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남자라면?
특히, 외로운 독신 남성이라면?
치마를 입어야 한다.
도무지 멋도 없고 디자인도 꽝이지만 튼튼하기 이를데 없는 실용적인 바지는 안 된다. 무조건 예쁘고 폼나고 눈에 띄는 치마여야 한다. 미니스커트면 더 좋다. 하이힐을 신으면 금상첨화고. 근데 왜?
그래야 산다. 21세기에 살려면 쪽팔려도 치마를 입어야 한다.
긴 머리에 분홍색 원피스, 그리고 하이힐, 그런데 아저씨.
이 낯선 조합의 주인공은 51세의 화물트럭 운전사 한상옥씨다.
사진만 봐도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모양새다. 아니나다를까,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왔다. 역시나 이런 일에는 사연이 뒤따르기 마련.
두 번의 이혼을 겪은 데다가 8년전 게임 중독에 빠져 전 재산을 잃은 한씨는 어느날 TV 드라마에 나온 여주인공의 모습을 본 후 그 때부터 치마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매니큐어도 바르기 시작했다(화장까지 안 한 듯 싶다). 근데 왜, 한씨는 여장을 택한 걸까?
한씨는 말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가꾸고 돌보면서 자기관리하는 여주인공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저렇게 살아야 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그리고 그 때부터 한씨는 여주인공들을 본받아 옷도 예쁘게 입고 하이힐도 신고, 게다가 헬스로 몸매도 가꾸었다(근데 가꾼 몸매가 근육질이라는 거......)
그렇게 한씨는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었다. 되는대로 입고 되는대로 먹고 마시고 도박하고, 에라 모르겠다, 남들 눈치 안 보고 내 맘대로 살자꾸나 에헤라디야 하던 모드에서 이제 자신을 적극적으로 돌보고 관리하고 남들 시선도 의식하는 그런 모드로 전환했다. 그렇게 한씨는 도박 중독과 우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심리치료 분야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도박중독으로부터 벗어나기란 정말 어렵다. 전문가의 도움과 가족과 주변의 지원이 없이 도박중독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이 종교가 되었든, 단도박 모임이 되었든, 아무튼 도박공동체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로 편입되지 않는 이상, 도박중독에서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마치 스위치를 켜면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이, 한씨에게 도박을 끊기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여자옷입기가 전부였다. 그것이 전구의 스위치였고 새 옷의 첫단추였으며 변화의 시작이었다.
구조론적 심리치료는 최소의 개입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스위치 한 번만 올리면 알아서 돌아가는 그런 효율적인 개입을 추구한다.
위의 사례는 바로 그러한 스위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역시나답은 미학이다. 달리 말하면, 스타일이고, 삶의 양식이고, 옷입기이다.
예로부터 사람을 바꾸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옷입기였다. 정확히 말하면 옷바꿔입기다.
신데렐라도 그랬고 왕과 거지도 그랬고, 귀여운 여인도 그랬다.
다 옷바꿔입기로 사람이 바뀌었다. 그것도 단 한 순간에!
한씨의 이야기는 옛부터 가장 효과적인 신분상승법으로 알려진 옷바꿔입기의 현대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바지를 치마로 바꿔입는 순간, 남자옷을 벗고 여자옷을 입은 그날부터, 그의 신분은 상승했다. 단지 바지가 치마로 바뀌었을 뿐인데, 노비에서 마님이 되었다. 참으로 극적인 상승이다.
노비의 삶은 그가 뜨는 첫 삽부터 마지막 삽까지 희생의 삶이다. 가족이라는, 회사라는, 국가라는 공동체를 '위하여' 그는 오늘도 튼튼하고 실용적인 바지를 입고 열심히 일한다. 무엇이 묻을까봐 조심해야 하는, 남들의 시선을 붙잡는 그런 옷은 안 된다. 일하는데 불편하기 때문이다.
바지는 보통의 남성들이 취하는 삶의 양식을 집약하고 있다.
남성은 기본적으로 잉여다. 김동렬님 말대로 유전적으로 보면 남자라는 존재 자체가 여자의 세력이며 잉여이다. 공동체의 세력을 확장하고 영토를 넓히기 위해 남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차피 단 한 명만 있어도 무방한 잉여이기 때문에 공동체에 의해 마구 소모된다. 주로 전쟁의 형태로 말이다.
그들은 마구 소모되니까 옷도 아무렇게 입는다.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데 적합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남성의 옷은 거의 기능 위주이고 실용성이 기준이 된다. 남성 옷은 그야말로 '위하여'의 집합체이다. 멋에 의하여, 아름다움에 의하여. 어울림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농사짓기 위해, 사냥하기 위해, 전쟁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남자라는 잉여는 참으로 불쌍하다. 왜? 튼튼하고 질긴 바지만 입고 열심히 일하건만 그 성과는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재주는 그가 넘지만, 돈은 가족, 회사, 국가라는 왕서방이 챙긴다. 그리고 더 이상 재주를 넘지 못하는 남자는, 특별히 선보일 재주가 없는 남자는 잔혹하게 버려진다. 왜? 잉여니까.
그렇게 한씨도 버려졌다. 가족이라는 왕서방 앞에서 부릴 수 있는 재주는 다 부려보았지만 결국 레파토리는 다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이혼당했다(남자에게 이혼은 당하는 것이지 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 공동체의 중심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어머니다). 그렇게 왕서방과 떨어진 곰은 갈 곳이 없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없이는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마님이 없으면 일을 하지 못한다. 상부구조로부터의 명령을 받을 통로가 없으니까, 명령이 더 이상 내려오지 않으니까 도무지 할 일이 없다. 자신에게 무언가 역할을 달라고 소리쳐보지만, 가족 외의 사회적 공동체와의 접점이 없다면, 내성적인 성격이라 친구도 거의 없다면 거의 100% 확률로 이혼=고립이 된다.
이런 일은 주로 남성들에게 흔히 일어난다. 이혼 후 망가진 남성들의 이야기, 늘어놓자면 한이 없다. 공동체로부터 고립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밖에 없다. 다른 공동체를 찾기, 아니면 스스로를 더욱더 고립시키기.
또다른 공동체를 찾아나선 남성들이 선택하는 것들을 보면 주로 술, 도박, 횡음, 일중독, 등 여전히 노비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혼의 아픔을 달랜답시고 술을 퍼마시면서 주류회사 좋은 일만 하고 도박을 하면서 한국마사회나 살찌우고, 횡음을 하면서 포주들 주머니나 불룩하게 만들어주고, 일중독에 빠져 회장님 통장 잔고를 늘여준다. 그렇게 공동체에서 버림받은 잉여 남성은 여전히 '위하여' 모드를 벗어나지 못한다. 작업복인 바지를 벗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잉여임을 깨달은 후 스스로를 공동체로부터 차단해버린다. 사회로부터 철수해버린다. 생계를 유지할 정도의 활동만 하고 사회적인 상호작용은 최소화한다. 그러나 상호작용이 없이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게 인간인지라 누군가와 상호작용을 하긴 해야 한다. 그래서 하긴 한다. 근데 누구랑 하느냐하면, 바로 자기 자신과 한다.
스스로를 고립시킨 남성들은 이제 자기 자신과 혼자말을 한다. 이런 아저씨들 의외로 많다. 계룡산에 가도 혼자 도닦는다고 토굴생활하는 사람 꼭 있고 홀로 산에서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아저씨들 꼭 있다. 그렇게 열심히 혼자서 도닦다가 대부분 간다. 어디로? 병원으로.
어쩔 수 없다.
남자에겐 더 이상의 선택권이 없다. 그것이 가족이든, 회사이든, 국가이든 간에 관계없이, 일단 공동체로부터 버림받은 남성이라면 지금 당장 바지를 벗어야 한다. 바지가 상징하는 '위하여' 모드를 지금 당장 벗어나야 한다.
치마는, 특히 짧은 치마는 바지와 다르다. 우선 비실용적이다. 일과 무관하고 기능과 무관하고 역할과 무관하다. 치마는 노비의 복색인 바지와 다르다. 주인 마님만 입을 수 있는게 치마다. 유럽귀족들이 입은 치마도 그러했고 양반들의 기나긴 도포도 그러했다. 이런 옷들은 도무지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입는다. 왜?
그것은 자신이 주인임을 나타내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분이 노비가 아니라 양빈임을 천민이 아니라 귀족임을 나타내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치마는 당신을 상호작용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으로 데려간다.
미니스커트는 당신을 한 순간에 공동체의 중심으로 데려간다.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이 결합되면 사람들의 시선이 한 점으로 수렴된다. 그렇게 치마는 소실점 역할을 한다. 소실점이 되어 당신을 공동체의 중심에 데려다 놓는다. 콧대는 저절로 높아지고 어깨가 저절로 펴지고 움츠렸던 마음이 활짝 피어난다.
한씨는 말한다. 원래 내성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 한마디 제대로 건내지 못했던 자신이 치마를 입은 후에는 사람들이 먼저 찾아와 말을 걸어줘서 좋았다고. 이게 바로 바지와 다른 치마의 역할이다. 치마는 한 순간에 당신을 꽃으로 만든다. 수고롭게 이리저리 팔랑거리며 날개짓하느라 바쁜 나비가 아니라 그냥 가만히 앉아 나비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그런 꽃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남자들이여 치마를 입어라.
꼭 치마가 아니어도 좋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제 더 이상 남 좋은 일하며 살지 말라는 것이다. 왕서방을 위해 바지입고 열심히 춤추지 말라는 것이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뒤에서 헌신하지 말고 치마 입고 무대 앞으로 나와야 한다. 시선을 끌고 주목을 받고 사람들의 마음을 모을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라는 유전자의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 바지입고 땀흘려 일하는 대신 치마를 입고 쇼핑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고립을 벗어날 수 있고 술과, 도박, 일중독이라는 호구짓을 그만둘 수 있다.
진짜 치마를 입고 다녀야 하는건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 없다.
종요한 것은 바지와 치마로 비유되는 삶의 양식이니까.
그 양식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바꿀려면 계기가 필요하고 그 계기는 이미 충분하다.
당신은 아내로부터 버림받았고 자식으로부터 외면당했으며 회사로부터 내쫒겼다. 혹은 조만간 그렇게 된다. 무슨 계기가 더 필요한가?
20세기까진 바지입고 버틸 수 있었지만 21세기는 다르다. 바지로 대변되는 삶의 양식은 끝났다. 이제 치마의 시대이다. 중요한 것은 미학이다. 그리고 미학은 하나를 바꾸면 나머지 아홉이 전부 바뀐다. 그러므로 당신 역시 하나만 바꾸면 된다. 옷하나 바꿔잆는 것으로 사람이 달라지는 것. 바로 그것을 찾아야 한다.
구조론 심리학은 말한다.
바꿔입어야 할 단 하나의 옷은 바로 당신과 세상의 관계라고.
바지를 입는 이상 당신은 세상을 주인으로 자신은 노비로 삼아 관계를 맺게 되고
치마를 입는다면 거꾸로 자신을 주인으로 세상을 관객으로 삼아 관계를 맺게 된다고 말이다.
개입은 한 번으로 족하다.
가장 멋진 옷 한 벌을 걸치는 것만으로 당신은 변한다.
한씨의 이야기는 그걸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말한다.
남자들이여, 치마를 입어라.
원시사회(여자중심사회)
근대사회(남자중심사회)
미래사회(여자중심사회)
이렇게 되는 것은 구조적 필연입니다.
-김동렬, 여자가 잘해야 나라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