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식물은 잎과 줄기와 뿌리가 3이다. 동물은 머리와 몸통과 팔다리가 3이다. 팔다리는 외부의 힘에 대응하고 몸통은 안에서 에너지를 생산하고 머리는 조절한다. 존재는 안과 밖과 중간의 3 또는 공격과 방어와 조절의 3이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 관찰이다. 3은 지구의 중력이 붙잡아주기 때문이고 에너지로 보면 5다. 3은 인간의 관측이고 진짜는 내부 관성력의 조립이다. 인간에게 관측되는 외적 형태에 내부 에너지의 입출력을 더해야 완성된다. 관성 존재는 관성질량이다. 관성은 현상의 변경에 저항한다. 존재는 외부 작용에 맞서 자신의 현재 상태를 지키는 관성질량을 자체적으로 조립할 수 있는 내부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내부가 존재다. 존재한다면 내부가 있어야 하며 방향전환이 가능해야 한다. 3은 양팔저울이다. 저울로 계량하려면 추와 물체가 필요하다. 자연의 어떤 존재는 양팔저울 3에 지렛대의 힘점과 작용점을 더한 5로 성립된다. 5는 관성을 이루는 방향전환 숫자다. 3이 밸런스라면 5는 밸런스의 밸런스다. 형태가 아닌 에너지의 밸런스다. 우리는 중력에 의지해 쉽게 밸런스를 이루므로 3으로 착각하지만 우주공간에서는 만만치 않다. 인간은 관측이 에너지의 입출력을 대신하므로 돼지셈을 한다. 존재는 외부에 맞서 3의 균형을 도출하면서 동시에 내부에서 3의 균형을 만들어 5를 이룬다. 균형 화살이 촉과 깃과 대의 3으로 보인다면 이는 피상적 관찰이고 화살에 실린 힘을 반영하면 화살을 시위에 끼우는 오늬와 활몸의 압력을 견디는 재질의 특성까지 5가 보인다. 모든 존재는 외적균형과 내적균형을 합쳐서 5다. 강변의 돌멩이가 둥근 이유는 외부의 힘에 깎여서다. 돌멩이는 내적으로도 잘 깨지지 않는 균형잡힌 형태다. 사람의 발바닥이 납작한 것이 지구의 평평함에 맞추는 외적균형이라면 손발이 좌우가 대칭인 것은 내적균형이다.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의사결정이다. 의사결정은 곧 균형이다. 나란함이 깨지면서 또다른 나란함을 만들어낸다. 존재는 사슬과 같다.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연결고리다. 사슬은 외부를 연결하면서 동시에 내부를 연결한다. 내부 인간은 내부를 보지 못한다. 더욱 내부의 내부를 보지 못한다. 형태의 내부를 알아도 에너지 내부를 모른다. 내부는 균형이다. 내부가 있다는 것은 균형이 있다는 것이다. 외력에 맞서는 형태의 균형뿐 아니라 자신을 지탱하는 에너지의 균형이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반응한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의 방향을 내부에서 바꾸는 메커니즘이 갖추어져 있다면 우리는 거기에 무엇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존재는 내부다. 우리가 아는 존재는 외부다. 형태는 인간의 관측이 만든 허상이다. 플라톤은 그림자 반대편에서 이데아의 세계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겉이 아니라 속을 봐야 한다. 겉보기 형태가 아니라 내부 에너지를 보고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봐야 한다. 우주에 오직 나란함에 의한 균형과 어긋남에 의한 방향전환이 있을 뿐이다. |