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페 게시판에 소개된 ‘UG 크리슈나무르티’라는 사람의 견해가 토론할만 하군요. ‘석가도 가짜이고 깨달음도 가짜다’ 하고 폭탄선언을 했는데 거기 까지는 들어줄만 합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깨달음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기묘하게 깨달음을 상품화 한다는 데 있습니다.
석가를 부정한다는 것은 그가 알고 있는 석가를 부정한다는 의미일테고, 그가 알고 있는 석가는 그 언어의 수단으로 기록된 석가일 테고, 이는 역으로 그 수단으로서의 언어를 긍정한다는 의미가 될 터이죠.
그가 석가를 부인하기 위하여 논리라는 도구를 동원하고 있으며 그 논리라는 도구 또한 언어로 제조된 것인데, 그 언어란 것이 과연 믿을만한 것인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언어는 그다지 신뢰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며, 그 언어로 제조된 논리 또한 그다지 신용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궤변가에 불과합니다. 궤변가는 연장을 사용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일단 연장을 사용하는 사람은 모두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그 연장이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것은 미학 밖에 없으며, 미학은 내재한 자기 일관성, 곧 내적인 자기 완결성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언어가 아닌 삶으로서만이 입증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언변을 동원하더라도 그 삶과 그 실천에 의해 입증되지 않으면 가짜입니다.
즉 석가를 부인하려면 석가의 언어가 아닌 삶을 부인해야 하며, 예수를 부인하려면 예수의 논리가 아닌 예수의 실천을 부인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그가 섹스에 대해 언급하는 수준인데 아주 저급합니다. 성은 손이나, 발, 입, 눈, 코와 같은 신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가지 종류의 섹스숭배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터부시 하는 엄숙주의자들과 그것에서 해답을 찾겠다는 섹스숭배자들입니다.
둘다 신체기관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섹스를 이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지요. 섹스가 문제가 된다면 구도자가 머리카락을 깎아버리듯이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인생의 본질적인 무게는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눈알을 뽑아내거나 고환을 잘라내거나 간에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성에 집착하고 있는 저급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식의 이야기도 하나의 해방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저급한 차원인 것은 분명합니다. 진리의 보편성에 가닿지는 못한다는 이야기지요.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고 특수성으로 보편성을 고일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 양반은 정치인에 비유하면 박찬종입니다.
물론 우리가 뻔히 가짜임을 알면서도 영화를 보고, 가짜임을 알면서도 소설을 읽듯이 가짜라도 그 허실을 가려낼 수 있는 안목만 있다면 무해합니다. 게임이죠. 그래 재주껏 나를 속여봐. 속는 척 하고 읽어줄테니..이것도 재미는 있습니다.
석가를 부정한다는 것은 그가 알고 있는 석가를 부정한다는 의미일테고, 그가 알고 있는 석가는 그 언어의 수단으로 기록된 석가일 테고, 이는 역으로 그 수단으로서의 언어를 긍정한다는 의미가 될 터이죠.
그가 석가를 부인하기 위하여 논리라는 도구를 동원하고 있으며 그 논리라는 도구 또한 언어로 제조된 것인데, 그 언어란 것이 과연 믿을만한 것인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언어는 그다지 신뢰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며, 그 언어로 제조된 논리 또한 그다지 신용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궤변가에 불과합니다. 궤변가는 연장을 사용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일단 연장을 사용하는 사람은 모두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그 연장이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것은 미학 밖에 없으며, 미학은 내재한 자기 일관성, 곧 내적인 자기 완결성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언어가 아닌 삶으로서만이 입증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언변을 동원하더라도 그 삶과 그 실천에 의해 입증되지 않으면 가짜입니다.
즉 석가를 부인하려면 석가의 언어가 아닌 삶을 부인해야 하며, 예수를 부인하려면 예수의 논리가 아닌 예수의 실천을 부인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그가 섹스에 대해 언급하는 수준인데 아주 저급합니다. 성은 손이나, 발, 입, 눈, 코와 같은 신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가지 종류의 섹스숭배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터부시 하는 엄숙주의자들과 그것에서 해답을 찾겠다는 섹스숭배자들입니다.
둘다 신체기관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섹스를 이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지요. 섹스가 문제가 된다면 구도자가 머리카락을 깎아버리듯이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인생의 본질적인 무게는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눈알을 뽑아내거나 고환을 잘라내거나 간에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성에 집착하고 있는 저급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식의 이야기도 하나의 해방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저급한 차원인 것은 분명합니다. 진리의 보편성에 가닿지는 못한다는 이야기지요.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고 특수성으로 보편성을 고일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 양반은 정치인에 비유하면 박찬종입니다.
물론 우리가 뻔히 가짜임을 알면서도 영화를 보고, 가짜임을 알면서도 소설을 읽듯이 가짜라도 그 허실을 가려낼 수 있는 안목만 있다면 무해합니다. 게임이죠. 그래 재주껏 나를 속여봐. 속는 척 하고 읽어줄테니..이것도 재미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