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을 깨달음
깨달음은 자유를 깨달음이다. 자유의 성취는 만남에 있고 만남의 완성은 사랑에 있으며 사랑의 결실은 창조에 있다. 창조는 신의 완전성을 재현함이다.
인간의 존재의미는 언제라도 신의 완전성을 재현함에 있다. 깨달음과 자유와 만남과 사랑과 창조는 그 재현의 과정에서 거쳐야 할 정거장들이다.
● 신의 완전성을 재현하는 과정 = 깨달음≫자유≫만남≫사랑≫창조
자유롭지 못하면 깨달음은 거짓, 만나지 못하면 자유는 거짓, 사랑으로 결실하지 못하면 만남은 거짓이다. 창조에 이르러 신의 미소를 본다.
깨달은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신의 완전성을 인간의 삶에 재현하여 보이지 못하면 거짓이다. 사회와 역사와 문명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절집에서 볼 수 있는 심우도(尋牛圖)는 열 번째 입전수수(入廛垂手)로 완성된다. 소를 찾는 데서 끝나지 아니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손을 담근다.
깨달음의 종착지가 개인적 자유의 완성이라면 신의 무대에서 배우 노릇에 불과하다. 사회로 나아가 나 자신의 무대를 개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창조다. 창조하지 못하는 사랑, 사랑하지 못하는 만남, 만나지 못하는 자유, 자유에 이르지 못하는 깨달음은 진짜가 아니다.
깨달은 이가 깊은 산중에서 은둔거사로 세월을 낭비함은 헛되다. 고립된 자가 혼자서 평정심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깊은 산 속에서 세상사를 잊고 산다면 번뇌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고작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구도의 길에 나선다면 헛될 뿐이다.
만나야 한다. 사람과 만나고 세상사와 맞물리고 역사의 진보와 함께 서고 인류문명과 하나되어야 한다. 그것이 신과 소통하는 방법이다.
세상 사람들과 함께 부대낀다면 세상이 이렇듯 시끄러운데 혼자서 마음의 평정을 말한다는 것 자체로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다.
역사가 분노할 때 함께 분노하고 사회가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할 수 있어야 진짜다. 그렇게 동반하여 함께 흘러가는 것이 진정한 자연스러움이다.
북은 소리를 내어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 종은 울림과 떨림 가운데 있어도 구애됨이 없다. 종이 되고 북이 되어 소리를 토해내야 진짜다.
대승(大乘)을 깨달음
깨달은 이가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분노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춤 추고 노래한다면 무엇이 다른가?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를 말할 수 있다. 사신 일행을 따라간 연암이 열하에 있는 황제의 여름별장으로 가는 도중 하룻밤에 아홉 번 내를 건넌 기록이다.
메마른 사막에 비가 내리면 갑자기 많은 물길이 생겨난다. 폭우로 불어난 난하의 지류를 아홉 번 거너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연암은 깨달음을 얻었다.
일행이 함께 길을 가는 중에 한 사람이 동요하면 모두가 흔들린다. 연암의 한 사람의 마음이 사신단 일행의 운명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연암의 깨달음이 곧 울림과 떨림을 낳아 그 일행 모두를 구원한다. 집단의 위기에서 한 사람이라도 중심을 잡아주면 집단 전체가 구원된다.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 일행은 곧잘 풍랑을 만나곤 했다. 용왕이 진노했다고 믿고 겁에 질려있는 선원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선원들이 몰려와서 울며 요구한다. 용왕이 노했으므로 통신사 일행의 우두머리가 입고있는 적삼을 벗어 바다에 던져야 한다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권위를 잃어 바보가 된다. 그들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선상반란이라도 일어날 기세다. 그러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까?
깨달음은 깊은 산중의 은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집단의 위기 앞에서 흔들림없이 중심을 잡아주는 리더에게 필요하다.
깨달음은 소통이다. 사회적 소통이 효율성이 극적으로 높아진다. 리더의 깨달음이 이심전심의 울림과 떨림을 낳아 그 집단 구성원 모두에게 전파된다.
위기가 아닌 때 구태여 평상심을 말하고 포즈를 취하며 척 하는 것은 도리어 자연스럽지 않다. 일 없을 때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다.
위기를 앞두고 분쟁이 일어난다. 사회의 모든 분쟁은 진위, 선악, 미추, 자유와 억압, 성과 속의 판단과 선택 앞에서 일어난다.
위기가 닥치면 집단의 의사를 결정해야 한다.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 하나가 선택될 때 다른 하나는 버려진다. 분쟁은 필연이다.
그러나 진리의 배가 출항하고 선(善)의 자동차가 질주하고 미(美)의 꽃이 피어나고 자유의 춤이 싱그러울 때 모든 분란이 이슬처럼 사라진다.
왜 분쟁하는가? 멈추므로 분쟁한다. 멈추어 설 때 존재는 소통을 잃고 기능을 잃고 호흡을 잃고 맥박을 잃고 흐름을 잃어서 분쟁한다.
달리는 말의 머리와 꼬리가 다투는 법은 없다. 꼬리가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며 ‘왜 항상 네가 선두냐?’고 머리에게 따진다면 그 말은 멈춘 것이다.
달리지 못하는 자동차는 앞과 뒤가 방향을 놓고 분쟁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권력은 위 아래가 이익을 놓고 분쟁한다.
막혔기 때문에 분쟁한다. 자유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분쟁한다. 깨달음은 소통이다. 소통이 그 막힌 것을 뚫는다. 소통이 모두에게 자유를 준다.
각자 자유를 얻어 제 길을 갈 때 분쟁은 해소된다. 깨달음이 집단의 의사소통 속도를 높인 결과로 신속한 의사결정을 가능케 하여 분쟁을 해소하다.
깨달음은 집단이 잘못된 길을 갈 때 멈추게 하는 것이다. 겁에 질린 선원들이 나으리께 적삼을 벗어 바다에 던지라고 요구할 때 그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은둔거사가 산 중에서 평정심을 말하기 쉬우나 사회에서 인간들과 부대끼며 함께 슬퍼하고 함께 분노하며 그들을 통제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만남을 깨달음
깨달음은 소통이다. 사회의 소통은 문화다. 문화는 사회라는 생명체의 호흡이다. 문화는 예술이라는 공기로 호흡한다. 예술은 창조다.
창조적인 분야의 종사자에게 깨달음이 필요하다. 공장의 제품은 미완성의 부품이 조립되어 완성되지만 예술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장의 제품은 반제품도 평가하여 제 값을 받을 수 있지만 예술가의 작품은 완성품과 미완성품 사이에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깨진 나팔은 소리내지 못한다. 찢어진 북은 울리지 않는다. 예술은 소통에 기여한다. 소통은 각 구성소가 한치의 빈틈이 없이 맞물려 있을 때 가능하다.
맞물려야 소리를 낸다. 맞물리기 위해 만나야 한다. 그러므로 문화는 만남이다. 영화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모든 문화는 인간의 만남을 중개한다.
한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식을 좋아하는 사람과 한식당에서 만나고 일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일식을 좋아하는 사람과 일식당에서 만난다.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동아리들과 극장에서 만난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동아리들과 터미널에서 만난다. 그렇게 문화는 만남이다.
문화로 하여 우리는 진정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깨달음은 가장 높은 수준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길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까? 이상주의자를 만나야 한다. 탐미주의자를 만나야 한다. 심미안을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한다.
제 속에 이야기를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는 자유인이다. 자유인이 가장 많이 여행했고 가장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타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쿨한 사람이어야 한다. 개인의 문제로 호소하며 엉기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진상을 피해가는 방법이 있다.
의존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응석받이가 아니어야 한다. 철이 든 사람이어야 한다.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왕자병 공주병에 마마보이가 아니어야 한다.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콤플렉스의 그늘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대화가 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모든 형태의 막혀있는 사람을 피하고 모든 형태의 열려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속물은 자녀의 성공나 남편의 출세 혹은 권력이나 돈 혹은 어떤 집단에의 소속을 통해 대리충족 하려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자부심이 없다.
광적인 추종자가 위험하다. 편견을 가진 사람이 위험하다. 두려움으로 막혀 있는 사람이 위험하다. 누군가가 자신을 해칠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위험하다.
작은 일에 집착하는 사람이 위험하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비난하는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 그들은 제 발로 시궁창에 들어가서는 시궁창을 욕한다.
만약 고상하다면 스스로 시궁창을 피할 것이고 따라서 욕할 일도 없어진다. 시궁창을 욕하는 자는 그 시궁창에서 벗어날 의사가 없는 자이다.
외국인과 문화와 관습의 차이를 두고 비난하는 자가 최악이다. 해외여행 가서 삐끼들 욕하는 사람이 그 중 바닥이다.
어느 곳에 가든 그 곳의 최선을 보지 못하면 여행할 자격이 없다. 그런 자는 육신의 장애는 없다해도 마음에 소통의 장애가 있다.
신체의 장애는 작은 것이고 영혼의 장애는 큰 것이다. 모든 장애는 소통의 장애이며 소통의 장애는 근본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산 밑에 있으면 위에서 돌이 굴러 떨어지든 나무에서 솔방울이 떨어지든 계곡에서 물이 쏟아지든 어떻게든 위해를 당할 뿐이다.
정상에서는 누구의 해침도 받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신을 해칠 것이라 믿는 자가 수구꼴통이다. 그들의 영혼은 병들어 있다. 소통하지 못한다.
누구도 나를 해칠 수 없다. 진정한 것은 마음의 화폭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마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므로 해칠 수 없다.
오고감이 있어도 그것은 나의 창조를 위하여 제공된 무대일 뿐이다. 가난이 성전의 기초를 설계하기라면 부는 첨탑의 꼭지를 설계하기다.
화려한 무대에서 도드라지기 어렵고 심플한 무대에서 주목받기 쉽다. 가난이 심플한 무대와 같다면 부는 화려한 무대와 같다.
가난한 이는 질의 깊이에서 크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고 부유한 이는 도드라진 자기 색깔로 정밀하게 소통할 수 있다.
깨달음은 만남이다. 깨달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자유로워야 벗어날 수 있고 벗어나야 다가갈 수 있고 다가가야 만날 수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인가? 어떤 세상과 만날 것인가? 내 안에 이야기를 감추고 있는 사람과 만나야 한다. 그래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자유를 깨달음이다. 자유의 성취는 만남에 있고 만남의 완성은 사랑에 있으며 사랑의 결실은 창조에 있다. 창조는 신의 완전성을 재현함이다.
인간의 존재의미는 언제라도 신의 완전성을 재현함에 있다. 깨달음과 자유와 만남과 사랑과 창조는 그 재현의 과정에서 거쳐야 할 정거장들이다.
● 신의 완전성을 재현하는 과정 = 깨달음≫자유≫만남≫사랑≫창조
자유롭지 못하면 깨달음은 거짓, 만나지 못하면 자유는 거짓, 사랑으로 결실하지 못하면 만남은 거짓이다. 창조에 이르러 신의 미소를 본다.
깨달은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신의 완전성을 인간의 삶에 재현하여 보이지 못하면 거짓이다. 사회와 역사와 문명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절집에서 볼 수 있는 심우도(尋牛圖)는 열 번째 입전수수(入廛垂手)로 완성된다. 소를 찾는 데서 끝나지 아니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손을 담근다.
깨달음의 종착지가 개인적 자유의 완성이라면 신의 무대에서 배우 노릇에 불과하다. 사회로 나아가 나 자신의 무대를 개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창조다. 창조하지 못하는 사랑, 사랑하지 못하는 만남, 만나지 못하는 자유, 자유에 이르지 못하는 깨달음은 진짜가 아니다.
깨달은 이가 깊은 산중에서 은둔거사로 세월을 낭비함은 헛되다. 고립된 자가 혼자서 평정심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깊은 산 속에서 세상사를 잊고 산다면 번뇌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고작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구도의 길에 나선다면 헛될 뿐이다.
만나야 한다. 사람과 만나고 세상사와 맞물리고 역사의 진보와 함께 서고 인류문명과 하나되어야 한다. 그것이 신과 소통하는 방법이다.
세상 사람들과 함께 부대낀다면 세상이 이렇듯 시끄러운데 혼자서 마음의 평정을 말한다는 것 자체로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다.
역사가 분노할 때 함께 분노하고 사회가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할 수 있어야 진짜다. 그렇게 동반하여 함께 흘러가는 것이 진정한 자연스러움이다.
북은 소리를 내어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 종은 울림과 떨림 가운데 있어도 구애됨이 없다. 종이 되고 북이 되어 소리를 토해내야 진짜다.
대승(大乘)을 깨달음
깨달은 이가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분노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춤 추고 노래한다면 무엇이 다른가?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를 말할 수 있다. 사신 일행을 따라간 연암이 열하에 있는 황제의 여름별장으로 가는 도중 하룻밤에 아홉 번 내를 건넌 기록이다.
메마른 사막에 비가 내리면 갑자기 많은 물길이 생겨난다. 폭우로 불어난 난하의 지류를 아홉 번 거너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연암은 깨달음을 얻었다.
일행이 함께 길을 가는 중에 한 사람이 동요하면 모두가 흔들린다. 연암의 한 사람의 마음이 사신단 일행의 운명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연암의 깨달음이 곧 울림과 떨림을 낳아 그 일행 모두를 구원한다. 집단의 위기에서 한 사람이라도 중심을 잡아주면 집단 전체가 구원된다.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 일행은 곧잘 풍랑을 만나곤 했다. 용왕이 진노했다고 믿고 겁에 질려있는 선원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선원들이 몰려와서 울며 요구한다. 용왕이 노했으므로 통신사 일행의 우두머리가 입고있는 적삼을 벗어 바다에 던져야 한다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권위를 잃어 바보가 된다. 그들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선상반란이라도 일어날 기세다. 그러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까?
깨달음은 깊은 산중의 은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집단의 위기 앞에서 흔들림없이 중심을 잡아주는 리더에게 필요하다.
깨달음은 소통이다. 사회적 소통이 효율성이 극적으로 높아진다. 리더의 깨달음이 이심전심의 울림과 떨림을 낳아 그 집단 구성원 모두에게 전파된다.
위기가 아닌 때 구태여 평상심을 말하고 포즈를 취하며 척 하는 것은 도리어 자연스럽지 않다. 일 없을 때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다.
위기를 앞두고 분쟁이 일어난다. 사회의 모든 분쟁은 진위, 선악, 미추, 자유와 억압, 성과 속의 판단과 선택 앞에서 일어난다.
위기가 닥치면 집단의 의사를 결정해야 한다.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 하나가 선택될 때 다른 하나는 버려진다. 분쟁은 필연이다.
그러나 진리의 배가 출항하고 선(善)의 자동차가 질주하고 미(美)의 꽃이 피어나고 자유의 춤이 싱그러울 때 모든 분란이 이슬처럼 사라진다.
왜 분쟁하는가? 멈추므로 분쟁한다. 멈추어 설 때 존재는 소통을 잃고 기능을 잃고 호흡을 잃고 맥박을 잃고 흐름을 잃어서 분쟁한다.
달리는 말의 머리와 꼬리가 다투는 법은 없다. 꼬리가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며 ‘왜 항상 네가 선두냐?’고 머리에게 따진다면 그 말은 멈춘 것이다.
달리지 못하는 자동차는 앞과 뒤가 방향을 놓고 분쟁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권력은 위 아래가 이익을 놓고 분쟁한다.
막혔기 때문에 분쟁한다. 자유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분쟁한다. 깨달음은 소통이다. 소통이 그 막힌 것을 뚫는다. 소통이 모두에게 자유를 준다.
각자 자유를 얻어 제 길을 갈 때 분쟁은 해소된다. 깨달음이 집단의 의사소통 속도를 높인 결과로 신속한 의사결정을 가능케 하여 분쟁을 해소하다.
깨달음은 집단이 잘못된 길을 갈 때 멈추게 하는 것이다. 겁에 질린 선원들이 나으리께 적삼을 벗어 바다에 던지라고 요구할 때 그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은둔거사가 산 중에서 평정심을 말하기 쉬우나 사회에서 인간들과 부대끼며 함께 슬퍼하고 함께 분노하며 그들을 통제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만남을 깨달음
깨달음은 소통이다. 사회의 소통은 문화다. 문화는 사회라는 생명체의 호흡이다. 문화는 예술이라는 공기로 호흡한다. 예술은 창조다.
창조적인 분야의 종사자에게 깨달음이 필요하다. 공장의 제품은 미완성의 부품이 조립되어 완성되지만 예술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장의 제품은 반제품도 평가하여 제 값을 받을 수 있지만 예술가의 작품은 완성품과 미완성품 사이에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깨진 나팔은 소리내지 못한다. 찢어진 북은 울리지 않는다. 예술은 소통에 기여한다. 소통은 각 구성소가 한치의 빈틈이 없이 맞물려 있을 때 가능하다.
맞물려야 소리를 낸다. 맞물리기 위해 만나야 한다. 그러므로 문화는 만남이다. 영화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모든 문화는 인간의 만남을 중개한다.
한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식을 좋아하는 사람과 한식당에서 만나고 일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일식을 좋아하는 사람과 일식당에서 만난다.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동아리들과 극장에서 만난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동아리들과 터미널에서 만난다. 그렇게 문화는 만남이다.
문화로 하여 우리는 진정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깨달음은 가장 높은 수준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길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까? 이상주의자를 만나야 한다. 탐미주의자를 만나야 한다. 심미안을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한다.
제 속에 이야기를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는 자유인이다. 자유인이 가장 많이 여행했고 가장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타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쿨한 사람이어야 한다. 개인의 문제로 호소하며 엉기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진상을 피해가는 방법이 있다.
의존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응석받이가 아니어야 한다. 철이 든 사람이어야 한다.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왕자병 공주병에 마마보이가 아니어야 한다.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콤플렉스의 그늘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대화가 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모든 형태의 막혀있는 사람을 피하고 모든 형태의 열려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속물은 자녀의 성공나 남편의 출세 혹은 권력이나 돈 혹은 어떤 집단에의 소속을 통해 대리충족 하려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자부심이 없다.
광적인 추종자가 위험하다. 편견을 가진 사람이 위험하다. 두려움으로 막혀 있는 사람이 위험하다. 누군가가 자신을 해칠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위험하다.
작은 일에 집착하는 사람이 위험하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비난하는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 그들은 제 발로 시궁창에 들어가서는 시궁창을 욕한다.
만약 고상하다면 스스로 시궁창을 피할 것이고 따라서 욕할 일도 없어진다. 시궁창을 욕하는 자는 그 시궁창에서 벗어날 의사가 없는 자이다.
외국인과 문화와 관습의 차이를 두고 비난하는 자가 최악이다. 해외여행 가서 삐끼들 욕하는 사람이 그 중 바닥이다.
어느 곳에 가든 그 곳의 최선을 보지 못하면 여행할 자격이 없다. 그런 자는 육신의 장애는 없다해도 마음에 소통의 장애가 있다.
신체의 장애는 작은 것이고 영혼의 장애는 큰 것이다. 모든 장애는 소통의 장애이며 소통의 장애는 근본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산 밑에 있으면 위에서 돌이 굴러 떨어지든 나무에서 솔방울이 떨어지든 계곡에서 물이 쏟아지든 어떻게든 위해를 당할 뿐이다.
정상에서는 누구의 해침도 받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신을 해칠 것이라 믿는 자가 수구꼴통이다. 그들의 영혼은 병들어 있다. 소통하지 못한다.
누구도 나를 해칠 수 없다. 진정한 것은 마음의 화폭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마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므로 해칠 수 없다.
오고감이 있어도 그것은 나의 창조를 위하여 제공된 무대일 뿐이다. 가난이 성전의 기초를 설계하기라면 부는 첨탑의 꼭지를 설계하기다.
화려한 무대에서 도드라지기 어렵고 심플한 무대에서 주목받기 쉽다. 가난이 심플한 무대와 같다면 부는 화려한 무대와 같다.
가난한 이는 질의 깊이에서 크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고 부유한 이는 도드라진 자기 색깔로 정밀하게 소통할 수 있다.
깨달음은 만남이다. 깨달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자유로워야 벗어날 수 있고 벗어나야 다가갈 수 있고 다가가야 만날 수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인가? 어떤 세상과 만날 것인가? 내 안에 이야기를 감추고 있는 사람과 만나야 한다. 그래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