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이심전심의 깨달음이다. 이심전심은 소통(疏通)이다. 소통하기 위해서 깨닫는다. 그리고 창조하기 위해서 소통한다. 소통의 결실은 창조다.
창조의 의미는 완성이다. 완성의 가치는 미(美)다. 미는 닮음에 있다. 닮은 것은 친(親)하다. 친한 것은 끌어당긴다. 끌어당기는 것은 사랑이다.
깨달음의 완성은 창조다. 창조는 닮음의 창조이며 닮음은 끌어당기며 끌어당기는 것은 사랑이다. 그렇게 신의 완전성을 담아낸다.
소통은 고립된 한 개인의 인식에서 그치지 않는다. 깨달음은 인간에게 자유를 준다. 자유가 실천을 촉발한다. 널리 소통하는 것이 대승(大乘)의 정신이다.
혼자서 소리를 낼 수 있는 북은 없다. 혼자만의 소통은 가능하지 않다. 서로는 만나야 한다. 만나서 손을 잡고 통해야 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사랑이다.
소통은 상대적이다. 상대와 닮아야 소통할 수 있다. 소통은 능동적이고 실천적이다. 소통은 사회적이고 참여적이고 대중적이다.
소통은 상대방과의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상대가 남편이냐 아내냐 성인이냐 어린이냐 윗사람이냐 아랫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관계맺기가 중요하다.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주인이 될 것인가 노예가 될 것인가 친구가 될 것인가? 깨달음은 세상과의 관계맺기다.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다. 위치는 성별로도 혹은 신분으로도 결정된다. 인종으로도 혹은 장애자로도 혹은 소수자로도 결정된다.
위치는 자신이 스스로 정한다. 자신을 여자로 혹은 남자로 혹은 아버지로 혹은 남편으로 혹은 노예로 혹은 주인으로 혹은 친구로 규정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스스로 자신을 규정할 수 있다. 그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만큼 세상과 만날 수 있다.
관계맺기는 만남이다. 깨달음은 세상과의 거룩한 만남이다. 만남의 완성은 사랑이다. 사랑은 소통의 완성이다. 깨달음의 완성은 사랑이다.
아래에서는 위를 바라본다. 기슭에서는 정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정상에서는 또다른 지평이 열린다. 그곳에 또다른 세계가 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고(苦)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상을 바라본다.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깨달음을 구한다.
그러나 정상에서는 또다른 세계를 발견한다. 그것은 만남이며 만남에 의한 소통이며 소통에 의한 사랑이며 사랑에 의한 창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