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5540 vote 0 2006.11.05 (23:22:42)


존재론과 인식론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찾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동전이 떨어진 위치를 중심으로 점차 주위로 범위를 넓혀가며 찾는 방법이다.

동전이 떨어진 자리에 있다면 이 방법으로 빠르게 찾을 수 있지만 동전이 제법 굴러갔다면 자칫 미궁에 빠져버리는 수가 있다.

수색범위가 넓어지면 이미 찾아본 곳을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찾는 등 혼란이 일어난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전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사라진다.

다른 방법은 동전이 낙하한 위치를 중심으로 굴러갈 수 있는 최대거리를 따라 크게 동심원을 그려놓고 밖에서부터 안으로 범위를 좁혀오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100프로 찾을 수 있다. 이미 수색한 곳을 두 번 찾는 낭비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전을 찾을 확률은 높아진다.

점차 범위를 좁혀가는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점차 범위를 넓혀가는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이다. 범위를 좁혀가는 방법이 깨달음이다.

개를 길들이는 데는 당근과 채찍이 사용된다. 잘했을 때 먹이를 주고 칭찬하는 것이 당근이면 잘못했을 때 꾸지람을 하는 것이 채찍이다.

강아지의 배변훈련을 예로 들 수 있다. 잘못된 장소에 큰것과 작은 것을 저질러 놓았을 때 꾸짖는 방법은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배변장소가 문제인지 배변행위 자체가 문제인지를 판단하지 못한다. 이때 강아지가 판단해야 할 범위가 너무 넓다.

강아지는 배변행위 자체가 문제인 것으로 착각하고 구석진 장소에 변을 숨겨놓으려 한다. 강아지의 판단범위를 좁혀주어야 한다.

배변장소를 지정해놓고 강아지가 싼 것을 몰래 그리로 옮겨놓은 다음 칭찬을 하고 먹이를 주면 강아지는 쉽게 배변을 가린다.

강아지는 먹이를 얻기 위해 똑같은 상황을 반복하려 한다. 단순 반복은 쉽다. 이때 선택의 범위가 좁아져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당근과 채찍이 있다면 채찍은 선택범위가 넓고 당근은 선택범위가 좁다. 깨달음은 당근이다. 둘을 병행해야 한다면 선채찍 후당근이어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존재론과 인식론이다. 자연의 질서는 존재론을 따르고 인간의 학습은 인식론을 따른다.

존재론은 연역법이요 인식론은 귀납법이다. 존재론의 연역은 선택의 범위를 점차 좁혀가고 인식론의 귀납은 선택의 범위를 점차 넓혀간다.

인간의 학습과 지식은 인식론에 따른다. 학습이 진행될수록 지식이 늘어날수록 선택과 판단의 범위가 점차 넓혀진다. 귀납적 방법이다.

깨달음은 선택과 판단의 범위를 좁히기다. 깨달음은 소거법을 사용한다. 본질과 무관한 것을 조금씩 제거하다 보면 핵심이 남는다.

자동차 운전시험에는 필기와 주행이 있다. 필기시험의 이론은 알수록 점차 판단의 범위가 넓어지고 주행시험의 실기는 알수록 판단의 범위가 좁아진다.

필기시험은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많은 지식을 알려주지만 실기시험은 현장에서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변수들을 무시하는 능력을 테스트한다.

깨달음은 사격훈련과도 같다. 단 하나의 표적에 집중해야 한다. 사격의 정조준은 타켓과 무관한 99프로를 시야에서 배제하는 훈련이다.

무심(無心)의 경지에 도달할 때 까지 배제하고 또 배제해야 한다. 근원의 순수에 이를 때 까지 모든 잡생각을 머리에서 완전히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

깨달음은 이론이 아니라 실기다. 실기는 본질과 무관한 것을 배제하는 훈련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무(無)를 훈련하고 공(空)을 훈련한다.  


돈오돈수를 깨달음

깨달음의 본질은 선택지 줄이기다. 판단해야 할 진위, 선악, 미추의 경우의 수를 줄여 상황을 외통수로 몰아가는 것이다.

컴퓨터는 2진법을 쓴다. 진리는 2진법이다. 이거 아니면 저거다. 진리는 OX다. 세상 모든 것은 맞물려 있다. 맞물리면 O, 맞물리지 않으면 X다.

존재의 원리는 밸런스다. 밸런스의 자동복원 원리를 알면 모두 아는 것이다. 밸런스는 하나의 심과 두 날개로 되어 있다. 밸런스는 2진법을 쓴다.

문제해결의 실마리 찾기다. 실마리는 실의 머리다. 엉켜 있는 실의 머리만 찾으면 꼬리까지 단번에 풀어낸다. 실이 심이면 머리와 꼬리는 날개다.

세상 모든 것은 맞물려 있다. 맞물려 있으므로 머리에서 꼬리까지 한 줄로 쭉 이어져 있다. 맞물려 있음이 구조다. 구조를 찾으면 전부 풀린다.

깨달음은 돈오돈수다. 화두(話頭)는 돈오돈수다. 공안(公案)은 돈오돈수다. 화두는 선택지를 줄여가는 원리다. 공안은 언제라도 외통수로 나아간다.

불가에 전해오는 선문답은 모두 실마리로 되어 있다. 화두는 곧 이야기의 머리다. 머리를 잡으면 꼬리까지 직관하여 관통한다. 문제해결의 실마리다.

돈오는 직관(直觀)이다. 모든 존재는 서로 닮아있다. 닮은 것은 패턴이다. 패턴은 밸런스다. 밸런스를 파악하면 직관할 수 있다.


밸런스를 깨달음

세상은 밸런스다. 천칭의 밸런스는 하나의 심과 두 날개로 이루어져 있다. 콤파스는 하나의 심과 하나의 날개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의 옛 대저울은 하나의 추와 눈금이 새겨진 막대기인 저울대로 이루어져 있다. 추가 심이면 저울대가 날개다. 심이 하나에 날개가 하나다.

천칭은 날개가 둘인데 비해 대저울은 날개가 하나고 콤파스도 날개가 하나다. 밸런스를 이루는 OX 중에서 X가 버려졌으므로 날개가 하나다.

콤파스는 한바퀴를 돌려야 구실을 한다. 대저울은 추를 이동시켜야 한다. 그 이동거리 만큼 밸런스의 X다. 콤파스와 대저울은 한쪽 날개가 숨은 것이다.

칼은 날이 하나다. 볼펜도 날이 하나다. 송곳도 날이 하나다. 숟가락도 날이 하나다. 다른 한쪽 날개인 X는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

칼날이 움직인 거리, 볼펜이 움직인 거리, 송곳이 찔러들어간 거리, 숟가락 날이 입 속으로 들어간 거리 만큼 보이지 않는 X가 존재한다.  

밸런스는 하나의 심과 두 날개로 구성되지만 그 두 날개 중 하나는 O로 선택되고 하나는 X로 버려지므로 결국 천칭의 날개도 하나다.

어원으로 풀어보면 밸런스(balance)는 천칭의 두(ba-) 저울접시(lance)를 의미한다. 두 접시 중 하나는 추를 올리고 하나는 계량할 물건을 올린다.

즉 두 저울접시 중 하나는 X가 되고 하나는 O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칭도 본질로 보면 하나의 심에 하나의 날개를 가진다.  

컴퓨터는 OX의 이진법으로 구성되지만 자연의 본래는 1진법이다. 실마리와 실꼬리는 둘이지만 실을 푸는 과정은 실마리를 버려가는 과정이다.

정확히 말하면 밸런스는 둘에 있지 않고 하나에도 있지 않고 둘에서 하나로 압축해 가는 진행과정에 있다. 그것은 변화이고 운동이다.

팽이는 구심력과 원심력을 두 날개를 가진다. 날개가 둘이 되었을 때 팽이는 쓰러지고 하나가 되었을 때 팽이는 오뚝이처럼 일어나서 밸런스를 회복한다.

팽이의 회전이 성립시킨 운동량이 구심력과 원심력의 두 날개를 중력과의 대칭이라는 하나로 구조로 통일시킨 것이다.

밸런스에 의해 존재는 자동으로 복원된다. 깨달음은 밸런스의 자동복원 원리를 깨달음이다. 둘에서 하나로 나아가는 과정을 깨달음이다.


공안을 깨달음

화두에는 밸런스가 있다. 실마리와 실꼬리와 실몸이 있다. 먼저 실마리를 찾고 그 실의 머리를 버리기를 계속 반복하며 꼬리로 나아가기다.

실몸이 심이면 머리와 꼬리는 날이다. O와 X의 두 날개 중에서 X를 버리기를 반복하여 O에 도달하면 엉킨 실은 풀리고 문제가 해결된다.

모든 화두 안에 밸런스가 숨어 있고 모든 선문답 안에 밸런스가 숨어 있다. 그것이 구조이고 패턴이다. 모두 닮아있다. 그러므로 직관할 수 있다.

모든 화두 안에 무(無)가 숨어 있고 모든 화두 안에 공(空)이 숨어 있다. 그것은 본질과 무관한 것을 배제하기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뜰 앞의 잣나무로다.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네가 내기 때문이다. 부분과 전체가 통하기 때문이다.

존재가 심이면 공간과 시간은 날이다. 공간이 남는 O라면 시간은 버려지는 X다. 시간을 버려서 공간에 이르면 문제가 해결된다.

어제는 버려졌다. 오늘은 버려진다. 시간을 버려 공간에 이를 때 병안에 갇힌 새는 날개짓을 멈춘다. 모든 공안은 동일한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다.

화두는 복잡한 구조를 생략하고 있다. 극도로 단순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선택지가 제한된다. O와 X만 존재하는 세계다.

화두공안이 직관적인 깨달음의 좋은 방법론이 되는 이치는 본질과 무관한 부분을 배제함으로써 실마리를 선택할 수 밖에 없게 강제하는데 있다.

개를 훈련시키되 야단치는 방법이 아니라 먹이를 주는 방법과 같다. 거기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모든 출구를 차단해 버린다.

감옥에 갇힌 죄수는 오직 나갈 궁리 뿐이다. 공안은 다른 모든 계획과 희망과 야심을 말소시키고 오직 하나의 방향만 바라보게 강제한다.  

100미터를 전력으로 달리려면 모든 생각을 멈추어야 한다. 심지어 호흡도 멈추어야 한다. 화두는 그렇게 무(無)의 바다에 빠뜨려 버린다.

직관을 깨달음

깨달음은 쉽다. 목수의 건축과도 같다. 초등학생도 집을 지을 수 있다. 대궐짓기가 어려울 뿐 까치집 정도는 어린이도 지을 수 있다.

포크레인을 불러 터를 파고 철근공을 불러 골조를 놓고 목수를 불러 거푸집을 짓고 레미콘을 불러 콘크리트를 타설하면 반은 지은 거다.

벽돌공을 불러 벽체를 쌓고 미장이 불러 외벽을 마감하고 설비공을 불러서 보일러 놓고 인터리어 업자에게 도배를 주문하면 완성된다.

집은 누구나 지을 수 있다. 다만 집을 짓지 못하는 이유는 목수의 자와 컴퍼스가 없기 때문이다. 첫째 연장이 없어서이고 둘째 숙련되지 않아서다.  

깨달음도 이와 같다.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 그럼에도 누구나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연장이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연장은 언어다.

깨달음은 소통이다. 인간은 언어로 소통한다. 언어에서 막혀버린다. 마음으로 언어를 넘을 수 있지만 복잡한 인간의 사회는 다시 언어를 요구한다.

사회를 등지고 산중으로 숨는다면 모를까 다시 사회로 돌아와 부대낀다면 결국 언어의 벽에 막히고 만다. 그 벽을 넘기 위해서 역시 언어가 필요하다.

석가는 언어를 만든 사람이다. 그 언어의 쓰임새를 구축한 사람이다. 인연이라는 하나의 언어가 참으로 많은 소통을 가능케 하였다.  

나 역시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의 쓰임새를 제공할 뿐이다. 나는 여기에 있고 당신은 거기에 있으니 둘을 연결하는 것은 언어 뿐이다.

언어가 소통을 보조하지만 언어가 소통의 완성은 아니다. 언어를 넘어설 때 마음이 있다. 참된 소통은 마음으로 가능하다.

마음으로 소통하지만 마음 만으로 소통하지는 않는다. 그 마음의 배를 자유라는 바다에 띄워낼 때 참된 소통은 가능한다.

마음으로 만나고 마음으로 사랑하고 마음으로 소통하기다. 그것이 돈오돈수다. 마음 하나로 일관하기다. 그 마음을 방해하는 것이 언어다.

언어는 논리를 요구하고 논리는 일관성을 요구한다.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 논리적 일관성을 얻으려는 즉 왜곡이 시작된다.

배는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간다. 바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흔들리지 않았다며 왜곡하는 것이다.

언어가 소통을 보조하지만 참된 경지에서는 언어가 소통을 방해한다. 그 방해자를 제거하는 수단은 역시 언어다. 참된 언어가 잘못된 언어를 제거한다.

마음 하나로 충분하지만 언어의 방해를 차단하기 위해서 언어가 필요하다. 언어로 깨달을 수 없지만 언어로 언어의 방해를 막을 수 있다.

사회가 발달할수록 소통의 질과 양은 늘어난다. 2500년 전 석가가 처음 왔을 때는 이렇듯 복잡한 소통의 구조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가 복잡해졌으므로 그만큼 소통하기 어려워졌다. 깨달음은 소통이다. 소통하기 어려워졌으므로 이 시대에 깨닫는 이가 없어졌다.

그러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회의 복잡성이 반영된 언어가 복잡해져서 언어로 막혔을 뿐이다. 언어로 언어를 끊어내야 한다.

깨달음은 돈오돈수다. 깨달음에 계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흐름이 끊기고 막혔을 때 계단이 드러난다. 달리는 말이 멈출 때 머리와 꼬리가 다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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