 신대륙을 열겠다는 야심이 있어야 한다.

 

"이리와바! 여기 노다지 광산이 있어 여기는 그냥 발을 디디는 것만으로도 굴러다니는 돌을 집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꼬셔야지.

 

"마지막으로 결승선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눠졌을 때 패자를 그냥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꼬시면 되겠니? 안되겠니?

 

사람들이 지금 진정 원하는 게 재도전의 기회라고 생각하나?

아니. 사람들의 진정한 불만은 그게 아니다. 그들은 애당초 자신이 불리한 게임에 휘말려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불복이다. 게임의 결과에 승복할 수가 없다는 게 핵심이다.

왜? 애당초 자신이 질 수 밖게 없는 게임이었으니까.

 

이게 진짜 불만이고, 분노이고, 에너지이다.

이 에너지를 느끼고 이해하고 풀어야 한다.

방법은? 그들이 질 수 없는 게임에 초대해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그들이 처음부터 질 수 없는, 이길 수 밖게 없는 그런 게임을 시작하겠다는 포부를 밝혀야 한다.

 

인류 전체가 나아가는 지점이 어디인지 찍고,

그 속에서 대한민국호가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를 밝히고

그 배 안에서 서로 지지고 볶고 싸우고 욕하고 뭔 짓을 해도 결국 우리가 거대한 배에 실려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대통령이 할 일이다.

 

암튼, 철수는 안되겠다.

굳이 심판을 보고 싶다면 좋다. 그렇게 우리가 짜 놓은 게임으로 초대하는 수밖에.

김대중이 설계하고 노무현이 터닦은 판에서 시공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건축자재는 튼튼한지 비리는 없는지 살필 꼼꼼한 감사 역할이나 맡기는 수밖에. 공사 총 감독은 다른 사람한테 맡겨야겠다.

 

이상, 철수 생각 독후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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